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칼럼

영화 속 ‘페스트’와 ‘르네상스’

[메디시네마 : 의사와 극장에 간다면] 박지욱의 메디시네마(83) 인페르노

보스턴의 하버드대학교에서 기호학을 연구하는 로버트 랭던 박사는 어느 날 피렌체의 한 병원에서 깨어납니다. 머리를 다친 후 병원에 내버려진 터라 최근 2일 정도의 기억이 없어 자신이 어떻게, 그리고 왜 이 먼 나라에 왔는지 알 수가 없네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랭던을 노리는 괴한이 병원을 습격하고, 랭던은 이탈리아 여의사 시에나 브룩의 도움을 얻어 간신히 피신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소지품 속에서 보티첼리의 그림 <지옥의 지도>를 발견합니다.

보티첼리의 그림은 단테의 신곡 중 지옥편인 <인페르노>과 연결되고, 다시 바샤리의 그림과 단테의 데스 마스크…. 이렇게 꼬리에 꼬리를 무는 기호학의 대장정이 시작됩니다. 이 모든 실마리들은 과격한 생물학자이자 거부인 버트란트 조브리스트의 인류 절멸 프로젝트와 연결됩니다.

조브리스트는 인구 과잉이 인류의 공멸을 부른다며, 자신이 개발한 ‘인페르노 바이러스’로 인구의 절반을 죽일 계획을 세웠고, 계획이 실행되기 전에 자신의 신상에 이상이 생기면 다른 이가 그 계획을 완수하도록 안전판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랭던에게 걸려든 것이지요. 하지만 랭던은 영문도 모른 채 괴한들의 추격을 뿌리치며, 동시에 실마리를 찾아나서야 하는 이중고를 겪습니다. 더하여 가공할 생물학 무기가 될 가능성이 높은 ‘인페르노 바이러스’를 손에 넣으려는 불온한 세력까지 합세하여 사태는 상당히 복잡해집니다.

피렌체, 베네치아, 이스탄불의 명소들, 아름다운 그림들과 단테의 신곡…. 풍성하게 차려진 르네상스식 정찬을 관객들에게 제공하는 이 영화의 주인공 랭던은 지옥문을 걸어 잠글 ‘단테 코드’를 어떻게 풀어낼까요?

페스트 의사.  ⓒ 위키백과

페스트 의사. ⓒ 위키백과

일단 두 가지 생각이 떠오릅니다. 페스트와 르네상스. 이 영화의 코드입니다. 랭던의 환상 속에 등장하는 새 부리가 달린 가면을 쓰고, 긴 외투를 입은 인물은 전형적인 중세의 ‘페스트 의사’입니다. 페스트로 고통받는 환자들이 울부짖고, 시신을 태우는 검은 연기가 자욱한 중세의 거리에 너무나도 섬뜩한 복장으로 누비는 의사의 모습은 어디선가 본 적이 있지요? 왜 하필이면 ‘새 가면’이었을까요? 악취를 막을 다양한 약초들을 새 부리 속에 가득 채울 수 있었기 때문이랍니다. 의사의 입장에서 보면 일종의 ‘방독면’이었는데,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흉측하기 그지없습니다. 하지만 페스트의 시대적 아이콘이 되기는 했습니다.

조브리스트의 ‘인페르노 바이러스’는 페스트균과 맞먹는 21세기판 페스트균입니다. 페스트, 우리는 겪지는 못했어도 무서울 돌림병으로 익히 잘 알고 있습니다. 영어로는 pest 라고 쓸 것 같지만, pest 룰 사전에서 찾아보면 ‘해충’으로 나옵니다(해충을 죽이는 살충제도 pesticide 라고 쓰지요). 그렇다면 우리가 아는 페스트는 영어로 무엇일까요? plague 입니다. 전혀 다른 단어이지요. 아니면 black death 라고도 쓰는데, 이것은 흑사병으로 번역합니다.

흑사병이라고도 부르는 페스트는 인류가 아는 가장 끔찍한 돌림병입니다. 유럽인들에게 큰 상흔을 남긴 페스트는 이방(異邦)에서 온 병입니다. 첫 대유행은 6세기, 유스티아누스 대제(Justian I)가 통치하던 비잔틴제국시대입니다.

유스티아누스 황제는 게르만족에게 빼앗긴 옛 서로마제국을 수복하여 로마의 영광을 되찾으려는 정복전쟁을 벌이는 한편, ‘하기아 소피아’ 성당 같은 건축물도 세웠던 동방정교회의 성인이자 비잔틴제국의 통치자였습니다. 하지만 이집트에서 유입된 선페스트로가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덮쳐 인구의 40%를 잃는 치명타를 입어 제국은 몰락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퍼져나간 페스트가 전 유럽을 집어삼켜 200년 동안 유럽 인구를 반토막냅니다. 조브리스트는 여기서 아이디어를 얻었을까요? 아닐 겁니다. 더 큰 참사가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니콜라스 푸생, , 1630년.

니콜라스 푸생, <애쇼드의 페스트>, 1630년. ⓒ 루브르박물관 소장

우리가 아는 페스트 대유행은 그로부터 800년 지난 14세기의 이야기입니다. 1346년, 아시아에서 팽창해오던 몽골제국의 군사들이 흑해의 항구도시 카파에서 유럽의 군대와 마주쳤을 때, 페스트가 유럽으로 월경합니다. 카파에 있던 이탈리아 상인들의 귀국선을 얻어 탄 페스트는 먼저 이탈리아의 항구도시들을 유린합니다. 그 다음 해상교역로를 통해 지중해 전역으로 퍼진 후 대서양 연안과 영국, 스칸디나비아, 독일, 러시아,… 1,000년 전 유럽대륙을 종횡무진 누볐던 게르만의 대이동 때처럼 페스트균은 전유럽을 살상하고 약탈합니다. 지오바니 보카치오의 『데카메론(1353)』이나 다니엘 디포우의 『페스트 연대기(1722)』의 그 페스트가 바로 이 때의 페스트이지요.

페스트를 일으키는 병원균은 원래 들쥐나 다람쥐 같은 야생 설치류의 몸에 있는 균입니다. 페스트균에 감염된 설치류의 피를 빨아먹는 쥐벼룩이 다른 설치류로 옮겨다니며 균을 퍼뜨리는데, 야생 설치류는 오랫동안 이 균에 적응이 되어 큰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야생 설치류가 집쥐와 접촉에 균을 옮기면 비로소 대유행이 시작되지요. 야생 철새들에겐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AI 바이러스가 이 바이러스에 대한 면역이 없는 집오리나 닭에게 옮겨가면 떼죽음을 일으키는 것과 마찬가지지요(제81화 <감기>참고).

페스트를 일으키는 에르시니아 페스티스 균.  ⓒ 위키백과

페스트를 일으키는 에르시니아 페스티스 균. ⓒ 위키백과

일단 인간의 집에 얹혀사는 집쥐들이 떼죽음을 당합니다. 쥐벼룩의 입장에서 보면 삶의 터전인 집쥐가 죽어버리고 몸이 사늘히 식어가면 한시바삐 새 거처를 찾기 위해 비상이 걸립니다. 다른 쥐가 근처에 나타나면 재빨리 옮겨가지요. 이렇게 병원균을 퍼트리는데, 불행하게도 집쥐들이 다 죽어버려 오갈 데가 없게 되면 그때부터는 놀라운 점프 실력을 발휘하여 사람들에게 옮아갑니다. 페스트를 다룬 이야기들의 시작이 대부분 쥐의 떼죽음으로 시작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지요.

페스트는 3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사타구니의 가래톳처럼 임파선(淋巴)이 부풀어 오르며 심한 통증으로 시작해 곧 고열과 함께 온몸에 시퍼런 멍이 들며 죽는 선(腺)페스트, 균이 혈류 속으로 들어가 장기를 망가뜨리며 출혈을 일으키는 패혈성(敗血性) 페스트, 그리고 공기를 떠돌던 균이 폐로 흡인되어 객혈을 일으키는 폐(肺)페스트가 있습니다. 치사율은 선페스트가 절반, 나머지는 거의 100%입니다.

페스트를 흑사병으로 부르는 이유는 출혈 때문입니다. 온 몸에 출혈이 생기는데 특히 피하 출혈이 생기면 멍처럼 보입니다. 시신들은 한결같이 온몸의 멍 때문에 거무튀튀해 보이는데, 이것을 두고 흑사병(黑死病)으로 부른 것이지요.

14세기에도 유럽은 엄청난 피해를 입었습니다. 첫 4년 만에 인구의 1/3인 2,50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답니다. 하지만 이것은 전주곡에 불과했습니다. 14세기 내내 8년을 주기로 대유행을 하여 참혹한 피해를 남겼으니까요. 그 기간에 많은 기록을 남겼고, 우리는 그 기록에 너무나도 익숙해져서 페스트 하면, 14세기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그 페스트를 자연스럽게 떠올립니다.

사람들은 하염없이, 기약 없이 죽어나갔습니다. 전원의 농경지가 돌볼 사람이 없어져 황폐해지자, 임금이 서너 배로 뛰어 생존자들의 삶은 이전에 비해 나아진 것도 사실입니다. 부자들은 죽은 친척들의 유산으로 더 큰 부자가 되어 자본이 축적되기도 했습니다. 물질적인 풍요는 정신적인 여유를 낳고, 덕분에 중세가 끝장나고 르네상스가 도래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이 주장이 조브리스트의 과격한 주장의 근거입니다.

중세말의 페스트가 시작된 곳도 이탈리아였고, 르네상스가 시작된 곳도 이탈리아입니다. 특히 영화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는 피렌체는 페스트로 엄청난 피해를 입었던 곳이지만(피렌체에서만 10만 명이 죽었다고 보카치오는 『데카메론』에 기록했습니다) 나중에는 르네상스의 수도로 찬란하게 부활합니다. <인페르노>가 첫 시사회를 연 곳도 피렌체입니다. 피렌체를 위한 영화 목록에 새로 추가해도 될 만큼 피렌체의 매력을 물씬 보여줍니다. 꼭 한번 가보고 싶어지네요.

하지만 영화는 이스탄불, 즉 비잔틴제국의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플에서 끝납니다. 특히 피날레 장면이 촬영된 곳은 ‘예레바탄 사라이’ 혹은 ‘바실리카 시스턴 (Yerebatan Saray/Basilica Cistern)’고 불리는 ‘지하 궁전’입니다. 축구장 규격보다 더 큰 크기에 336개의 기둥으로 공간을 만든 이 시설은 이름과 달리 ‘지하 저수지’입니다. 콘스탄티노플을 건설한 콘스탄티누스 황제 때 공사가 시작되어 유스티아누스 황제 시절에도 건설이 계속되었던 대역사의 현장입니다.

저수지에 쓰인 기둥들은 인근의 고대 그리스 신전에서 뽑아왔습니다. 기독교의 수호자였던 황제는 고대의 신들을 모시는 사원을 이교도의 불경한 제단으로 보았지요. 덕분에 아주 멋진 기둥들이 도열한 특이한 지하 저수지가 되었는데, 기둥들 중에 2개의 받침은 신화에 나오는 괴물 메두사의 머리를 뒤집어 놓았습니다. 누구든 쳐다보면 바로 돌이 되어버리는 메두사의 얼굴, 인간에겐 페스트만큼이나 두려운 존재입니다.

원작자인 댄 브라운의 의도였는지는 알 수는 없으나 결국 피렌체와 이스탄불(콘스탄니노플)는 페스트의 엄청난 재앙지였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콘스탄티노플은 페스트 대유행 후에 몰락하기 시작했고, 몰락했던 피렌체는 르네상스의 수도로 부활합니다. 덕분에 인류의 역사는 한발 더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이것이 필자가 이 영화에 건진 ‘인페르노 코드’입니다.

(6102)

뉴스레터 구독신청
태그(Tag)

전체 댓글 (0)

과학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