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ptember 18,2019

남자들이 화성으로 쫓겨난 유토피아?

최초의 본격 SF장편, 문윤성의 ‘완전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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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의 두 번째 중요한 특징은 청소년문학시장에서 과학소설 문고판들의 선전이다. 10년 동안 약 50여종의 과학소설이 번역 출간되었는데1, 대부분 독립된 단행본이 아니라 세계문학전집 내지 아동문학전집류에 포함되었다. 당시 과학소설을 문고판 안에 수용한 출판사들로는 아데네사, 문예출판사, 홍자출판사, 교학사, 양서각, 성문각, 어문각 등이 있다. 개중에는 아데네사의 ‘소년소녀세계과학모험전집(1959년)’처럼 아예 ‘과학소설 전문전집’을 표방하는 경우도 있었다2.

구한말부터 해방 전까지의 과학소설은 성인을 주 독자층으로 염두에 두었다. 하지만 1950년대부터 간간이 나오기 시작한 청소년용 과학소설들은 1960년대에 대다수 아동용문고판의 단골 틈새메뉴가 됨에 따라 향후 출판시장에 두 가지 영향을 미쳤다. 하나는 청소년 시장에서 과학소설 장르의 작품들에 늘 일정지분을 할당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고, 다른 하나는 그로 말미암아 국내에서 과학소설 하면 으레 아동들이나 보는 문학이라 지레짐작하게 만드는 풍조를 조장했다는 점에서 부정적이다. 이러한 추세는 1960년대에서 1990년대까지 줄곧 변하지 않았으며 2000년대 이후에도 청소년 과학소설 시장에서 일정한 비중을 차지한다.

청소년 문학시장에서의 과학소설의 선전

이 시기 처음 소개된 작가들 가운데 과학소설 역사에서 언급할 만한 이들로는 아서 C. 클락(Arthur C. Clarke)과 로벗 앤슨 하인라인(Robert Anson Heinlein), 아이작 아시모프(Isaac Asomov) 등의 빅3, 에드가 라이스 버로우즈(Edgar Rice Burroughs), 라이더 H. 해거드(Rider H. Haggard), 에드먼드 해밀튼(Edmond Hamilton) 등이 있다. 단, 이들의 작품들은 대개 아예 처음부터 청소년용 원작을 번역하거나 어른용이더라도 청소년용으로 번안 개작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예컨대 하인라인의 ‘우주선 갈릴레오 호(Rocketship Galileo)’가 전자의 예라면 해거드의 ‘동굴의 여왕(She)’은 후자에 속한다.

이 시기 해외작품의 주요 역자로는 서광운과 이주훈, 안동민 등이 있다. 이주훈은 동화작가로서 1960년대 말 R. M. 을람(Elam)의 ‘소년 화성탐험대’와 아시모프의 ‘로봇’ 시리즈 중 두 번째 권인 ‘벌거벗은 태양(The Naked Sun)’을 번역 소개했다. 당시 후자의 번역판 제목은 ‘로봇 나라 소라리아’였다. 1950년대부터 과학소설 번역에 나선 안동민은 1969년 필립 와일리(Philip Wylie)와 에드윈 볼머(Edwin Balme)가 공동집필한 ‘지구 마지막 날(When Worlds Collide; 1932년)’을 우리말로 옮겨 내놓았다.

이 시기에 어른용으로 완역된 해외작품으로는 에드가 라이스 버로우즈의 ‘화성의 존 카터(John Carter of Mars)’시리즈 첫 권인 ‘화성의 공주(A Princess of Mars)’를 서광운이 번역해 1967년 출간한 ‘화성의 미녀’와 H. G. 웰즈의 ‘투명인간’,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조지 오웰의 ‘1984년’ 그리고 폴란드계 미국인 모르데카이 로쉬왈트(Mordecai Roshwald)의 ‘지하 7층(Level Seven; 1959년)’ 등이 있다. 그나마 이중 국내 첫 선을 보인 작품은 ‘화성의 공주’와 ‘1984년’ 그리고 ‘지하 7층’ 뿐이었다.

당시 어른용 완역본들의 일부 출판은 과학소설에 대한 출판계의 인식 개선보다는 해당 작품들 대부분이 SF 장르 이전에 문학의 고전으로 추앙받는데 따른 결과로 보아야 한다.

출간경위야 어쨌거나 과학소설계 입장에서는 이 목록에 들어 있는 로쉬왈트의 ‘지하 7층’에 눈길이 가지 않을 수 없다. 1961년 ‘제7 지하호’라는 제목으로 우리말로 옮겨져 ‘남북구 전후문제 작품집(신구문화사 간행)’에 수록된 이 장편소설은 냉전구도가 굳건하던 시절 인류 스스로 자초한 핵전쟁의 암울한 미래를 사실감 넘치게 그려냈다.

잔존 방사능을 피해 지하 4천 피트에서 기약 없이 살아가야 하는 생존자들의 음울한 세계에 대한 풍경화는 핵전쟁이 현실화 되었을 때는 이미 모든 게 늦어버린다는 교훈을 절절하게 전해준다. 이 작품은 1989년 ‘핵폭풍의 날(세계사 간행)’이란 제목으로 다시 재간된다.

‘지하 7층’은 같은 시기 출간된 과학소설들만큼 오래된 고전은 아니지만 핵전쟁의 공포를 국내에 소개한 첫 어른용 작품이라는 점에서 의의를 갖는다.

성인 대상의 본격적인 창작소설, 문윤성의 ‘완전사회’

이 시기의 세 번째 주목할 만한 현상은 극소수이기는 하나 성인독자들을 대상으로 주제의식과 작품의 완성도가 뛰어난 본격적인 창작소설이 처음 국내에 선보였다는 점이다. ‘주간한국’에서 주최한 제1회 추리소설 공모전에 뽑힌 문윤성(1916년~)의 ‘완전사회(1966년)’는 구한말부터 어른 눈높이에 맞춘 과학소설들이 일부 나오기 시작하는 1980년대 전까지의 긴 세월 동안 오늘날 현대적인 기준에서 보아도 주제의식과 문장구성에서 손색이 없는 군계일학으로 꼽힌다. 당선 발표 당시 문윤성은 나이 쉰이 넘는 경험이 풍부한 작가였다. 그는 이미 1946년 단편 ‘뺨’을 ‘신천지’에 게재하여 등단했다.

과학의 발달이 파행으로 치닫자 지구 종말의 위기를 직감한 세계의 과학자들은 인류 존속을 위해 정신적으로 신체적으로 이른바 ‘완전한 인간’을 선발하여 냉동수면에 들게 한다. 161년 후 주인공이 깨어난 지구는 제3차 세계대전과 제4차 세계대전 그리고 성전(性戰)을 거치면서 남자들은 죄다 화성으로 쫓겨나고 온통 여인들만 사는 곳이다. 가부장적인 남성들이 거세된 이 대안사회는 남녀차별이 원천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데다 발달한 과학기술이 사람들을 노동과 질병으로부터 해방시켜주었으므로 가히 완전사회라 할 만하다.

하지만 겉보기에 페미니즘적 유토피아처럼 보이는 이 사회에도 내부모순이 자리 잡고 있다. 성적 모순을 타파하기 위해 새로 건설한 사회는 바로 그 문제 때문에 더 이상 오도 가도 못하게 된다. 정부는 자위행위(홀랜 정책)를 권장하지만 인민들은 동성애(께브주의)를 원하기에, 정부를 지지하는 우파와 동성애를 지지하는 좌파 간의 갈등은 급기야 완전사회의 근간을 뒤흔들어놓는다.

공모전의 심사위원 한운사가 “이것을 쓴 사람은 굉장한 천재가 아니면 엄청난 도적일 것이라고 느꼈다”고 술회할 정도로 ‘완전사회’는 당시 문단에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다. 우리나라 SF문학사상 사실상 최초의 본격 SF장편으로 꼽을 만한 ‘완전사회’는 1980년대 중반 ‘여인공화국’이라는 제목으로 재출간된 바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문윤성의 ‘완전사회’와 복거일의 ‘비명을 찾아서(1987년)’ 사이의 21년 간 어른용 과학소설의 계보를 잇는 이렇다 할 창작과학소설은 존재하지 않는다.

문윤성은 1960년대에 장편 과학소설을 발표했을 뿐 아니라 훗날 추리작가 협회 고문까지 맡을 정도로 양쪽 장르문학에 두루 정통한 만큼 일찍이 추리소설과 과학소설의 차이를 명쾌하게 구분하였다. ‘완전사회’의 경우 당시 창작 과학소설의 발표지면이 거의 없었기에 추리기법을 혼용하여 언론사의 추리소설 공모전에 출품되었을 뿐이다.

문윤성은 트릭과 반전으로 스릴과 재미를 주는 추리소설과 달리 과학소설은 실현 가능한 과학적 사실을 바탕으로 있을 법한 미래상을 그린다는 점에서 다르다고 구분하는 한편으로, 그렇다고 해서 아무리 과학소설이 미래지향적이라 한들 혹시라도 과학의 시녀가 되어서는 곤란하다고 정곡을 짚었다. 그의 이러한 성찰은 같은 시기에 문필 활동을 한 서광운의 의견과도 일맥상통한다는 점에서, 그 무렵 이 두 선각자의 과학소설에 대한 이해도가 1960년대 말 영미권에서 달아올랐던 뉴웨이브 작가들의 철학에 전혀 뒤지지 않음을 알 수 있다.

“SF는 미래지향적이어야 합니다. SF에서 문학과 과학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지만 과학의 시녀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단지 과학적 사실의 소개나 전달에 그친 SF는 전혀 생명력을 갖지 못합니다. SF가 과학의 수단이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지요. SF는 어디까지나 풍부한 문학적 상상력을 토대로 과학을 선도해 나갈 때 생명력을 가지는 것입니다.”
                                         - 문윤성, [SF 매거진] 1993년 여름호와의 인터뷰에서3

“SF가 한낱 과학의 계몽수단으로 전락되던 시대는 이미 지났습니다. 이미 우주사회학이나 우주법의학까지 등장할 정도로 과학과 사회과학, 자연과학이 융합되어 발전해가고 있습니다. SF의 진행방향 또한 그와 병행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고요.

우리가 지향해야 할 SF는 자체 생명력을 지닌 SF의 세계를 구축할 수 있는 종합적인 과학기술 측면의 시스템을 세운 토대 위에서 그것을 문학적으로 승화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 서광운, [SF 매거진] 1993년 창간호와의 인터뷰에서4

청소년 창작소설 분야에서는 앞서 언급한 한국SF작가클럽에 소속된 작가들 이외에 한낙원이 전과 다름없이 ‘학생과학’을 포함한 여러 지면에서 꾸준히 집필활동을 벌였다. 하지만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후대 작가들을 길러내는 밑거름이 되기에는 시장상황에 너무 척박했다.





1. 김창식, “서양과학소설의 국내 수용과정에 대하여”, 대중문학연구회 편, 과학소설이란 무엇인가, 국학자료원, 2000년, 71쪽

2. 아데네사의 <소년소녀세계과학모험전집>은 <공중열차 지구호; 1959년>(압플톤 지음, 최지수 옮김)를 포함하여 모두 19종 출간예정이었으나 실제 몇 종까지 간행되었는지는 불명확하다.

3. 소준선, “미래지향적인 세계관을 가져야: 국내 최초의 SF장편 <완전사회>의 저자 문윤성”, SF매거진, 1993년 여름호, 43쪽

4. 소준선, “열린 우주를 향한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 서광운 인터뷰”, 계간 [SF 매거진], 1993년 창간호, 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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