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칼럼

영화 속 조류독감(AI) 이야기

[메디시네마 : 의사와 극장에 간다면] 박지욱의 메디시네마

최근에 메르스(MERS) 의심 환자 발생-예방적 격리-음성 판정이라는 뉴스가 종종 나옵니다. 중동 지방을 여행한 후에 열이 나거나 설사가 나면 일단 의심 환자로 보고 미리 조치를 취하는 것 같습니다. 2015년 여름의 ‘메르스 사태’를 겪은 후 감염병에 대한 경각심이 높아진 탓입니다.

감염병(感染病), 한 세대 전에는 전염병(傳染病)이나 역병(疫病)으로 불렀습니다. 모두 같은 뜻으로 ‘돌림병’입니다. 돌림병이 발생하면 역학(疫學)조사를 하는데, ‘역(疫)’자가 돌림병이란 뜻이 있습니다.

감염병은 근대 의학의 총아였습니다. 미생물들이 질병의 원인이라는 사실을 세균학자(나중에는 미생물학자로 불림)들이 알아내었고, 전염의 이유도 밝혔습니다. 한 때는 모든 병은 감염병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미생물학자들이 잘 나가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감염 외에도 병을 얻는 이유가 수없이 많이 밝혀지고, 감염병도 통제되기 시작하자 감염병에 대한 관심은 좀 시들해집니다.

급기야 1970년대에는 감염병의 시대는 조만간 끝이 날 것이라고 주장하는 전문가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예단을 비웃기라도 하듯 에이즈(AIDS)가 나타났고, 결핵이 무서운 저항력으로 기승을 부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잊을 만하면 나타나는 조류독감, 사스, 신종플루, 메르스… 아직도 전염병원체들은 도처에 존재합니다.

오늘은 영화 <감기>를 통해 감염병의 창궐 과정과 이에 맞서 싸우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알아볼까요.

2014년 4월(영화의 시점으로 보면 미래입니다), 홍콩(!)을 통해 밀입국한 외국인을 통해 ‘분당’에 조류독감이 유입됩니다. 엄청난 전파 속도도 병은 퍼져 나가고, 병원들마다 밀려드는 환자로 아수라장이 됩니다. 사태가 걷잡을 수 없게 되자 정부는 일단 분당을 봉쇄합니다. 하지만 치료제도 없는 병이라 의료진들도 무엇을 해야 할 지 모릅니다. 이 와중에 감염병 전문의사와 소방구조대원은 고난을 극복해나가며 사랑을 꽃피웁니다.

조류독감(avian influenza, avian flu, bird flu. 이하 AI)는 새들 사이에 퍼지는 인플루엔자입니다. 인플루엔자 바이러스가 옮기는 감염병이 인플루엔자이고 우리는 독감(毒感)으로 부릅니다. 이 영화의 제목은 <감기>이지만 영어로는 <The Flu>라고 했는데, 감독의 의도를 잘 모르겠습니다. 영화 내용은 감기(感氣)가 아니라 조류독감이니까요.

AI는 새들의 인플루엔자였지만 20세기 말에 처음으로 사람을 감염시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첫 발원지는 역시 홍콩이었습니다. 우리에겐 IMF의 해로 기억되는 1997년 5월 9일, 홍콩의 한 병원에서 3세 아이가 죽습니다. 정상적으로 자라며 건강했던 아이였는데, 며칠 전에 감기 증상을 보였다가 곧 바이러스성 폐렴으로 발전해 입원합니다. 하지만 며칠 만에 숨을 거두고 맙니다. 아이의 목숨을 거두어간 것은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였습니다.

AI의 첫 발병지 홍콩의 야경.  ⓒ 박지욱

AI의 첫 발병지 홍콩의 야경. ⓒ 박지욱

인플루엔자의 사망률은 0.01%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무척 드문 일이지요. 의료진은 이 예외적인 죽음의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 바이러스의 종류(subtype)을 규명합니다. 3개월 만에 A형 인플루엔자 바이러스 중에서 ‘H5N1형’으로 밝혀집니다. 이런 종류의 바이러스는 사람이 아닌 새들의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였는데 처음으로 사람을 죽인 케이스로 세상에 알려집니다.

새는 자연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들의 저수지나 다름 없습니다. 새 외에도 돼지, 개, 말, 사람이 인플루엔자에 걸립니다. 사람이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지독하게 앓는데 반해 새는 별 문제가 안됩니다. 하지만 돌연변이 바이러스가 생겨 새들을 공격하면 새도 거의 100% 떼죽음을 당합니다. 이를 “고(高)병원성 AI(highly pathohgenic AI; HPAI)”라 부릅니다. 방송에서는 [고병-원성]으로 발음하는데 [고-병원성]입니다. 반대의 경우는 저병원성(LPAI)입니다.

AI 는 100여 년 전에 이탈리아에서 처음 확인하였습니다. 이후로도 세계 곳곳에서 띄엄띄엄했지요. 하지만 양계농가에만 피해를 주는 골칫거리로, 수의사들을 바쁘게 하는 가축 전염병이었습니다. 사람을 다루는 의사들은 AI에 관심 가질 필요도 없었지요. 그런데 1997년 여름에 처음으로 살인자의 목록에 등재된 것입니다.

학자들은 먼저 스페인 플루(인플루엔자)를 떠올립니다(75화 <에곤 쉴레> 참고). 많게는 5천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이 플루는 돼지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의 변종이 사람을 공격한 것이었습니다. 혹시 AI도 같은 길을 갈까요?

아니나 다를까 겨울이 되자 홍콩에서 추가 환자들이 생깁니다. 11월~12월에만 18명이 입원했고 6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모두 ‘H5N1형’에 감염되었습니다. 일반적인 인플루엔자 희생자들은 면역력이 떨어진 병약자, 고령자, 어린 아이들인데 이번에는 18세 이상의 성인을 공격했습니다. 스페인 플루도 그랬었지요. 대유행의 전조일까요?

AI 바이러스.  ⓒ 위키백과

AI 바이러스. ⓒ 위키백과

‘H5N1형’은 특히 야생 오리 같은 철새들에게서 왔습니다. 철새들은 원래부터 이 바이러스와 친숙하므로 별 문제가 없습니다. 철새들은 계절이 변할 때마다 아시아의 남북을 오갑니다. 철새들의 비행은 논스탑(non-stop)이 아니며 중간중간에 기착을 해야 하는데 기착지에 바이러스가 섞인 배설물을 내려놓거나 심지어는 현지 농장의 닭이나 오리 같은 가금류(家禽類)와 접촉합니다. 평생 갇혀 살아온 가금류에겐 이 바이러스는 처음 접하는 외계 생명체나 다름없습니다(65화 <컨택트>참고). 10일 간의 잠복기가 지나면 떼죽음을 당합니다. 인근지역까지 비상 상항이 선포되고, 방역선이 설치되고, 소독에, 살처분, 구덩이 매몰,…. 이미 우리에겐 너무나도 익숙한 풍경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10일간의 긴 잠복기 동안 우리도 모르게 병이 퍼져나가는 것이지요.

우리도 그렇지만 동남아시아나 중국의 재래시장에 가면 살아있는 닭이나 오리들을 사고 팝니다. 이 중에 한 마리라도 H5N1 바이러스에 감염이 되어있다면 시장에 나온 닭/오리를 통해 다른 농장으로 바이러스가 퍼지는 것은 시간 문제입니다. 그러지 ‘떼죽음’으로 드러나기 전에 바이러스는 이미 방역선을 넘어갔습니다. 최근(2017년 6월)에 제주에서 발생한 HPAI 도 군산 지역에서 들여온 감염된 오골계가 재래시장에 나오면서 퍼져나간 것입니다.

자, 그런데 닭이나 오리만의 문제가 아니라서 큰 문제이지요. 감염된 가금류(생사와 무관하게), 오염된 농기구, 가금류가 나왔던 시장을 통해서도 바이러스가 직접 사람 몸에 옮아가 병을 일으키니까요.

1997년 홍콩에서 첫 환자가 보고되었고, 2003년에는 유럽과 아프리카에도 홍콩발 AI 가 옮겨갔습니다. 지금까지 밝혀진 사람 감염 AI 바이러스는 H5N1, H7N3, H7N7, H7N9, H9N2, H10N8 입니다. 2003년부터 2017년 현재 모두 16개국에서 859명의 환자가 발생하여 그 중 453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치사율 53%). 환자가 10명 이상 발생한 나라는 이집트, 인도네시아, 베트남, 캄보디아, 중국, 타이, 터키입니다.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많이 보입니다. 그럼 왜 AI 는 홍콩이나 중국, 동남아시아에서 기승을 부리는 걸까요?

전문가들은 산 닭/오리를 유통하는 재래 시장의 문제를 지적합니다. 그리고 닭/오리와 돼지를 함께 키우는 동남아시아의 사육환경에 주목합니다. 돼지 역시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를 사람에게 퍼뜨리는 동물입니다. 가금류와 돼지, 사람이 함께 기거하는 공간에서 다양한 숙주들을 오가며 변종 바이러스가 생길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그러고 보면 한번씩 전세계적으로 대유행하는 인플루엔자들은 광동형, 푸젠형, 상하이형, 홍콩형,…같이 동남아시아에서 시작한 경우가 많습니다.

재래시장에서 거래되는 산 닭과 죽은 닭.  ⓒ 박지욱

재래시장에서 거래되는 산 닭과 죽은 닭. ⓒ 박지욱

우리나라는 2003년에 처음으로 AI가 발생한 이후 2~3년 마다 발생하다가 2014년 이후로는 매년 발생하고 있습니다. 원인이 되는 철새들의 비행을 금지할 수 없어서 아직 AI에 대한 예방책도 없는 실정입니다. 대책이라고 해야 살처분 매몰과 이동 금지가 전부입니다.

살처분은 1997년 AI가 처음 발병했을 때 홍콩 정부가 내린 극약처방으로 3일 만에 지역내의 모든 가금류를 이 방식으로 처리했습니다. 덕분에 홍콩 AI 는 수그러졌습니다(하지만 이후로도 살처분의 효과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습니다).

사람끼리 병을 옮기는 변종이 생길까요? 모를 일입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AI가 허술하게 연례 행사로 창궐한다면 우리 인간의 안전도 염려스럽습니다. 변종이 하나라도 생겨 사람 사이에 전파된다면, 이후로는 걷잡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질까 두렵습니다. 닭들이야 살처분하겠지만 사람은, 이 영화에서 나오는 방법(?)으로 처분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연례적인 발병이 멈출 때까지만이라도 엄격한 통제와 추적이 가능한 유통경로만을 이용한 가금류 거래가 이루어져야 하지 않을까요? 당장에는 불편해도 농가의 천문학적인 피해를 막고 연례적인 발병을 막을 대책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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