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cember 13,2018

생물학적 제약에서 자유로워지려면

후쿠오카 신이치 교수의 ‘동적평형’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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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치 교수에게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생명을 정의하는 ‘동적평형’이라는 개념만이 아니다. 이미 살펴보았듯이 이런 과학자 출신의 문필가가 등장한다는 사실로부터 우리는 일본 기초과학의 저력을 느낄 수 있다. 그의 책이 60만권이 넘게 팔렸다는 사실은 과학의 문화적 속성이 살아 있는 일본과 대한민국을 철저히 해부할 수 있게 한다.

그 뿐만이 아니다. 신이치 교수는 현장에서 일하는 과학자로서 기초과학에 대한 사회와 언론의 무지를 지적하고, 생물학이라는 학문을 통한 철학적 성찰까지를 보여주고 있다.

기초과학은 보험이자 복권이다

<동적평형>의 서문은 신이치 교수의 이전 보스가 그에게 했던 말로 시작한다. “월급만으로는 부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저자는 당시 바이오벤처의 붐을 타고 생명공학회사를 차렸다가 망한 교수의 일화를 자세히 기술하고 있다. 그리고 기초과학의 현장에서 일하는 연구자들이 생각하는 현실과, 기초과학을 장미빛 환상으로만 생각하는 행정가 및 투자자, 그리고 대중의 시각이 대비된다.

“우리의 연구는 지극히 기초 연구에 해당한다. 기초 연구란 한마디로 ‘자연은 이런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라는 서술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직접적으로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거나 상품이 되지는 않는다.”

생물학 연구에 종사하는 많은 학자들은 신이치 교수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 아무리 암세포를 연구한다고 해도 그것으로 바로 획기적인 암치료제가 등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론은 언제나 암세포에 관한 기초연구를 ‘획기적인 암세포 치료제 마련에 전기를 마련’이라는 식으로 포장한다. 그렇게 생물학에 대한 광신이 쌓여간다. 하지만 기초과학은 보험이다. 그 보험은 나에게 불상사가 나지 않는다면 돌려받지 못할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기초과학에 투자는 복권이기도 하다. 확률은 지극히 낮지만 운이 좋고 꾸준히 투자만 한다면 엄청난 행운을 누릴 수도 있다.

어느 과학자는 줄기세포가 인류를 구원할 것처럼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지만, 동적평형이라는 틀로 생명을 바라보면 이러한 기대가 지나치게 섣부른 것임을 알 수 있다.

“유전자 조작 기술은 기대했던 것 만큼 농산물 증가에 기여하지 못했고, 장기 이식술은 아직 결정적으로 유효하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생명 연장을 위한 의료에 도움이 되지는 못하고 있다. 만능세포의 분화 메커니즘은 아직 밝혀내지 않았고 증식을 억제하지 못하는 상황이며, 기적적으로 만들어낸 복제양 돌리도 얼마 살지 못했다.”

지나치게 비관적인 이야기로만 들리는가? 그렇다고 미래를 낙관하지 말라는 뜻은 아니다. 동적평형이라는 신비로 둘러 쌓인 생명의 비밀을 하나하나 파헤쳐온 과학자들은 오늘도 그 신비를 파헤쳐 언젠가는 우리에게 도움이 될 연구를 하고 있다. 과학이라면 지나치게 낙관적이고 광적으로 생각하는 우리에게 신이치 교수의 따끔한 지적은 도움이 될 것이다.

“왜 바이오 기술의 길은 험난한 것일까? 오늘도 내일도 미디어에는 ‘획기적인’ 신개발이나 새로운 발명이 보도된다. 질병유발 유전자의 발견, 첨단 재생의료 기술, 만능세포….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뉴스이며 대부분 얼마 지나지 않아 퇴색되면서 다른 뉴스에 의해 잊힌다. 왜 그럴까? 그 이유는 단적으로 말하면 바이오, 즉 생명현상은 원래 테크놀로지, 즉 기술의 대상이 되기에는 부적합한 테마이기 때문이다. 공학적인 조작, 산업상의 규격, 효율적인 재현성. 생명은 이런 것과는 동떨어진 곳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잠시 에른스트 피셔의 말을 빌어보도록 하자. 신이치 교수가 기초과학을 연구하는 현장의 목소리를 이렇게 열심히 들려주었어도 또 내일이면 언론은 과학의 성과를 과대 포장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이 글을 읽은 독자들이라도 더 이상 그런 언론의 사탕발림에 넘어가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계몽된 사람들이 확신하는 것 가운데 하나는 미디어가 진실을 경험할 가능성을 높여준다는 전제이다. 그러나 진실은 흔히 정반대다. 미디어 덕분에 오래된 오류가 자꾸 반복되어 결국 우리가 그 오류를 내면화할 때 그러하다.”

다시 일본으로: 일본통신사?

분자생물학 분야엔 신이치 교수 같은 문필가가 드물다. 이런 문필가가 일본에 혜성같이 등장해서 과학교양서를 60만부나 팔리게 한 비결은 무엇인지 궁금해질 것이다.

결론은 간단하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은 거의 150년간이나 과학에 투자해 온 것이다. 그 저력이 노벨상으로, 신이치와 같은 문필가의 등장으로 야마모토 요시타카와 같은 과학자의 엄청난 저술들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과학에 대한 투자는 보험이고 복권이다. 한 국가가 철학을 가지고 중장기적으로 과학에 투자했을 때, 과학자라는 집단에도 다양성이 생기게 되고, 거기서 신이치 교수 같은 아름다운 문필가 혹은 요시타카 교수 같은 엄청난 과학철학자도 탄생할 수 있는 것이다.

신이치 교수의 책을 읽은 독자들은 조금 어렵고 난해하더라도 요시타카 교수의 번역서 두 권, <과학의 탄생>과 <16세기 문화혁명>을 일독할 것을 권한다 . 우리가 그토록 증오하는 일본이라는 국가가 가진 과학의 수준이 얼마나 높으며 또 우리와는 질적/양적으로 얼마나 다른지 새삼 깨닫게 될 것이다.

일본의 천 엔짜리 지폐를 장식하고 있는 인물은 기초의학자인 히데요 노구치다. 비록 노구치의 연구들이 상당 부분 조작되어 있고 그의 업적은 재평가 받아야 한다고 하지만, 지폐에 기초의학자, 즉 과학자의 얼굴이 새겨진 국가와 그렇지 않은 국가의 과학은 다른 것이다 . ‘각기균’파와 ‘영양소’파로 갈려 일본 과학자들이 논쟁을 거듭하고 있던 때가 이미 19세기말, 20세기 초엽이었다 . 1971년에야 카이스트가 설립되고 그마저도 경제부흥이라는 목적으로 과학이 추구되었던 국가와는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신이치 교수는 훌륭한 문필가이자, 과학자로서 자신의 경험을 철학적 통찰로 녹여내는 훌륭한 작가다. 하지만 동적평형이라는 용어의 기원에 대한 오해를 비롯해서, 동적평형을 강조하기 위해 기계론의 출발점이 데카르트를 공격하는 부분은 그의 과학사에 대한 무지를 드러낸다 .

혈액순환을 배경으로 하비와 데카르트의 논쟁을 살펴보면, 데카르트에게서 아리스토텔레스주의적인 생기론의 원형을 살펴볼 수도 있다 . 비록 기계론이라는 단어로 이해되는 데카르트이지만 과학사에서 그의 위치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과학사에 대한 무지는 페니실린을 발견했다고 잘못 알려진 플레밍을 다룰 때에도 드러나는데 실제로 플레밍은 페니실린을 발견한 인물이 아니다 . 궁금한 독자가 있다면 에른스트 피셔의 <과학을 배반하는 과학>을 참고하면 된다.

데카르트의 기계론을 부정하고 동적평형으로 생명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는 것이 지나치면 생물학자들이 이미 포기한 생기론(vitalism)의 위협에 다시 노출될 수도 있다. 실제로 신이치 교수는 조금 위험한 줄타기를 하는데 신비주의자로 잘 알려진 라이얼 왓슨을 책의 후반부에 등장시키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동적평형>을 읽고 더 많은 공부를 원하는 독자들은 절대 라이얼 왓슨의 <생명조류>등의 책을 구입하지 않기를 바란다. 기계론과 생기론의 차이는 종잇장처럼 얇다. 과학자가 과학을 과용하게 되는 것도 그만큼 쉽다. 일리야 프리고진의 말처럼 과학이란 ‘좁은 길’인 것이다.

생물학적 제약으로부터의 자유

자기복제하는 시스템에서 동적평형으로의 관점이동을 다루면서, 일리야 프리고진의 소산구조에 대한 연구나, 통계물리학에서 시작해서 생명체 연구로 넘어온 복잡계 연구를 개괄하지 않은 것은 아쉬운 대목이다. 자신이 연구하는 학문을 토대로 철학을 구성하는 것이야 “자신의 작업을 반성적으로 사유하는 사람이 곧 철학자”라는 필자의 신념과도 맞아떨어지는 것이지만, 그러한 사유는 반드시 자신이 서 있는 학문의 전통을 세밀히 살펴보는 일에서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신이치 교수처럼 과학을 대중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이들이 과학사를 공부해야 하는 이유다.

“이런 이유 때문에 자연과학이, 이른바 과학자들만의 것이며, 또한 철학이, 이른바 철학자들만의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자기 자신이 해 온 작업의 원리들을 전혀 반성해 보지 않은 사람은 그것에 대해 성숙한 태도를 가질 수가 없다. 자기 자신의 과학을 한 번도 철학적으로 성찰해 보지 않은 과학자는 삼류 과학자, 엉터리 과학자, 또는 애송이 과학자에 지나지 않는다. 한편, 어떤 경험도 해 보지 못한 사람은 그런 경험에 대한 반성을 할 수가 없다. 자연과학을 전혀 공부해 보지 않았거나 또는 자연과학 분야에서 일한 경험이 전혀 없는 철학자가 자연과학에 대해 철학적으로 성찰할 때, 대체로 자신의 우둔함을 드러내 보이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19세기 이전의 탁월하면서도 저명한 과학자들의 저술에서 드러나듯이, 그들은 항상 “어느 정도”는 자신들의 과학에 대해 철학적인 사고를 했다. (중략) 자연과학자들과 철학자들을 서로 상대방의 분야에 대해 거의 모르고, 또한 전혀 공감하지도 않는 두 분류의 전문직업인들로 분리하는 풍조가 생긴 것은 19세기 초반이었다. 그것은 양쪽 모두에게 피해를 준 바람직하지 않은 풍조였다.(중략) 그 둘을 연결하는 교량을 건설하려는 작업은 계속 진행되어야만 한다.”

신이치 교수는 <프리온설은 사실일까?>라는 저서로 고단사 과학출판상을 수상했다고 한다. 그 이후에 <소고기 안심하고 먹어도 되나?>라는 책도 출판했다고 하는데 광우병 파동 당시 <동적평형>이 번역되어 있었더라면 어땠을까라는 아쉬움을 갖게 된다. 이미 저자의 책 세 권이 번역되었으므로 저자의 초기저술들도 번역할 수 있기를 바라 마지 않는다. 프리온과 광우병에 대한 신이치 교수의 언급은 <동적평형>의 6장에서도 잠시 만나볼 수 있다.

신이치 교수는 초파리의 행동유전학을 정초한 시모어 벤저처럼 선천적인 야행성 이었다고 하는데 역시 야행성인 필자는 묘한 동질감을 느낄 수 있어 좋았다. 마지막으로 저자가 한 고등학교에서 ‘왜 배워야 하는가’라는 주제로 했던 강연의 일부를 소개하며 긴 글을 마치려고 한다. 학교가 아니라 “사회에서 직접적인 경험을 하는 것이 훨씬 더 유익한 것은 아닐까”라는 질문에 대한 신이치 교수의 답변이다.

“아니, 그건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나도 예전에 고등학교 생일 때 이 문제에 대해 여러분처럼 심각하게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에야 비로소 이런 말을 할 수 있게 되더군요. “우리가 배우는 이유는 우리를 규정하는 생물학적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다”라고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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