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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칼럼

우울한 날, 세로토닌 음료 한 잔?

[메디시네마 : 의사와 극장에 간다면] 박지욱의 메디시네마(43) 멜랑콜리아

제목만 봐서는 그냥 심리극인가 했습니다. 러닝타임도 2시간이 넘습니다. 몇 번을 망설이다가 봤는데, 보고나니 입이 딱 벌어집니다.

만드는 영화마다 그냥 지나가는 법이 없는 라스폰트리에(Lars von Trier) 감독이 만들었습니다. 필자는  <킹덤(1997)>을 처음보고 충격을 받았고, <도그빌(2003)>을 보고는 아연실색해서 정나미가 뚝 떨어졌는데, 이번 영화를 보고 다시 그의 팬이 되기로 했습니다.

1부는 심리극, 2부는 종말론적 SF영화 

라스폰트리에는 수년 전에 우울증을 앓아 치료를 받았는데 그때의 경험이 이 영화의 중요한 모티프가 되었다고 합니다.  영화는 우울증을 앓는 저스틴과 그를 보살피는 언니 클레어의 이야기, 이렇게 2부로 나뉘어 있습니다.

<멜랑콜리아>(2011년 개봉)라는 제목은 주인공 저스틴이 앓는 병이자, 지구궤도를 침범해 오는 거대한 행성의 이름입니다. 1부만 보면 심리극이고, 2부만 보면 종말론적인 SF 영화입니다. 하지만 멜랑콜리아가 이 두 이야기를 한 코에 꿰어줍니다(스포일러 있습니다).

1부는 저스틴의 결혼식 이야기입니다. 행복해야할 결혼식의 주인공 저스틴, 하지만 심한 우울증으로 성대한 피로연을 망치고, 남편마저 떠나버리는 과정을 아주 꼼꼼하게 보여줍니다.

2부는 언니 클레어의 이야기입니다. 결혼식 후 심한 우울증에 빠져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도 힘든 저스틴을 집으로 집으로 불러 아주 극진히 보살피고, 동생은 서서히 기운을 차려갑니다. 그런데 느닷없이 거대행성 <멜랑콜리아>가 지구 쪽으로 다가온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과학자들이 지구와 절대로 충돌하지 않는다고 공언했기에 남편 존과 아들은 우주쇼를 즐길 준비를 합니다. 하지만 클레어는 본능적으로 불안합니다(동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반면 져스틴은 이 참에 모두 다함께 죽는 것이 훨씬 좋은 일이라며 차분히 종말을 기다립니다. 인간 군상들의 희로애락에 아랑곳하지 않고 멜랑콜리아는 예정된 궤도 위를 굴러옵니다.

영화는 아주 특이한 장면으로 시작을 하기 때문에 시작을 놓치면 안됩니다. 상징적인 장면, 그림, 특이한 풍경, 우주 등 고정된 듯한 그림이지만 자세히 보면 미세한 움직임이 있고, 초현실적인 장면은 이해하기 어렵지만 신비한 힘으로 관객을 매료시킵니다.  하지만 미리 말씀 드리자면 모두 이 영화의 내용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영화가 끝난 후 다시 이 도입부를 보면, 아 그렇구나! 하고 무릎을 탁! 치게됩니다.

영화가 그려내는 풍경도 아름답지만, 소품 그림들도 좋습니다. 브뤼겔의 <눈 속의 사냥>와 <게으런 자들의 천국>, 밀리어스의 <오펠리아> 가 눈에 띕니다. 그리고 키리코의  ‘눈부신’ 밤들을 연상시키는 화면들도 신비스럽습니다.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것은 화면을 신비롭게 감싸고 도는 바그너의 <트리스탄 이졸데>의 선율입니다.

히포크라테스의 4가지 체액이론

멜랑콜리아,  ‘우울(증)’로 번역하지만 차라리 울적함, 침울함, 아니면 그냥 멜랑콜리아라고 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14세기 영어에 처음으로 멜랑콜리(melancholy)란 단어가 등장하는데, 프랑스어 멜랑꼴리(melancolie)에서 왔습니다. 그 어원을 거슬러올라가면 그리스어 멜란콜리아(melankholia)에 이릅니다. 뜻은 ‘검은 쓸갯물’이지요. 쓸개와 울적한 기분이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오늘날 의과대학에 다니는 학생이 병리학 교수에게 묻는다고 가정합시다. ‘교수님, 어떻게 병에 걸립니까?’.  교수는 답합니다. ‘그것을 설명하는 것이 바로 병리학이지. 병은 외부의 미생물, 유전자 이상, 세포의 퇴행, 조직의 변성, 등등으로 생기네.’ 이렇게 현대병리학은 질병의 다양한 이유를 설명합니다.

하지만 2,500년전에 히포크라테스에게 같은 질문을 던지면, ‘우리 몸에는 4가지 체액 즉 피(haima), 쓸개즙(chole), 점액(phlegma), 검은 쓸개즙(melaina chole)이 있는데 각각 심장, 간, 뇌, 비장에서 만들어지지. 그 비율이나 양은 사람마다 조금씩 다른데 성격을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체액이 많은 지 알 수 있다네. 피가 많은 다혈질(sanguine)은 공기처럼 가볍고, 담즙질(choleric)은 불같이 급하고, 점액질(phlegmatic)은 물처럼 차갑고, 검은 쓸개즙질(melancholic)은 흙처럼 차분하지. 이것이 더 과해지면 병이 된다네.’라는 답을 듣습니다. 질병이 몸 속의 4가지 액체들의 과부족이나 불균형 때문에 생긴다는 이론, 바로 ‘체액이론(humoral theory)’입니다.

하포크라테스의 체액론은 어느 날 갑자기 뚝딱 튀어나온 것이 아니라 고대 그리스철학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철학자 엠페도클레스는 우주를 이루는 기본 원소가 공기, 불, 물, 흙, 이렇게 4개 라고 정했는데, 이른 바 ‘4원소론’입니다(영화 <제5원소>는 그 다음 원소를 찾는 이야기였지요). 히포크라테스는 4원소론을 인체에 그대로 적용하여 상응하는 4체액 이론을 주장합니다.

체액이론에 따른다면, 치료는 체액의 균형을 회복시켜주는 방법, 대개는 특정 체액을 배출해주는 기술입니다. 사혈, 흡혈, 배설, 관장, 설사, 구토, 재채기, 발한, 이뇨 등등의 치료법이 2,000년 넘게 널리 쓰였습니다. 하지만 현대의학에서는 쓰지 않지요. 물론 우울증도 검은 쓸개즙 같은 체액과는 관련이 없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불과 60년 전입니다. 그 사연도 재미있습니다. 그 시작은 ‘결핵’입니다.

에드바르드 뭉크의 멜랑콜리(1896년). 뭉크는 어려서 결핵으로 모친과 누나를 잃었고 평생 결핵에 걸릴까 두려워하며 멜랑콜리를 겪었다.  ⓒ 오슬로 뭉크 미술관 소장

에드바르드 뭉크의 멜랑콜리(1896년). 뭉크는 어려서 결핵으로 모친과 누나를 잃었고 평생 결핵에 걸릴까 두려워하며 멜랑콜리를 겪었다. ⓒ 오슬로 뭉크 미술관 소장

1940년대말부터 50년대초까지 처음으로 이소니아자이드, 파스, 스트렙토마이신 같은 결핵치료제들이 등장합니다. 이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결핵약은 이소니아지드(isoniazid)입니다. 연구자들은 이 약을 개선해 좀 더 강력한 치료제인 이프로니아지드(iproniazid)를 합성합니다.

결핵약에서 나온 우울증 치료제

이프로니아지드는 기대만큼 효과가 강했지만 특히 정신을 흥분하게 만드는 부작용이 있었습니다. 결핵약으로는 부적합 판정을 받고 퇴출시키려 했는데, 뉴욕에 사는 의사의 주장 때문에 철회되었습니다. 이 의사는 이 약으로 환자들의 결핵을 치료해보니 결핵 환자들이 우울감도 사라져 좀 더 의욕적으로 치료를 받아 결핵에서 치유되는 경우가 더 많다는 논문을 발표합니다. 한마디로 일석이조라는 거지요.

1957년부터는 아예 우울증 치료제로 임상 시험에 들어가 성적도 잘 나왔는데, 또다시 간과 신장의 부작용이 확인되어 영구 퇴출되고 맙니다.

비슷한 시기에 유럽에서는 조현병 치료를 위해 이미프라민(imipramine)을 개발했습니다. 하지만 조현병 치료에는 효과가 없고 외려 우울증에 효과가 있었습니다. 실망할 필요없이 1958년에 우울증 치료제로 시판합니다. 효과가 좋아서 이후로 비슷한 기전을 가진 데시프라민, 아미트리프틸린, 노트리프틸린 등이 뒤를 따릅니다.

이렇게 약이 먼저 나왔지만 왜 우울증 치료효과가 있는 지는 몰랐습니다. 약리학자들은 나중에야 그 원리를 알게되는데 바로 ‘세로토닌(serotonin; 5-HT)’ 때문이었습니다.

세로토닌. ⓒ 위키백과

세로토닌. ⓒ 위키백과

세로토닌은 소화관, 혈액, 뇌에서 발견되는 신경전달물질입니다. 90%는 소화관에서 분비되어 장운동 조절을 하지만 뇌에서도 분비되어 우리의 기분, 식욕, 잠을 조절하며 행복감을 일으킵니다. 행복하면 동시에 기분도, 잠도, 밥맛도 모두 좋아지지요. 당연한 것이 아니라 세로토닌의 기능 덕분입니다.

신경전달물질은 뉴런이 끝에서 분비되어 신경 신호를 다음 뉴런으로 연결시켜주는 ‘물’인데 아주 조금만 분비되며 신호 전달과 동시에 효소작용으로 파괴되어버립니다. 이렇게 빨리 파괴되어야 신경 신호 전달의 정확성이 높아집니다. 약리학자들은 신경 말단에서 분비된 세로토닌을 분해하는 효소(MAO)가 이미프라민 때문에 기능을 하지 못하고, 그 결과 세로토닌의 농도가 높게 유지되는 것이 우울증을 치료하는 원리로 밝혔습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다른 신경전달물질들도 영향을 받아 부작용도 생깁니다. 그래서 세로토닌만 ‘콕’ 집어서 농도를 올려주는 약(이런 종류의 약을 SSRI이라 부릅니다)을 개발합니다.  1972년에 나온 플루옥세틴(fluoxetine)이 그 첫 주자이고 1988년에 유명한 프로작(Prozac)이라는 이름으로 판매됩니다. 프로작은 우울증치료제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습니다.

오늘날, ‘검은 쓸개즙이 넘쳐서’ 우울증이 걸린다고 말하면 누구나 피식 웃고 말겠지요. 하지만 100년 후에 ‘세로토닌의 부족’만으로 우울증을 설명한 이 시대의 의사들을 비웃을 지도 모를 일입니다. 고차원적인 인간 정신 과정을 한두 가지 물질의 관점으로 해석하는 것은 지금 봐도 엉성하기 그지없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 시대에는 멜랑콜리아에 버금가는 ‘세로토니아(serotonia)’의 시대로 우울증의 역사에 기록될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울적하고 기운이 빠질 때  ‘세로토닉’ 음료를 진하게 한잔 들이키고 흥청거리며 집으로 가는 날이 곧 올지도 모를 일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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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댓글 (1)

  • 신석균 2016년 9월 6일9:35 오전

    사이언스올 모든 것이 좋은데, 왜 이리 홍보가 되지 않은 것인지 걱정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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