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ptember 26,2018

역사상 유명했던 과학자의 아내들

과학기술 넘나들기(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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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상 유명 과학자의 아내들이 일률적으로 어떠한 사람들이었다고 단언하기는 매우 힘들 것이다. 예로부터 과학자들의 신분이나 지위 등이 여러 부류로 나누었듯이, 저명 과학자의 아내들 또한 평범한 주부에서부터 뛰어난 과학자에 이르기까지 상당히 다양하다.

‘과학자의 아내’이면서 자신 또한 유능한 과학자였던 경우로는 너무도 유명한 퀴리부인, 즉 마리 퀴리(Marie Curie; 1867-1934)와 그의 큰딸 이렌 퀴리(Irene Joliot-Curie; 1897-1956)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단순한 과학자 남편의 조력자에 머물지 않고, 대등한 위치에서 연구에 몰두하여 훌륭한 업적들을 남겼다.

그러나 이들도 남편의 도움과 배려가 없었더라면 탁월한 과학자로 성장하기는 매우 힘들었을 것이다. 역사상 귀감이 될 만한 과학자 부부는 예외적이라고 할 정도로 지극히 드물다. 남편 못지않게 과학에 재능이 있었던 수많은 여성들이 제대로 뜻을 펴지 못한 채 남편의 뒷바라지에 파묻히거나, 기껏해야 조력자 정도의 위치에 머물렀던 경우가 대부분이다.

아인슈타인과 함께 한 밀레바 마리치1912년. ⓒ free photo

아인슈타인과 함께 한 밀레바 마리치1912년. ⓒ free photo

퀴리모녀와는 달리 ‘나쁜 남편’을 만난 탓에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던 대표적인 여성과학자를 꼽자면,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1879-1955)의 첫 번째 부인이었던 밀레바 마리치(Mileva Maric; 1875-1948)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무명의 특허청 하급관리였던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이론 등으로 일약 물리학계의 세계적인 슈퍼스타로 떠오른 데에는, 그녀의 수학적인 뒷받침과 도움이 상당한 힘이 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주요 논문들을 부부공동 명의로 발표하지 않았기 때문에, 밀레바는 자신의 능력과 업적을 인정받을 기회가 없었다. 더구나 심신이 병약한 둘째 아들이 태어난 이후로 남편의 연구에 별로 힘이 되지 못했던 그녀는 아인슈타인과 잦은 불화 끝에 이혼하였고, 차츰 세인의 기억으로부터 잊힌 채 1948년에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

탁월한 능력에도 불구하고 ‘과학자의 아내’ 지위에 머물러야 했던 또 하나의 여성과학자로는 독일의 천문학자 마리아 빙켈만(Maria Winkelmann; 1670-1720)이 있다. 17세기 무렵 독일의 천문학계에는 상당수의 여성천문학자들도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에는 대학과 개별 천문대를 중심으로 천문학의 진전이 이루어졌으나, 여성천문학자들에게 공식적인 학교교육을 받을 기회는 없었다. 빙켈만은 어려서부터 아버지와 삼촌, 이웃의 천문학자에게 천체관측 훈련을 받았으나, 여성이었기 때문에 대학에 갈 수가 없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그녀는 어릴 적부터 지녀왔던 천문학자로서의 꿈을 성취하기 위하여, 무려 30년 연상인 천문학자 고트프리트 키르히(Gottfried Kirch; 1639-1710)와 결혼하여 그의 조수가 되는 길을 택하였다.

마리아 빙켈만의 남편이었던 천문학자 코트프리트 키르히. ⓒ Free photo

마리아 빙켈만의 남편이었던 천문학자 코트프리트 키르히. ⓒ Free photo

남편을 도와 천체관측에 몰두하던 그녀는 1702년 새로운 혜성을 발견하였으나, 발견자는 그녀가 아닌 남편의 이름으로 보고되었다. 그리고 1710년 남편이 죽은 후, 그녀는 남편의 뒤를 이어 베를린 아카데미의 보조 천문학자로라도 일할 수 있게 해달라고 청원했으나 거절당하였다. 당시 베를린 아카데미의 주요 수입원 중의 하나가 달력을 만드는 일이었고, 달력제작에 관한 그녀의 탁월한 능력을 잘 알려져 있었으나, 아카데미는 끝내 여성 천문학자에게 문호를 개방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는 후에 아들이 베를린 아카데미에서 천문학자로 일하게 되자 다시 아들의 조수로서 천문학에 종사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으나, 아카데미회원들의 노골적인 적대감과 냉대로 인하여 결국 천문대를 떠나야 했다. 빙켈만 역시 많은 다른 여성과학자들과 마찬가지로 능력을 제대로 꽃피워보지 못한 채 두터운 시대적 장벽에 막혀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갔던 것이다.

과학자의 아내들 중에서 그나마 인정을 받는 인물들은 ‘남편의 훌륭한 조력자’로서 평가를 받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 중에서도 프랑스의 대화학자 라부와지에(Antoine Laurent de Lavoisier; 1743-1794)의 아내 폴즈(Marie Anne Paulze; 1758-1836)가 대표적이다.

남편인 라부와지에와 함께 한 폴즈. ⓒ Free photo

남편인 라부와지에와 함께 한 폴즈. ⓒ Free photo

 

1758년에 프랑스에서 부유한 세금징수인조합 간부의 딸로 태어난 폴즈는 불과 14세의 어린 나이로 28세의 라부와지에와 결혼하였다. 라부와지에 역시 부유한 법조인 집안 출신이었고, 라부와지에는 변호사이자 화학자로서 활동하고 있었는데, 둘의 결혼생활은 무척 행복했던 것으로 보인다. 라부와지에가 훗날 프랑스 대혁명 과정에서 단두대에서 처형된 원인이 되었던 세금징수관으로 일하게 된 것도 장인의 역할이 컸을 것이다.

폴즈는 단순히 남편의 뒷바라지로 잘하는 아내로 머물지 않고, 라부와지에의 연구를 열심히 돕는 조력자이자 비서로서의 역할을 훌륭히 하였다. 당시 라부와지에는 외국어를 그다지 잘하지 못했기 때문에, 폴즈가 영어와 라틴어로 된 외국 과학자들의 논문을 번역하여 주었고, 라부와지에의 중요한 실험에도 깊숙이 간여하여 모든 실험결과들을 상세히 기록하기도 하였다. 또한 라부와지에가 체포되어 처형된 후에도 남편이 감옥에서 썼던 미완성의 원고를 편집하여 책으로 발간하였다.

폴즈의 내조에는 또 하나의 중요한 역할이 있었는데, 바로 다른 과학자들이 모여서 토론하고 의견을 교환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해준 것이었다. 그녀는 당시 파리과학아카데미의 정기적인 공식 모임이 끝난 후 ‘뒤풀이’를 위해 파리 무기고 내의 거처에서 여러 과학자들을 접대하였다. 바로 이러한 모임을 통한 다른 과학자들과의 교류는 라부와지에가 연구방향을 설정하고 자신의 이론을 발전시켜 나아가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이러한 ‘살롱의 여주인’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한 사람들은 폴즈뿐 아니라 당시 귀족부인이나 부유층 여성들 중에서 꽤 있었는데, 이는 유럽의 지성사에서 근대과학과 철학의 발전 등 에 상당히 큰 영향을 미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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