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칼럼

영조는 왜 망원경을 깨뜨렸을까

쓸모없고 아름답지 못한 물건, 천리경 (하)

이야기과학실록 그날 인조실록에 기록된 바에 의하면 배 안에는 코가 높고 눈이 파란 사람 50명이 타고 있었다고 묘사되어 있다. 그들은 머리를 땋아 늘어뜨리고 있었는데, 역관을 시켜 중국어와 몽고어, 일본어, 당시 청나라 언어였던 만주어까지 동원해 국호 및 표류 이유 등을 물었으나 말이 전혀 통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붓을 주어서 무슨 말이든 쓰게 해보았더니 그들이 적는 문자는 마치 구름이나 산 같은 모양이어서 역시 알아볼 수 없었다. 다만 그들이 하는 말 중에서 딱 하나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 있었다. 그것은 낭가사기(浪加沙其)라는 말이었는데, 아마 일본의 나가사키로부터 표류하여 이곳에 도착했다는 뜻으로 짐작되었다.

그로부터 약 한 달 후인 1797년(정조 21) 10월 4일 정조는 신하들에게 정무를 보고받는 자리에서 “전에 동래에 표류한 배에 대해 어떤 사람은 아마도 아란타(阿蘭沱) 사람인 듯하다고 했는데 아란타는 어느 지방 오랑캐 이름인가”라고 물었다.

이에 비변사 당상 이서구는 효종 때에도 일찍이 아란타 배가 와서 정박한 일이 있었는데, 아란타는 서남 지방 오랑캐의 무리로 중국 판도에 소속된 지 얼마 되지 않는 곳이라고 대답했다. 아란타란 지금의 네덜란드를 가리키는데, 효종 때 나타난 배는 바로 하멜 일행이 나가사키로 향하던 중 제주도에 표착한 네덜란드 상선 스페르붸르호를 일컫는다.

하지만 동래 용당포에 상륙한 배는 네덜란드가 아니라 사실은 영국의 범선 프로비던스호였다. 길이 33미터, 무게 40톤, 포 16문을 장착한 프로비던스호는 영국 해군 월리엄 로버트 브로이튼 선장의 지휘 하에 북태평양을 탐사하던 중 타타르해협으로부터 조선의 영흥만 앞바다를 거쳐 동해안을 따라 남하하다가 동래에 상륙한 것이었다.

앞서 조선에 우연히 표착한 박연(얀얀세 벨테브레)이나 하멜 일행의 경우와 달리 프로비던스호는 조선 탐험이란 뚜렷한 목적을 띠고 상륙한 최초의 서양 선박이었다. 그 같은 정황은 브로이튼 선장이 후에 출판한 ‘북태평양 항해탐사기’라는 책에 뚜렷이 적혀 있다. 그 책에서 브로이튼은 “새로운 정보와 교역이 기대될 것으로 생각해 조선 해안을 조사하는 것이 본래 항해 목적 중 하나”라고 밝혔다.

최초로 공무역을 제의한 서양 선박

프로비던스호는 무려 열흘 동안이나 용당포에 정박해 있었는데, 그동안 지방관리들은 물론 일반 백성들도 무리 지어서 배에 올라 선원들의 환영을 받으며 호기심 어린 눈으로 구경을 하고 다녔다.

동래부에서는 프로비던스호 선원들에게 물과 소금, 쌀, 고기, 해초 등을 무상으로 제공하는 등 비교적 호의적인 태도를 취했다. 이때 동래부사 정상우가 올린 보고에 의하면 프로비던스호에 실린 물건들은 유리병과 천리경, 구멍이 없는 은전 등 모두 서양물산이라고 되어 있다. 하지만 조정은 프로비던스호가 떠날 때까지 더 이상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 후 1832년(순조 32) 때 충청도 홍주 고대도(지금의 충남 보령시 오천면 고대로리)에서 20여 일간 정박한 영국 동인도회사 소속의 상선인 로드 암허스트호는 서양 선박 중 최초로 조선과의 공무역을 정식으로 제의했다.

그들은 모직물과 유리그릇 등을 주고 조선의 금ㆍ은ㆍ동과 대황 등의 약재를 사고 싶다고 밝혔다. 더불어 영국 국왕의 이름으로 된 문서와 예물을 조선 국왕에게 전달해줄 것을 요구했다. 이들인 바친 예물 중에는 천리경 2개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조정은 중국 황제의 허락 없이는 외국과 통상할 수 없다고 통보하며, 그들에게서 받은 서한과 선물을 되돌려 주었다.

조선이 이처럼 서양문화와의 교류에 소극적이었던 것은 여러 가지 복잡한 사정이 있었겠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천리경에 대한 무관심은 나름대로 뚜렷한 이유가 있었다. 그 이유를 잘 드러내는 하나의 사건이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1744년(영조 20) 천문, 지리, 기후관측 등의 일을 맡아보던 관상감의 관원 김태서는 사재를 들여서 천리경 및 천문서적 등을 들여와 영조에게 올린 적이 있었다. 그런데 영조는 천문서적 중 일부만 관상감에 내려 보내고 천리경 등은 내려 보내지 않았다.

쓸 곳이 있는 물건인 데도 영조가 내려 보내지 않자 결국 영의정 김재로가 영조에게 그에 대해 고했다. 그러자 영조는 “이른바 규일영(태양관측용 망원경)이란 것이 비록 일식을 살펴보는 데는 효과가 있으나 곧바로 햇빛을 보는 것은 본디 아름다운 일이 아니다”라며 “규일영이라 하면 좋지 못한 무리들이 위를 엿보는 모습이 되므로 이미 명하여 깨버렸다”고 대답했다.

그 자리에 함께 있던 다른 신하들은 태양을 관측하는 행위가 불경스럽다며 망원경을 부숴버린 영조에 대해 모두 잘한 일이라며 찬탄했다.

개인이 천문도를 마음대로 소지할 수 없어

우리나라에서는 예로부터 태양이 제왕을 상징한다고 믿어왔다. 따라서 망원경으로 태양을 세밀하게 관측하는 것은 정말 영조의 말처럼 임금을 염탐하는 행위나 다름없었다. 태양뿐만 아니라 별자리의 위치를 그린 천문도 자체도 조선에서는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물건이었다.

17세기 초 서양 천문도가 들어오기 전에 조선의 유일한 천문도였던 ‘천상열차분야지도’만 해도 개인이 사사로이 탁본을 떠서 소유하거나 제작하는 것 자체가 법으로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다. 만약 이를 어길 경우 큰 처벌을 받아야 했다.

지금 전해지는 천상열차분야지도의 대부분은 국가적으로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 왕의 명에 의해 공식적으로 탁본을 떠 고위관료에게 배포한 것들이다.

망원경이 조선에서 별로 쓸모없는 물건 취급을 받게 된 또 다른 이유 중 하나는 천문에 대한 동서양의 해석의 차이에 있었다. 조선시대 천문학의 주류는 천체들의 위치를 측정하고 계산하는 위치천문학이었다.

조선의 천문관원들은 눈을 감고도 별자리를 외울 만큼 숙지하고 있었고, 별자리에서 어떤 변화가 있어나는지에 대해 매우 민감했다. 만약 혜성 같은 뜻밖의 별이 나타날 경우 그에 대응하는 인간 사회의 변화를 예고하는 징조로 천문의 변화가 이용되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궁녀를 상징하는 별이 밝게 빛나면 궁녀 중에 임금의 총애를 받는 이가 나타난다는 뜻이고, 임금의 잠자리를 의미하는 별자리에 혜성이 침범하면 나쁜 무리가 임금을 해할 위험이 있다고 해석했다.

즉, 조선에서 ‘천문을 안다’는 것은 별자리들을 모두 꿰고 외올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이지 망원경을 거기에 갖다 대고 별들의 구체적인 모양이나 현상의 물리적 원인을 탐구할 필요는 없었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조선의 천문학에서 망원경은 있으면 좋기는 하되, 그들이 천문학을 하는 데 있어서 꼭 필요한 물건은 아니었던 셈이다.

동양사상의 밑바탕을 이루고 있는 ‘음양오행설’은 우리가 가장 자주 대하는 천체들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음양은 달과 해를 가리키며, 다섯 개의 움직이는 별인 오행은 수성과 금성, 화성, 목성, 토성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망원경의 등장 이후 오행 외에도 행성이 3개나 더 발견되었다. 천왕성과 해왕성을 비롯해 지금은 행성의 자격을 박탈당한 명왕성이 그것이다. 그런데 묘하게도 이 행성들의 이름에는 모두 ‘왕(王)’자가 들어가 있다. 왜 그럴까?

그것은 서양에서 붙여진 명칭을 그대로 옮겨왔기 때문이다. 천왕성(天王星)은 우라노스(Uranus, 하늘의 신), 해왕성(海王星)은 넵튠(Neptune, 바다의 신), 명왕성(冥王星)은 플루토(Pluto, 지옥의 신)의 직역이다.

망원경의 등장 이후 천문학의 주도권을 서양에서 쥐게 된 흔적이 이 3개 행성들의 이름에 그대로 남아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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