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bruary 21,2019

뿌리깊은 한국 과학소설의 굴욕사

일제 치하 과학소설의 황폐화를 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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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SF를 찾아서 번안소설 붐은 1930년대에도 계속되었다. 민태원이 번안한 ‘오색의 꼬리별(1930년)’은 매일신보에 1930년 10월부터 1933년 3월까지 378회에 걸쳐 연재되었으나 완역되지는 못하였다. 원작이 무엇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김동진이 옮긴 ‘세계대전: 비행전쟁(1934년; 덕흥서림 간행)’은 비록 소설 형식을 취했으나 1차 세계대전부터 당시까지의 육상전과 비행전 그리고 화생방전의 급속한 발달 현황을 둘러본 군사지식백과에 가깝다는 점에서, 멀리는 19세기 말 유럽에서 그리고 가까이는 20세기 초 일본에서 인기를 끈 미래전쟁담과 비견된다.

당시 유럽에서는 크고 작은 전쟁들이 끊이질 않는 가운데 작가들은 다음 세기에 도래할 훨씬 더 참혹한 대규모 세계대전의 불길한 조짐을 그려냈다. 이중 가장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영국 작가 조지 T. 체스니(George T. Chesney)의 ‘도킹 전투 The Battle of Dorking(1871년)’는 독일의 침공을 영국이 격퇴하는 내용으로 1914년 실제로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까지 일어날 법한 미래전쟁에 관한 이야기 형식을 확립시켜 주었다.

일본에서는 메이지 유신 시절부터 1940년대까지 국력이 해외로 꾸준히 신장되면서 제국주의 담론과 팽창 이데올로기를 첨단무기를 동원한 가상 전쟁소설과 접목시키려는 시도가 유행했으니1 일본 과학소설의 시조로 불리는 오시가와 순로(押川春浪; 1876~1914)와 운노 주자(海野十三; 1897~1949)가 대표적이다.

예컨대 러일전쟁 발발 4년 전 출간된 오시가와 순로의 ‘해도모험기담 해저군함(海島冒険奇譚 海底軍艦; 1900년)’은 일본이 장갑을 덧댄 무장 잠수함으로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하는 가상의 전쟁담이고2, 제2차 세계대전(1939~1945)을 6년 앞두고 발표된 운노 주자의 ‘태평양 뇌격 전대(太平洋雷撃戦隊; 1933년)’는 일본의 잠수함 함대가 하와이 동쪽 2천km 바다에서 하와이로 오는 유럽의 무역선단을 격파하는 이야기다. 둘 다 20세기 초 팽창일로에 있던 일본제국주의의 야심을 여과 없이 드러낸 군사모험 과학소설들로 여기서 최신성능의 과학기기는 주인공들의 영웅적인 행위를 극대화시켜주는 눈요기거리로 등장한다.

제국주의 관심 얻은 미래전쟁담의 득세

이러한 미래전쟁담은 과학소설이 더 이상 장밋빛 유토피아를 치장하는 대신 오히려 과학기술의 발달과 맞물려 갈수록 무시무시해지는 전쟁의 성격을 조망하는 데 관심을 쏟게 되었음을 시사하며, 특히 일본의 경우에는 제국주의를 표방하는 정부방침에 적극 동조한 인기 작가들이 해외열강들과의 경쟁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며 영웅적인 전공을 세우는 일본군과 지도층의 활약상에 초점을 맞추었다.

김동진의 ‘비행전쟁’ 같은 경우에는 영국 작가 조지 그리피스(George Griffith; 1857~1906)의 ‘혁명의 천사(The Angel of the Revolution; 1892년)’에서처럼 전쟁의 새로운 패러다임인 항공기 전쟁에 주목했다. (반면 일본의 군국주의 과학소설들은 주로 첨단 잠수함과 초거대 항공모함 같은 해전에 주목했다.)

양자 간에 차이가 있다면 수십 년에 걸친 기술발달의 시차로 인해 비행선이 비행기로 바뀌었을 뿐이다. 일례로 ‘비행전쟁’에서는 비행기 전용 기관총과 격납고, 비행장 등 비행기를 동원하는 전쟁에 뒤따르는 부속수단들을 열거하면서 해상 비행장으로서 항공모함의 역할까지 강조했다. 현대첨단장비를 소재로 한 국내 최초의 본격 전쟁소설이라 할 수 있는 이 작품은 일제가 만주사변을 일으켜 조선에도 방공연습(防空演習)이 본격화되던 시절 식민지 조선인들에게 첨단군사무기의 변화상을 선보임으로서 세상의 미래가 어찌될지에 대한 눈을 뜨게 해주었다.

이 시기 실제로 출간된 과학소설은 지금까지 소개한 것들보다 더 많을 수 있다. 1920년대에서 1930년대 사이 신소설은 매년 종류를 불문하고 도합 수만 권 이상씩 팔려나갔다고 한다3. 아직 문맹률이 높던 시대였음에도 염가(廉價)에다 통속적인 내용을 담은 신소설의 등장은 적어도 특정계층만 책을 소유하고 읽던 시대에 종언을 고했다. 따라서 이 무렵에 나온 과학소설 가운데 저급한 상업문학 내지 어린이용 오락거리의 일환이라 치부된 탓에 관심을 받지 못하고 사장된 사례도 더러 있으리라 짐작된다.

과학소설의 진화는 사람들의 관심 밖

우리나라의 과학소설은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조선총독부가 무단정치와 문화정치를 번갈아 가며 이 땅의 문인(文人)들을 억압하고 회유하는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진화할 동인을 찾지 못했다. 그 결과 독자대중의 읽을거리라고는 서구와 일본의 오락물과 신파애정물을 번안하거나 모방한 것들이 주종을 이루었다. 중국과 일본에서 보듯, 과학계몽이 애국계몽 및 부국강병과 동일시될 소지가 높은 과학소설은 일제(日帝)의 관심 밖이었다. 한편 조선 문인들의 과학소설에 대한 낮은 관심은 구한말 개국 이후 과학을 배우려는 지식인들이 국내에 거의 없었던 사정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4.


1900년까지 조선에는 과학자라 부를만한 전문인력이 존재하지 않았다. 이 땅에 근대적 의미의 과학이 자리 잡은 적 없거니와 그러한 불씨를 지피겠다며 외국에서 과학 공부를 해온 지식인도 없던 마당에 갑자기 과학사상이 맨땅에서 튀어나올 리 만무하지 않은가. 당시에만 해도 조정에서 보낸 관비유학생들은 정치권력의 연마와 경력 쌓기에만 치중하였을 뿐 사농공상의 계급체계 하단의 기술자와 과학자가 되겠다는 이는 없었다.

예컨대 신소설로 당대사회를 계몽한답시고 문필활동을 한 이인직의 경우, 일본에 유학한 뒤 얼마 되지 않아 다니던 동경정치학교보다는 신문사에 견습기자로 취직하여 귀국 후 정당인으로서의 행보를 고민하였다.

이렇듯 과학에 대한 관심과 실행이 이뤄지지 않는데 어찌 이 새로운 지식의 가능성과 앞날을 점치며 대중을 고양하는 문학이 씌어질 수 있었겠는가? 안타깝게도 조선은 과학의 싹을 틔워보기도 전에 망국의 길을 걸었고 이후 일제는 식민지에서 과학의 발달을 용납하지 않았다.

대한제국 말기 역점을 두었던 근대식 공장설립과 교통, 통신, 보건의료 시스템, 교육 등의 사회간접자본에 대한 투자는 러일전쟁(1904년)과 을사조약(1905년)으로 일본이 한반도 침략을 본격화하면서 저지되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구한말 조선왕실이 말 뿐인 개혁 이후로 외세에 주도권을 잃어버린 탓에 백성들은 서양과학기술을 도입하여 이루는 근대화가 곧 외세의 침입이라 여기는 경향이 강했다. 이들이 보기에 전신(電信)은 조선정부를 장악하려는 정보전(情報戰)의 일환이고 전기철도(電氣鐵道)는 일본인 또는 미국인의 경제침탈이었다5.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문이 남는다. 중국과 일본에 비해 과학소설이 별로 늦게 소개되지도 않았는데 두 나라에 비해 유독 우리나라에서만 과학소설의 번역 소개 및 창작이 지지부진했던 까닭을 단지 일제 강점기라는 현실의 압박이 작가들을 심적으로 옭아맨 때문이라는 설명 하나만으로 충족시킬 수 있을까? 다음 주에는 이에 대한 논의로 구한말부터 해방 전까지의 과학소설에 대해 총체적인 평가를 해보기로 한다.





1. 김종방, 한국 과학소설의 성립과정 연구, 세종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0년, 초록

2. <해저군함>은 이후 무대를 태평양과 인도양으로 옮겨가며 모두 6권짜리 시리즈물로 불어날 만큼 일본 독자들에게 어찌나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다.

3. 딱지본으로 보는 한글판소설 50선, 국립중앙도서관 디지털 테마 컬렉션
http://collection.nl.go.kr/ddackAction.do?mode=subedit&board_seq=54

4. 20세기 초 조선에 훈련받은 과학자로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미국에서 의대를 졸업한 서재필과 박에스더가 있으나 귀국 후 과학과는 관련없는 사회개혁운동에 더 관심을 두었다.
(자료원: 박성래 외, 우리과학 100년, 현암사, 2000년, 7~34쪽)

5. 실제로 구한말 철도부설은 일본인 중심의 신상권 형성과 맞물린 사안이었고 철도노선 확보를 위한 무리한 토지점거와 인력동원으로 백성들의 생계에 악영향을 주었다.

  • 고장원 SF 평론가·작가, <세계과학소설사> 저자 다른 기사 보기
  • 저작권자 2011.04.11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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