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칼럼

근대 책들이 앓는 병 ‘산성화’

[사이언스타임즈 라운지] 중성지인 한지는 1천년 이상 보존

정조가 즉위한 지 7년째 되던 해인 1783년의 여름 무더위도 유별났던 모양이다. 더위에 지친 임금을 보다 못한 규장각 직제학 서유방은 서늘한 별전으로 옮겨 여름을 보낼 것을 건의했다. 그러자 정조는 “더위를 물리치는 데는 독서만큼 좋은 방법이 없다”며 완곡히 거절했다. 과연 독서와 호학의 제왕다운 답변이었다.

그러고 보면 한여름의 피서지로 도서관만큼 좋은 곳도 없다. 그중에서도 서울 서초구에 있는 국립중앙도서관은 대한민국의 모든 책이 모이는 곳이다. 이곳에서 가장 오래된 책이 1355년 고려 공민왕 때 편찬한 ‘동인지문사육’이라고 하니 그 규모를 짐작할 만하다.

하지만 책도 오래되면 사람처럼 늙고 병들기 마련이다. 따라서 국립중앙도서관에는 그 같은 책들을 보존․복원 처리하기 위한 자료보존센터가 있다. 7개의 전문시설을 갖추고 있는 이 센터에서 가장 눈에 띄는 곳이 바로 탈산처리실이다.

산성화된 종이 책의 산성도를 측정하고 있는 모습. ⓒ 국립중앙도서관 제공

산성화된 종이 책의 산성도를 측정하고 있는 모습. ⓒ 국립중앙도서관 제공

탈산처리란 종이의 산성화를 예방하고자 알칼리성 약품을 투여해 산성도(pH)를 중성으로 높여주는 것을 말한다. 탈산처리실에서 주로 처리하는 책들은 1980년대 이전에 생산된 산성지로 제작된 도서들이다.

최근 국립중앙도서관은 국내 최초로 미국 회사에서 만든 ‘대량 자동화 탈산처리장비’의 구입 계약을 체결하고 설치를 위한 기반시설 공사를 준비하고 있어 올해 말까지는 설치를 완료하고 가동할 전망이라고 밝혔다. 이 장비가 가동될 경우 기존의 탈산처리기로 1년에 약 4000권 작업하던 것에서 1년에 약 10만권을 산성화로부터 구출해낼 수 있다고 한다.

산성화로 인한 지식문화유산의 대량 붕괴

이 장비를 도입한 이유는 출판된 지 30년 이상 지난 자료들의 산성화 가속 현상으로 대량 탈산처리가 시급하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때부터 1980년 이전에 제조된 종이 자료들은 거의 모두 산성지여서 노랗게 변하고 서서히 바스러져 멸실 위기에 처해 있다.

산성지가 만들어지기 시작한 건 19세기 초 로진을 사용하는 산성 사이즈가 발명되면서부터였다. 종이의 섬유는 친수성에다 다공질이므로 펜으로 쓰거나 인쇄할 때 잉크가 번지기 쉬워, 이를 방지하기 위해 사이즈 처리를 한다. 그런데 로진 사이즈 처리와 펄프에 황산알루미늄이라는 강산성첨가제를 섞어 만든 산성지는 시간이 지날수록 황화현상을 일으키면서 쉽게 바스러지는 단점을 지닌다.

산성지의 수명은 평균 50년에서 길어야 100년이다. 1980년대 이전에 출판된 책들이 유독 누런 것은 산성화 때문이다. 19세기부터 산성지로 출판된 종이자료는 100년이 지난 지금 산성화로 인한 세계지식문화유산의 대량 붕괴로 이어져 심각한 문제점으로 대두되고 있는 실정이다.

국립중앙도서관의 탈산처리실에서는 pH 4.0~5.0으로 산성화한 책자 종이마다 알칼리성 약품인 산화마그네슘과 탄산칼슘 가루를 침투시켜 종이 내부를 pH 7.0~8.0인 중성상태로 바꾼다. 이 같은 탈산처리 효과는 종이의 수명을 약 3배 정도 늘려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때문에 1990년대 들어 우리나라에 수입되는 외국 원서의 판권에는 ‘중성지에 인쇄했다’라는 문구가 찍혀 나오기 시작했다. 1990년부터는 우리나라에서도 산성지 대신 중성지를 사용한 노트가 출시되었으며, 급기야 1992년 9월 정부는 보존가치가 있는 모든 정부 공문서의 용지를 산성지 대신 중성지로 대체할 것을 각급 행정기관에 지시했다.

수명 길고 친환경적인 중성지

중성지는 산성지에 비해 수명과 질적인 면에서 우수할 뿐 아니라 친환경적이라는 장점을 지닌다. 종이를 만드는 제지공정에서는 폐수가 많이 발생하는데 보통 1톤의 종이를 만들기 위해 10톤 가량의 물이 필요하다. 산성지의 경우 매번 다른 공업 용수가 드는 데 비해 중성지는 재활용수 비율이 절반쯤 되므로 종이 1톤당 5톤 정도의 용수를 줄일 수 있는 셈이다.

그런데 자그마치 1200년이나 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의 두루마리 경문은 일부만 닳아 떨어졌을 뿐 아직도 그 형체가 온전하다. 1966년 경주 불국사 석가탑에서 발견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물인 이 두루마리 종이가 온전한 이유는 닥종이로 만든 한지이기 때문이다.

한지는 산성 화학 약품을 사용하지 않으므로 중성지의 성격을 띤다. 특히 원료인 닥나무를 알칼리성의 잿물로 표백하고 황촉규(닥풀)이라는 독특한 식물성 풀을 접착제로 사용하므로 한지는 세계적으로도 수명이 오래가기로 유명하다.

수명이 고작 100년밖에 되지 않는 산성지로 생산된 기록물들에 대한 원본 보존 매체로 유럽에서 채택한 폴리에스터 기재 마이크로필름의 경우 약 500년의 보존 수명을 갖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미국 국립표준원의 실험결과에 의하면 CD 및 DVD 등의 광디스크 수명도 약 100년이다. 하지만 중성지의 특성을 가진 한지의 수명은 1000년 이상이다.

집의 책꽂이에 꽂혀 있는 책이 산성지인지 중성지인지 구별할 수 있는 간단한 방법이 있다. 중성지의 경우 태우면 재가 하얗게 되지만 산성지는 검은 빛을 띤다. 하지만 요즘 출판되는 책들은 그런 검사를 할 필요가 없다. 모두 중성지이기 때문이다.

(5988)

뉴스레터 구독신청
태그(Tag)

전체 댓글 (0)

과학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