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gust 22,2019

쌀의 마음 밀의 마음

일러스트가 있는 과학에세이 (80)

인쇄하기 일러스트가 있는 과학에세이 스크랩
FacebookTwitter

최근 ‘사랑을 노래를 타고’라는 일일드라마가 시청률 30퍼센트에 가까운 인기를 끌며 방영되고 있다. 필자도 종종 보는데, 복잡한 남녀관계와 혈연관계가 얽힌 ‘막장 드라마’가 넘치는 요즘 자극은 덜하지만 시의성이 있다는 생각이다.

중심 스토리는 이렇다. 22년 전 억울하게 사기꾼으로 몰려 형을 살게 된 김윤식은 분을 못 참아 옥중 자살을 하고 친구인 공정남(이정길)에게 딸을 맡긴다. 윤식에게 전 재산을 빌려줬다가 사기 사건으로 다 날린 정남은 억울하다는 친구의 말을 믿고 맡은 딸 공들임(다솜)을 키운다.

한편 진짜 사기꾼인 윤석태(강인덕)는 돈을 챙겨 미국으로 건너가 사업을 벌여 성공한다. 그런데 당시 재판에서 피고는 윤석태를 증인으로 요청했지만 판사가 기각을 해 진실을 밝힐 기회를 놓쳤는데, 판사 박범진(선우재덕)이 바로 윤석태의 매제다.

박범진의 아들 현우(백성현)는 뮤지컬배우를 꿈꾸다 아버지의 고집으로 변호사가 돼 공정남의 큰 딸 수임(황선희)과 함께 변호사사무실을 차렸다. 우연한 계기로 현우와 들임이 연인이 되면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즉 공정남이 투자 차 한국에 온 윤석태를 마주치면서 수임이 본격적으로 아버지의 친구, 즉 들임 친아버지의 누명을 벗기는 조사에 들어간다.

갈등하던 현우는 직접 미국에 가 외삼촌의 사기 증거를 갖고 오고 외삼촌 회사 내부 고발자가 보내온 자료를 수임에게 넘겨 윤석태가 검찰에 기소된다. 현재 22년 전 사기의 진실이 밝혀지기 직전이다.

필자가 다소 장황하게 일일드라마 스토리를 소개하는 건, 나와는 딴 세상 일 같은 다른 드라마와는 달리 주인공인 현우가 겪는 갈등이 남의 이야기 같지 않아서이다. 법정 분쟁이 벌어졌을 때 내 가까운 사람이 잘못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난 어떻게 해야 할까. 판사를 하며 ‘한 점 부끄러움이 없었다’는 박범진은 22년 전 판결도 증거에 입각한 거라고 강변한다. 그러면서 당시 처남이 자신을 속인 정황이 속속 들어남에도 애써 외면한다.

사실 오늘날 우리나라는 위와 같은 상황이 만연해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제 식구 감싸기, 전관예우 등 관련된 ‘숙어’도 꽤 된다. 최근 여러 문제가 한꺼번에 터지면서 경제만 선진국이지 시스템은 후진국을 면하지 못하고 있다는 자성의 목소리도 높다. 그런데 최근 학술지 ‘사이언스’에 독특한 관점에서 이런 현상의 일면을 설명할 수도 있는 연구결과가 발표됐다.

당근과 개 가운데 토끼와 가까운 것은?

미국 버지니아대 심리학과 박사과정학생인 토머스 탈헬름과 동료 연구자들은 서구인과 동아시아인 사이에 나타나는 심리적, 문화적 차이를 설명할 수 있는 새로운 가설을 제안했다. 소위 ‘벼농사 이론(rice theory)’으로 불리는 이 가설에 따르면 동아시아인들이 관계지향적이고 통합적 사고를 하는 이유가 벼농사를 지었기 때문이다.

반면 개인주의이고 분석적 사고를 하는 서구인은 밀농사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말도 안 되는 얘기 같다. 서구인과 동아시아인의 이런 차이는 다른 원인으로도 얼마든지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구자들은 기발한 상황을 설정해 이를 ‘증명’했다.

벼와 밀의 상대적인 재배비율로 본 중국. 양쯔강을 기준으로 위쪽은 밀농사를 많이 짓고(녹색이 짙을수록 밀농사 비율이 높다), 아래쪽은 벼농사를 많이 짓는다(녹색이 옅을수록 벼농사 비율이 높다. ⓒ 사이언스

벼와 밀의 상대적인 재배비율로 본 중국. 양쯔강을 기준으로 위쪽은 밀농사를 많이 짓고(녹색이 짙을수록 밀농사 비율이 높다), 아래쪽은 벼농사를 많이 짓는다(녹색이 옅을수록 벼농사 비율이 높다. ⓒ 사이언스

즉 동아시아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중국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벼농사가 우세한 지역이 있고 밀농사가 우세한 지역이 있다. 즉 양쯔강을 경계로 해서 남쪽은 벼농사 위주이고 북쪽은 밀농사 위주다. 따라서 같은 중국인들에서 벼농사권과 밀농사권의 사람들의 심리차이가 동아시아인과 서구인의 심리차이와 같은 패턴을 보인다면 작물이 사람의 마음에 영향을 미쳤다는 가설이 설득력을 얻는다. 연구자들은 여러 항목을 측정한 결과 ‘그렇다’는 결론을 얻었다.

먼저 분석적 사고 경향을 조사하는 ‘세 항목 과제(triad task)’를 실시했다. 즉 제시된 세 항목 가운데 두 항목을 묶는 과제인데, 예를 들어 토끼와 개, 당근이 있다. 분석적인 사고에 익숙한 서구인들은 대체로 토끼와 개를 묶는다. 둘 다 동물이라는 범주에 속하기 때문이다.

반면 전체적인 사고를 하는 동아시아인들은 토끼와 당근을 묶는다. 토끼가 당근을 먹기 때문이다. 그런데 중국인을 대상으로 세 항목 과제를 실시하자 정말 벼농사권 출신은 토끼와 당근을, 밀농사권 출신은 토끼와 개를 묶는 경향이 컸다.

‘세 항목 과제’(왼쪽)로 분석적 사고 성향을 테스트할 수 있다. 즉 분석적 사고 성향이 높으면 토끼를 개와 묶지만 전체적 사고 성향이 높으면 당근과 묶는다. 조사결과 벼농사권에서는 후자가 높았다. 한편 나와 친구의 관계도를 그려보라는 과제로 개인주의 성향을 테스트할 수 있다(오른쪽). 즉 개인주의 성향이 클수록 나(Me)를 크게 그린다. 반면 집단적인 성향이 클수록 차이가 없다. 조사결과 벼농사권에서는 후자가 높았다. ⓒ 사이언스

‘세 항목 과제’(왼쪽)로 분석적 사고 성향을 테스트할 수 있다. 즉 분석적 사고 성향이 높으면 토끼를 개와 묶지만 전체적 사고 성향이 높으면 당근과 묶는다. 조사결과 벼농사권에서는 후자가 높았다. 한편 나와 친구의 관계도를 그려보라는 과제로 개인주의 성향을 테스트할 수 있다(오른쪽). 즉 개인주의 성향이 클수록 나(Me)를 크게 그린다. 반면 집단적인 성향이 클수록 차이가 없다. 조사결과 벼농사권에서는 후자가 높았다. ⓒ 사이언스

다음으로 개인주의 성향을 알아보는 인물 관계도 테스트다. 즉 나를 포함해 친구 몇 명의 관계를 그려보라고 하면 개인주의가 만연한 미국인들은 자신을 나타내는 동그라미를 6밀리미터 정도 더 크게 그린다. 유럽인들도 3.5밀리미터 정도 자신을 더 크게 그린다. 반면 집단주의가 강한 일본인들은 오히려 자신을 약간 더 작게 그린다. 그런데 중국인에게 이 테스트를 한 결과 벼농사권은 자신을 0.03밀리미터 작게 그린 반면 밀농사권은 1.5밀리미터 크게 그렸다.

끝으로 충성도와 족벌주의를 알아보는 테스트를 했다. 즉 친구와 모르는 사람이 부당한 일을 했을 때 어떻게 할 것이냐는 상황이었는데, 모르는 사람일 경우는 벼농사권이나 밀농사권 모두 처벌 정도가 비슷했다. 그러나 친구일 경우 벼농사권은 밀농사권에 비해 처벌 정도가 훨씬 약했다. 과거 동아시아인과 서구인을 대상으로 한 결과와 같은 패턴이다 .

결국 동아시아인과 서구인 사이에서 보이는 심리적 차이의 상당부분은 어떤 작물을 재배했느냐로 설명할 수 있다는 얘기다. 그런데 밥을 먹건 빵을 먹건 어차피 탄수화물인데 이게 어떤 경로로 마음에 영향을 줄 수 있었을까.

혼자서는 할 수 없는 벼농사

물론 뭘 먹었느냐가 영향을 준 것은 아니다. 핵심은 농사짓는 방법의 차이다. 즉 벼농사는 물이 많이 필요하기 때문에 대규모 관개시설이 필요하고 농사를 지을 때도 이웃 간에 물을 잘 나눠 써야 한다. 또 피를 뽑는 작업 등 밀농사에 비해 두 배 이상 손이 많이 간다. 결국 벼농사는 개인(부부) 차원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그 결과 벼농사권에서는 상부상조하는 관습이 이어져왔고 ‘나보다는 우리’를 앞에 둘 수밖에 없었다.

반면 밀농사는 자연 강우에만 의존하면 되고 일이 고되기는 해도 나 혼자 힘으로 내가 먹을 걸 얻는 데 큰 어려움이 없기 때문에 농사의 독립성이 컸고 그만큼 다른 사람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됐다는 것. 이런 생활패턴이 수천 년 이어져오면서 동아시아인과 서구인의 사고방식에 근본적인 차이가 생겼고, 동아시아인 가운데서도 특히 논농사가 압도적인 한국인(남한)과 일본인에서 전형적인 동아시아적 사고 패턴이 보이다고. 따라서 이 두 나라는 경제가 서구권과 어깨를 나란히 하지만 몇몇 측면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후진적인(서구적인 관점에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물론 쌀의 마음이 밀의 마음보다 무조건 못하다는 건 아니다. 개인주의가 만연한 서구에서는 노인 소외가 심하고(이런 나라에서는 동아시아의 노인공경을 부러워하기도 한다) 이혼율도 높다. 물론 이혼율은 사회가 현대화하면서 문화권에 상관없이 늘고 있지만 두 문화권의 상대적인 차이는 유지되고 있다(이 점에서는 우리나라가 예외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이 연구결과를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운 건 요즘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즉 우리의 주식이 쌀인 건 맞지만 우리 대부분은 벼농사를 짓기 않고 직업상으로는 서구인들과 별 차이가 없는 구조에 있기 때문이다. 연구자들은 이에 대해서 지난 수천 년에 걸쳐 이어져 온 문화가 우리 마음속에 뿌리 깊게 내재돼 있어 사회 구조가 바뀌었음에도 큰 영향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밥을 줄이고 빵을 많이 먹는다고 우리의 심리가 바뀌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연구자들은 논문에서 “일본과 한국의 벼농사 전통은 왜 이 두 나라가 비슷하게 잘 사는 다른 나라들에 비해 개인주의가 훨씬 덜한지를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불과 두 세대만에 전쟁의 폐허에 시름하던 농업국가에서 눈부신 IT선진국으로 겉모습은 변신한 우리이지만 마음은 여전히 벼농사 사회에서 최적화된 상태에 머물러 있다는 말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쌀의 마음’보다 ‘밀의 마음’이 현대사회에 더 어울리는 것 같아 뒤끝이 씁쓸하다.

의견달기(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