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칼럼

예수회 선교사와 키나나무 껍질

[메디시네마 : 의사와 극장에 간다면] 박지욱의 메디시네마 (23) 미션

영화가 끝나고도 한동안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이미 오래 전에 한 번 보았지만 이런 내용이었던 줄 미처 몰랐습니다. 감미로운 영화 음악의 선율에만 마음을 빼앗긴 탓일까요? 30년 만에 다시 본 영화는 전혀 다른 영화로 보였습니다. 그때는 제대로 못 본 것이 틀림없습니다.

1986년에 개봉한 이 영화는 230년 전인 1758년에 남아메리카 이구아수폭포(이구아수란 과라니족 말로 ‘큰 물’입니다) 상류에 있었던 선교소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회 수사(Jesuit)인 가브리엘 선교사는 과라니부족(Guarani)의 닫힌 마음을 음악으로 열고 마을에 현지인과 이방인이 종교로 통합된 공동체를 이룹니다.

하지만 스페인과 포르투갈 정부가 이 지역을 포르투갈령으로 편입시키는데 합의하자 부족에게 위기가 닥칩니다. 포르투갈은 노예제도를 인정하는 나라이기 때문에 포르투갈에 편입되면 부족민들은 노예가 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지요. 선교사들은 이 지역을 스페인령으로 남겨두기 위해 주교를 설득하며 갖은 노력을 다하지만 결국 결정은 번복되지 않습니다. 아무도 부족민의 생존권에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수사들은 자신의 방식대로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부족민들과 최후를 같이 합니다.

이처럼 영화에 나오는 예수회 수사들은 세속국가의 이익보다 인디오의 권리와 인권을 옹호했기 때문에 신대륙 정복자들에겐 눈엣가시였습니다. 주교의 강력한 경고처럼 이 사건 9년후 예수회는 스페인제국(아메리카 포함)에서 추방되었고, 6년 후에는 해산됩니다(다행히 1814년에 재건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는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지요. 오히려 에수회 수사들의 이야기가 역사에 잘 기록된 곳은 바로 의학입니다. 바로 ‘예수회 나무껍질’을 통해서지요.

1546년에 브라질에 발을 디딘 이후 점차로 남아메리카의 선교활동 지역을 넓혀갔던 예수회 선교사들은 1620~30년 경 인디오들이 말라리아에 걸리면 달여 먹는 생약을 알게 됩니다. 인디오들이 ‘키나키나’라고 부른 이것은 ‘키나나무’의 껍질이었지요. 기나피(幾那皮) 혹은 기나수피(幾那樹皮)로 번역합니다.

지혜의 여신 아테나에게 키나나무를 바치는 페루 인디오 소년. 17세기 판화.  ⓒ 위키백과

지혜의 여신 아테나에게 키나나무를 바치는 페루 인디오 소년. 17세기 판화. ⓒ 위키백과

말라리아는 유럽인들에게도 오랜 세월 동안 아주 큰 고통을 주는 병이었지만 특별한 치료법은 없었습니다. 목욕재계하고 단식하면서 사혈을 받는 것이 전부였는데 아무 효과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말라리아에 걸리면 적혈구가 망가지면서 빈혈이 생기는데, 사혈이라는 이름으로 피를 더 뽑아내었으니 환자가 더 빨리 죽을 수도 있었겠지요. 하지만 예수회 선교사들이 유럽으로 가져온 인디오의 명약 덕분에 유럽인들도 이제 제대로 된 말라리아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답니다.

기나피의 원료인 키나나무에는 인디오들의 언어인 ‘키나(quina)’가 아닌 ‘신코나(Cinchona)’라는 학명이 붙습니다. 이 이름은 페루 주재 스페인 총독의 부인 이름에서 따왔습니다. 총독 부인이 말라리아에 걸렸다가 기나피를 먹고 목숨을 건졌고, 이를 감사히 여겨 기나피를 가난한 이들에게 나주어 주었다고 합니다. 부인은  ‘친촌’ 백작 부인(Countess of Chinchón)이었고 분류학자이자 의사인 카를 린네가 이 이름을 키나나무의 속(屬)명으로 붙였습니다.

키나나무의 일종인 Cinchona calisaya.  ⓒ 위키백과

키나나무의 일종인 Cinchona calisaya. ⓒ 위키백과

유럽으로 수입된 기나피는 ‘예수회 나무껍질/가루(Jesuit bark/powder)’란 이름으로 팔렸습니다. 기대와 달리 처음에는 별로 인기가 없었습니다. 당시 유럽은 종교개혁(1517년) 후 프로테스탄트의 세력이 강해지고 있었습니다. 가톨릭에 반감이 큰 프로테스탄트들은 가톨릭 수사들이 아메리카 정글에서 가져온 나무껍질이 말라리아의 특효약이 된다고 믿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기나피는 예수회가 독점으로 공급하고 있었던 데다가 아주 비쌌답니다. 부패한(?) 가톨릭에 돈을 보태주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는 신교도 의사들이라면 기나피 말만 들어도 고함을 버럭! 내지를 정도였답니다.

청교도혁명이 일어났던 영국에서는 기나피 혐오가 특히 심했답니다. 1654년 경 영국에도 기나피가 수입되었지만 청교도혁명을 일으킨 올리버 크롬웰은 장기간 말라리아로 고생을 해왔으면서도 예수회의 영약(?)을 거부하고 1658년에 말라리아로 죽었습니다.

하지만 신앙의 종류를 가리지 않고 기나피는 아주 효과가 좋았습니다. 발열 패턴에 따라 정확한 시점에 약을 먹고, 반복적으로 먹어주면 말라리아에서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기나피의 효능에 감탄한 사람들은 나중에는 이런저런 열병에도 기나피를 쓰기 시작합니다. 그러다 보니 수요는 점점 더 늘어 17세기 후반이 되면 같은 무게의 금과 맞바꿀 정도가 되지요. 하지만 수요를 따라잡기 위한 기나피 공급 증대는 없었습니다. 기나피를 채취하기 위해서는 나무를 베어내야 하고 그 자리에 새 나무를 심는데 10년이나 걸려야 기나피를 얻을 수 있었지요.

그 동안 기나피 가격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오릅니다. 고가의 기나피를 선적한 스페인 상선은 대서양 해적들의 좋은 먹잇감이 될 수 밖에 없었답니다.

만성적인 공급 부족을 견디다 못한 영국과 네덜란드는 하는 수 없이 자구책을 마련합니다. 두 나라는 키나나무가 자라는 안데스 지역과 비슷한 식생과 기후가 있는 식민지를 갖고 있었으니 키나나무를 한번 심어보기로 했습니다.

모두 40종의 키나나무 중 약효가 있는 것은 12종이었습니다. 특히 해발 1,000~3,000 미터 높이의 안데스 고지에서 자라는 나무들이 최상품이었습니다. 하지만 씨앗은 당연히 스페인이 금지옥엽으로 관리하는 금수(禁輸) 품목이었지요. 영국은 비밀리에 문익점, 아니 탐험가이자 지리학자인 클레멘츠 마크햄(Clements Markham)을 시켜 씨앗을 몰래 빼돌려 인도와 실론(스리랑카)에서 재배에 성공했지만 약효가 없는 키나나무인 것으로 밝혀집니다. 반면에 네덜란드인들은 약효가 있는 키나나무를 자바섬에서 재배하는데 성공합니다.

영국의 문익점인 클레멘츠 마크햄.  ⓒ 위키백과

영국의 문익점인 클레멘츠 마크햄. ⓒ 위키백과

한편으로 1820년에 기나피에서 유효성분을 추출하여 ‘키니네(quinine, 퀴닌)’가 나왔습니다. 하지만 이 약은 별로 인기가 없었습니다. 키니네는 쓴 맛이 강해 먹기가 아주 불편했고 억지로 삼켰다 해도 구토하기 십상이었습니다. 그것도 참고 억지로 약을 계속 먹으면 여러 가지 부작용으로 고생을 하다 보니 사람들은 여전히 ‘자연산’을 선호하였답니다.

키니네는 중국으로도 들어왔습니다. 중국에서는 키니네의 음을 따  ‘찐지나’로 불렀고 ‘金鷄蠟’으로 썼습니다. 중국을 통해 근대 개항기에 우리나라로도 들어오자 우리는 한자의 음을 읽어 ‘금계랍(金鷄蠟)’이라 부릅니다.

우리나라에도 있던 학질(虐疾) 즉, 말라리아의 치료제로 썼지만 해열진통제로도 널리 쓰였습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젖먹이들 젖 떼기(離乳)에도 썼습니다. 쓴맛이 나는 키니네를 젖꼭지에 살짝 발라두면 모르고 입을 댄 젖먹이들은 깜짝 놀라 다시는 젖을 안 물었다고 합니다. 키나나무의 말라리아 치료효과를 발견한 인디오들도 대단하지만, 젖 떼기 용도로 쓴 우리 민족도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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