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칼럼

반 고흐가 겪었던 비극의 절정기

[메디시네마 : 의사와 극장에 간다면] 박지욱의 메디시네마(103) 러빙 빈센트

마침내, 영화 <러빙 빈센트>를 보았습니다. 눈시울이 붉어지고 가슴이 뜨거워지는 영화입니다.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의 비극적인 삶은 너무나도 유명하지만, 이 영화는 비극의 정점인 말년의 삶을 다루고 있습니다(스포일러 있습니다).

영화는 1891년, 그러니까 고흐가 죽은 지 1년 후에 ‘아를’에서 시작합니다. 아를의 집배원이었던 룰랭 영감은 아들 아르망에게 고흐의 동생 테오에게 전해지지 못한 고흐의 편지를 전해주라는 부탁을 합니다. 고흐가 죽고 6개월 만에 테오 역시 죽어버렸고, 그 편지는 이제 미망인이 된 테오의 아내에게 전해져야 합니다. 아르망은 소문난 ‘미치광이’ 빈센트 반 고흐를 두둔하는 아버지가 못마땅하지만 마지못해 길을 나섭니다. 그 여정을 통해 미치광이로 죽은 화가의 삶을 새로 발견합니다.

네덜란드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고흐는 헤이그와 파리에서 화랑의 점원으로 일합니다. 하지만 목회자가 되기 위해 일을 그만두었고, 그마저 여의치 않습니다. 마침내 화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27세에 파리에서 그림을 배우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성공하지는 못하고 35세의 나이에 ‘새로운 빛’을 찾아 남 프랑스의 아를로 갑니다(1888년 2월).

아를에서, 풍부한 빛의 세상에서 고흐는 생기 넘치는 그림을 그리는 한편, 존경하는 화가인 고갱을 초청하여 예술가 공동체를 이루는 꿈을 꿉니다. 어렵게 고갱을 아를로 초청한 고흐, 하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아홉 주 만에 파탄이 납니다. 심하게 다툰 두 사람, 화가 난 고갱은 짐을 싸서 집을 나가버립니다. 고흐는 격분하여 자신의 귀를 잘라버렸고, 잘려나간 귀를 마을 주민의 손에 쥐어줍니다. 결코 정상적인 정신 상태가 아니었던 거죠. 온 마을이 발칵 뒤집어집니다. 1888년 성탄 직전의 일이지요.

이 무렵의 빈세트 반 고흐, , 1889년, 개인 소장

이 무렵의 빈세트 반 고흐, <자화상>, 1889년, 개인 소장 ⓒ 위키백과

이듬해 2월에 마을 주민들은 외국인 미치광이와 함께 못살겠으니 정신병원에 강제로 입원시켜달라는 탄원서를 경찰서장에게 제출합니다. 고흐는 정신병원에 강제로 입원합니다(1차 정신병원 입원). 2개월 만에 고흐는 퇴원했지만, 주민들의 들끓는 성화 때문에 경찰 서장이 고흐를 재입원 시킬 기미를 보이자 고흐는 자진하여 생레미 드 프로방스에 있는 생 폴 드 무솔 정신병원에 입원합니다(2차 정신병원 입원. 생 레미의 정신병원 혹은 생 폴 드 무솔 정신병원으로 알려집니다). 1889년 5월입니다.

1 년 후 퇴원했지만, 고흐는 자신에게 반감이 큰 아를로 돌아가지는 못하고 테오의 추천을 받아 파리 근교의 오베르로 갑니다. 오베르에서 그림도 그리고, 우울증을 주로 치료하는 가셰 의사(Paul Ferdinand Gachet; 1828~1909)의 치료도 받기로 한 것이지요.

이 무렵의 빈세트 반 고흐, , 1890년

이 무렵의 빈세트 반 고흐, <자화상>, 1890년 ⓒ 위키백과

오베르의 의사 가셰는 원래 파리에 활동하던 개원의였습니다. 미술을 사랑하고, 그 자신이 아마추어 화가 겸 판화가였기에 파리에서 피사로를 치료한 것을 인연으로 세잔, 모네, 르누아르, 쿠르베, 마네 등의 화가들과 친분을 쌓았습니다.

하지만 아내와 사별하자, 가셰는 우울증이 생겼고, 혼잡한 파리를 벗어나 오베르로 이사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화가들과는 폭넓게 접촉을 했습니다. 화가들은 그의 집을 찾아와 정물화를 풍경화를 초상화를 그렸을 정도였으니까요.

파리에 살던 테오는 화가들의 주치의를 마다 않던 가셰가 형을 잘 치료해줄 것으로 믿고 고흐를 오베르로 보냅니다. 1890년 5월에 두 사람은 만났고, 고흐에겐 생의 마지막을 향한 70일, 오베르 시절이 열립니다.

고흐 역시, 가셰의 집을 스케치하고, 그 가족을 화폭에 담습니다(이 영화는 고흐가 가셰의 딸과 연인 관계로 발전했다고 주장합니다). 6월에는 사흘 만에 <가셰 의사의 초상화>도 그립니다. 영화의 주요 소재가 된 이 초상화를 자세히 살펴볼까요?

빈센트 반 고흐, , 개인 소장.

빈센트 반 고흐, <가셰 의사의 초상>, 개인 소장. ⓒ 위키백과

낡은 해군 모자를 쓰고 푸른 군의관 제복을 입은 예순 하나의 노인 가셰가 정원의 테이블에 몸을 비스듬히 기대 앉아있습니다. 시선은 반대편인 왼편을 바라보는데, 초점을 잃은 힘없는 눈에서 나오는 한없이 우울한 시선입니다. 그리고 얼굴을 턱으로 괴고 비스듬히 기울어진 자세는 전형적인 우울증 자세이지요. 실제로 고흐는 테오에게 보내는 편지 속에서 가셰를 ‘우리시대의 암울한 표정을 지닌 사람’이라고 씁니다.

그림의 전경에는 유리잔 속에, 인물의 기울어짐과 비슷한 각도로 비스듬히 놓인 꽃이 있습니다. 보라색의 꽃망울들이 꽃대를 타고 조롱조롱 달려있는 이 꽃은 폭스글러브(foxglove)로 초여름에 꽃을 피우니 그림이 그려진 유월을 암시하는 장치입니다. 하지만 숨겨진 코드, 빈센트 코드가 하나 더 있습니다.

이 식물의 학명은 디기탈리스(digitali spurpurae)입니다. ‘디기탈리스’는 아주 오래 전부터 약으로 써온 식물입니다. 1775년에 위더링(William Withering; 1741~1799)이 처음으로 이 식물의 추출액을 부종 환자에 사용해서 효과를 확인합니다. 이후로 심장병, 정신병, 경련, 결핵 등의 치료제로 씁니다. 뇌전증(경련) 증상이 의심되었던 고흐도 가셰에게서 디기탈리스 처방을 받았을 가능성이 무척 높겠지요? 그렇게 보면 조롱조롱 매달린 디기탈리스(폭스글러브)는 화가 겸 환자인 고흐와 모델 겸 의사인 가셰의 한 가운데서 두 사람을 이어주는 절묘한 연결고리가 됩니다.

다시 그림으로 되돌아갑니다. 가셰의 오른 손을 자세히 살펴보면 얼굴에 닿은 부분이 손가락의 끝 두 마디인데, 보통 우리가 머리를 괼 때 사용하는 손 자세와 많이 다릅니다. 보통은 손목을 굽혀 손등이나 손바닥으로 괴던지, 아니면 손가락-손의 관절을 꺾어 손가락만으로 머리를 괴는 경우가 흔하지요. 하지만 그림처럼 손목관절은 직각으로 젖힌 상태에서 손과 손가락이 이 만나는 관절(원위부 수지간관절)은 직각으로 굽히고 손가락 끝 두 마디를 사용해 머리 무게를 감당한다면 얼굴에 깊은 패임이 남을 수 밖에 없습니다. 덕분에 오른 족 얼굴의 볼 패임은 상당히 두드러져 우울한 얼굴의 시름은 한층 더 깊어 보입니다. 하지만 모델로서는 무척 힘이 드는 자세가 됩니다. 직접 한번 해보세요.

그래서 반대편인 왼손은 상당히 힘이 들어가 보입니다. 탁자 위에 반쯤 걸쳐진 왼손의 손가락들 마저 책상을 누르는 듯 보일 정도네요. 그리고 왼쪽 팔꿈치도 공중에 들려있는데, 이것은 왼 팔꿈치를 펴서 몸의 균형을 잡으려는 노력이 아니었을까요?

그래서인지 전체적으로 그림을 보는 것도 힘듭니다. 그런 효과를 일부러 노린 걸까요? 모델의 내재적인 우울감에 자세의 불안정성이 시너지 효과를 일으켜 편하지 못한 느낌의 그림이 되도록? 빈센트가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환자인 고흐가 의사인 가세에 대해 느낀 감정을 솔직히 토로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늘 너무 의지해서는 안될 것 같아. 어쩌면 그는 나보다 더 중한 환자인지도 몰라….중략… 장님이 장님을 데리고 길을 가다가는 도랑에 빠질 수 있겠지?…”

가셰 의사 ⓒ 위키백과

가셰 의사 ⓒ 위키백과

7월에는 마지막 작품인 <까마귀가 나는 밀밭>을 완성합니다. 그리고 그 밀밭에서 스스로 권총으로 배를 쏩니다. 하지만 즉사하지 못했고 주치의였던 가셰가 불려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해군 군의관 출신인 이 의사는 고흐의 뱃속에 박힌 총알을 빼내지도 않습니다. 1890년대 상황으로 본다면 그 정도의 처치나 수술은 가능했는데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그러니 가셰가 고흐가 죽도록 내버려두었다는 오해를 살 수 밖에요. 그럼 두 사람은 왜 그렇게 행동한 것일까요?

영화는 병까지 얻은 동생 테오에게 더 이상 짐이 되기 싫어 고흐가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아울러 딸 때문에 갈등을 겪는 가셰가 고흐를 치료하지 않고 방치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아울러 우울증 환자이기도 했던 가셰가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고흐의 선택을 존중하여 죽을 수 있도록 방치했을까요? 아무도 그 답을 알 수는 없겠지요. 그렇게도 많은 편지를 썼던 고흐가, 정작 유언장은 남기지 않았으니 말입니다.

총상 후 이틀이 지난 1890년 7월 29일 고흐의 파란만장한 삶이 끝납니다. 이제 겨우 37세였습니다. 화가 활동 8년 동안 800점의 그림을 남겼고, 죽을 때까지 단 한 점만 팔았다고 합니다. 물론 지금 그가 남긴 그림의 가치는 천문학적 수준입니다. 그 자신도 이리 될 줄은 몰랐겠지요? 하지만 그의 비극적인 삶과 죽음도 그림의 가격을 올리는데 한몫은 했을 것입니다. 여하튼, 이 영화는 고흐가 겪었던 비극의 절정기를 아를과 오베르를 무대로 소상히 보여줍니다.

애니메이션(animation)는 ‘정지된 것이나 죽은 것에 생기를 활기를 주어 움직이게 만드는 것’인데 그 정의에 딱 들어맞는 아름다운 영화 한 편을 이 가을에 만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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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댓글 (1)

  • 김영재 2017년 12월 11일11:42 오후

    세상이 모두 말려도 할 일은 하고, 세상이 모두 떠밀어도 하면 안 되는 일은 하지 않는다 라고 한다. 가끔 내가 이 일을 하는 게 옳은가…하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지금 하는 일이 옳은지 아닌지를 생각해야 될 것인가 말 것인가…그것도 아니고…/

    세상이 뭐라 뭐라 하는 말 중에 그 ‘뭐’가 뭣같이 생각되거나, 아예 묵살하자니 ‘세상이 모두 말려도 할 일’이라는 생각에 글을 쓰는 경우가 있고, 아슬아슬하게 보다간, 허어 트집 잡을 말은 쓰지 않았구만…하고 또 그런 의미에서 글을 쓰는 경우도 있고…/

    반 고흐의 이름을 빈센트라고 불러주는 글을 만난다. 영화의 제목이란다. 영어권 영화겠지. 프랑스 영화라면 뱅생이라 불렀을 테니까…물론 영화가 착실한 고증과 치밀한 논증, 짜임새 있는 구성을 보여주었기 때문이겠지만 서서히 공감이 가도록 글은 진행이 된다/

    약간의 생략된 부분이 있다. 고흐는 표현적인 소용돌이와 같은 터치와 파리 인상파의 밝은 색채, 아를르의 작열하는 태양을 담은 자신의 자화상을 그려 고갱에게 자랑한다. 클로아조네의, 구륵전채를 연상케하는 동양화적 터치로 상징적 화면을 지향하는 고갱과 의견이 맞지 않는다/

    고흐는 이래도 내 그림이 내 귀를 그린 게 아니냐면서 귀를 자른다…조금 더 설득적이지 않아? 물론 화가가 되려면 귀까지 자르고 길거리 여자에게 잘 보관하라면서 주어야 한다면 자녀를 가택연금이라도 시킬 부모가 당연히 고흐를 정신병원에 가두겠지…/

    가세 의사의 초상화는 작품과 모델과 작가의 역동적이고 심층적인 분석과 전개가 가이 압권이다. 디기탈리스의 대목은 글 쓴 사람의 전문적인 소양을 쉬운 문체로 전달하는 내공을 가늠할 수 있게 한다. 애니메이션의 정의로 글을 맺는 솜씨가 깔끔하다/

    글을 쓰다 보니 칭찬이 된다. 아니, 처음 글을 쓰면서 사실은 이 방향으로 구성이 되어 있을 것이다. 글은 그 플로트에 따라서 내 손 끝에서 마무리되고 눈을 통해 확인되고 빅 데이터에 비추어 교열될 것이지만…쉽지 않은 미술이야기를 흠 없이 쓸 수 있는 의사를 만나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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