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칼럼

꿩 한 마리와 한강 배다리 (상)

이야기 과학 실록 (68)

이야기과학실록 “돌아오는 길 꿩 한 마리였다 / 상감마마께오서 슬쩍 비아냥대었다 / 정승의 위엄에다 / 5만 군사의 위엄에다 / 고작 한 마리 까투리라 // 이런 세월 있었다 있다 있으리라”

이는 최근 고은 시인이 23여년 만에 탈고한 시집 <만인보>의 마지막 시 ‘한강 배다리’의 일부다. 한국 문학사 최대의 연작시로 일컬어지는 <만인보>는 고대부터 현대까지 우리 민족의 여러 인간상을 시로 형상화한 작품으로서, 내년 초 발간될 제30권까지 약 3천800여 편의 시로 이루어져 있다.

만인보의 대미를 장식한 시 ‘한강 배다리’는 조선왕조실록에도 기록되어 있는 사건을 소재로 삼고 있다. 이 시에서의 상감마마는 바로 연산군이다. 연산군은 사냥을 위해 도성 30리 내에 있는 민가를 철거하고 짐승을 풀어놓을 만큼 광적으로 사냥을 즐겼다.


연산군이 특히 즐겨 찾은 사냥터는 능선의 비탈면이 완만하고 산세가 수려한 청계산이었다. 그가 청계산에 한번 거동할 때에는 약 5만명이나 되는 어마어마한 인원이 동원되곤 했다.

사냥을 위해 징집한 군사 3만명에 대신들로부터 하인 5~10명씩을 차출하여 2만명의 인원을 보탠 것이다. 만약 이에 응하지 않는 신하가 있을 시에는 사헌부에서 잡아들여 죄를 묻게 했다.

1505년(연산 11년) 10월 25일 연산군은 “오늘 눈이 올 징조가 있으니 박숭질, 권균 등을 시켜 청계산에 가서 사냥하는 것을 감독하라”는 명을 내렸다. 그날 저녁 좌의정 박숭질 등이 청계산으로부터 돌아와 잡은 것을 임금에게 바쳤는데, 포획물은 통틀어 꿩 한 마리에 불과했다. 그것을 본 연산군은 “정승으로서 5만명을 데리고 가서 겨우 꿩 한 마리를 잡았는가”라고 비웃었다.

그럼 이 같은 내용을 다룬 시의 제목이 왜 하필 ‘한강 배다리’일까. 연산군이 5만명의 군사를 이끌고 청계산으로 가기 위해서는 한강을 건너야 했다. 임금은 강을 건널 때 용주(龍舟)라는 배를 타는데, 그것을 이용해 강을 건너는 법도를 용주법이라 한다.

그런데 용주법대로 하자면 절차와 방법이 매우 복잡해 성질이 급한 연산군으로서는 불편하기 짝이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아무리 용주라 해도 배가 뒤집힐 염려가 없을 수 없었다. 따라서 연산군은 청계산에 사냥을 갈 때마다 한강에 배를 이어 연결해서 만든 배다리를 설치하게 했다.

이를 위해 백성들의 배 800척을 취해다가 한강을 가로지르는 큰 다리를 만든 연산군은 청계산을 마음 놓고 왕래하며 사냥을 즐겼다. 그런데 사냥을 자주 다녔던 연산군은 봄이 와서 한강의 얼음이 녹은 후에도 한강의 배다리를 철거하지 말라는 명을 내렸다.

배다리로 인해 수운이 두절되기도

당시 한강은 전국 각처의 물산이 운송되는 수상 교통의 요지였다. 호남·호서·황해도·평안도 등의 지방에서 조세로 받은 물품은 서해와 한강 하류를 통해 한양으로 운반되었다. 또 충북과 강원도의 조운은 한강 상류인 남한강·북한강을 통했으며, 경상도의 조운도 낙동강에서 조령을 넘어 한강으로 다시 연결되었다. 그런데 배다리가 수로를 가로막고 있는 동안에는 한강의 수운이 두절되는 소동이 일어나곤 했다.

이런 상황을 애절하게 읊은 조선 후기의 노래가 바로 ‘한강원가’이다. ‘강원도 뗏목 장수 뗏목 빼앗기고 울고 가고/ 전라도 알곡 장수 통배 뺏기고 울고 가면/ 삼개(마포) 객주 발 뻗고 운다네/ 노들나루 색주가 여인은 머리 잘라 파는구나.’

조선왕조실록에서 한강 배다리의 기록이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1417년(태종 17년) 3월 26일자의 기록이다. 이날 태종은 김우생을 사재감정에서 파직하는데, 그 이유는 그가 감독해서 만든 마전포의 배다리가 견실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마전포는 지금의 서울 송파구 삼전동에 있던 포구로서, 삼(麻)을 심은 밭이 많아 그런 이름으로 불렸다.


연산군이 폐출된 뒤 왕위에 오른 중종 대에는 한강의 배다리로 인한 작은 소동이 일어난 적이 있다. 1528년(중종 23년) 9월 26일 중종은 “선릉에 참배하려 한 지 이미 오래 되었으나 근래 실농(失農)하였고 배다리를 수축하는 데 폐단이 있으므로 오래 하지 못했다”며 배다리의 설치와 참배 등에 대해 대신들의 의견을 구했다.

여기서 배다리를 설치하는 폐단이라는 것은 아마 연산군 때의 일과 연관되어 있지 않았을까 짐작된다. 그로부터 약 보름 후 중종은 어가를 타고 한강 배다리로 향했다. 그런데 그날따라 안개가 짙어서 어가를 선도하는 자가 그만 길을 잃고 말았다.

종종이 탄 어가는 다른 길로 향하다 한참 만에 길을 잘못 든 것을 알고는 배다리가 있는 곳으로 다시 어가를 돌렸다. 이 일로 인해 길을 잘못 안내한 관리들은 추문을 받아야 했다.

조선시대 때 한강에 배다리를 한 번 설치하려면 전국 각처에서 배를 끌어 모으고, 설치 기간만 해도 약 20일을 잡아야 했다. 그러나 배다리에도 장점이 있었다. 필요할 때만 설치하고 바로 철거해버릴 수 있다는 것인데, 이는 현대 군사작전에서도 유용하게 쓰인다.

천혜의 물울타리, 한강

군사작전상 장갑차와 탱크 등의 중무장 장비와 인력을 신속하게 도하시킬 필요가 있을 때 설치하는 것이 바로 배다리와 같은 개념의 ‘부교’이다. 현재 우리나라 군에서 주력 도하장비로 사용하고 있는 것은 리본교(Ribbon Bridge System)이다.

리본교를 구성하는 핵심 부품인 교절 1개는 4등분으로 접혀져 차량 한 대에 적재, 운반할 수 있다. 교절은 자체 작동장치에 의해 펼쳐지며, 스스로 물에 뜰 수 있는 부력을 갖고 있으므로 복잡한 준비나 설치 과정이 필요 없다.

각각의 교절이 물속에서 펴지면 가설단정으로 끌고 와서 제 위치에 맞추고 너트로 돌려서 서로 연결만 하면 순식간에 탱크도 지나다닐 수 있는 부교가 완성된다. 교절은 여러 개의 격실 구조로 되어 있어서 외부에 손상이 생겨 물이 새더라도 전체가 침수되지는 않는다.

이처럼 간편한 현대의 부교와 달리 한강 배다리의 설치는 매우 복잡하고 연산군의 경우처럼 그 폐단도 적지 않았다. 그럼 왜 조선은 한강에 정식 교량을 건설하지 않았던 걸까. 조선시대 때 건설된 가장 긴 교량은 현재 서울 성동구 행당동과 성수동의 경계에 놓여 있는 살곶이다리이다.

길이 78m, 너비 6m의 살곶이다리는 가운데 두 줄의 교각을 낮게 해 다리의 중량을 안으로 모으고, 돌기둥에 무수한 흠집을 새겨 물살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하는 등 과학적으로 건설되었다. 이만한 기술이면 임금이 행차할 때마다 배다리를 놓아야 했던 한강에 교량 건설을 시도해봤음직도 하다. 그런데 조선시대를 통틀어 그런 시도를 한 적은 한 번도 없다.

왜 그랬을까. 거기에는 나름대로 속 깊은 이유가 있었다. 한양의 남쪽을 길게 가로지르고 있는 한강은 외적의 침입을 저지하는 천연의 물울타리 역할을 하고 있다. 북방 기마민족이 침입해올 경우 한강 이남으로 임금이 빠르게 대피할 수 있고, 강이라는 천혜의 저지선에 그들이 막혀 주춤하는 사이 지방의 원군을 불러 모을 시간적 여유를 갖게 된다.

그러므로 한강에 말과 수레가 쉽게 오갈 수 있는 교량을 건설한다는 것은 적에게 남진의 교두보를 마련해주는 것이나 다름없는 행위였다. 이런 이유로 조선의 임금들은 번잡하기는 했으나 배다리를 이용해 한강을 건너는 방법을 택했다.

그러다 정조 때에 이르러서는 한강의 배다리 설치에 대해 매우 과학적이면서도 체계적인 기준이 마련되었다. (하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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