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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와 철학자의 초상 사진

세계사 속 과학기술

TePRI Repo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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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인물의 초상 사진이 오늘날 남아있는지가 진지한 학술적 관심사이기는 어려울지 몰라도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꽤 중요할 수 있다. 그림으로만 볼 수 있는 인물은 아무래도 비현실적으로 다가오는 반면, 사진으로 만나는 인물은 사뭇 현실적이고 심지어 동시대인처럼 느껴지니까 말이다.

이 글의 출발점은 영국 과학자 존 허셜이 1867년에 촬영한 한 장의 사진이다. 존 허셜은 과학사에서 더 유명한 윌리엄 허셜의 아들이다. 원래 독일에서 활동하던 윌리엄 허셜은 영국으로 이주하여 본업인 음악가 생활을 이어가면서 부업과 취미로 망원경 제작과 천문 관측을 시작했다. 그러다가 점점 더 천문학에 공을 들이게 되었고, 마침내 1781년에 천왕성을 발견하여 과학사를 넘어 인류 역사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겼다.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이 있다는 사실은 인류 역사의 시초부터 알려져 있었다. 밤하늘에서 계속 위치가 바뀌기 때문에 눈에 띨 수밖에 없는 이 다섯 개의 행성은 고대 이래로 인류의 세계관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한 예로 우리가 사용하는 요일들의 이름을 들 수 있는데, 그 이름들은 이 다섯 개의 행성들과 태양(일요일)과 달(월요일)에서 유래했다. 일주일이 딱 7일인 것과 마찬가지로, 하늘의 주인공들은 딱 일곱 개, 그중에 행성은 딱 다섯 개라고 사람들은 믿었다.

그러나 아마추어 천문학자 윌리엄 허셜이 여섯 번째 행성을 발견함으로써, 수천 년을 이어온 그 확고한 믿음은 보기 좋게 깨졌다. 세계 그 자체에 합리적 의미가 내재하고, 우리가 곰곰이 궁리하면 그 의미를 고스란히 파악할 수 있다는 계몽주의적 세계관에 돌이킬 수 없는 균열이 나는 순간이었다.

태양과 수성 사이의 거리(태양-수성 거리)를 1이라고 하면, 대략적으로 태양-금성 거리는 2, 태양-지구 거리는 4, 태양-화성 거리는 8이다. 이렇게 행성들까지의 거리가 등비수열의 패턴으로 증가하기 때문에, 토성 너머의 천왕성이 발견된 것은 태양계가 두 배로 확장된 것을 의미한다. 요컨대 1781년의 천왕성 발견으로 세계는 치밀하고 이해하기 쉬운 질서를 잃은 대신에 훨씬 더 크고 복잡해졌다.

존 허셜 ⓒ 위키백과

존 허셜 ⓒ 위키백과

오늘날 윌리엄 허셜의 모습은 초상화로만 남아있다. 반면에 앞서 언급한 대로 윌리엄의 아들 존은 초상 사진을 남겼다. 존 허셜은 수학, 천문학, 화학을 비롯한 여러 과학 분야에 정통했으며 사진 기술의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다. 흔히 ‘청사진’으로 불리는 사진 기술이 그의 발명품이다.

최초의 사진은 1822년경에 촬영되었지만, 당시의 사진 기술은 아주 긴 노출시간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는 고정된 풍경밖에 찍을 수 없었다. 그러나 루이 다게르가 노출 시간을 몇 분으로 줄인 이른바 ‘다게레오타이프’ 기술을 1837년에 완성함으로써 인물 촬영의 가능성이 열렸다. 인물이 몇 분 동안만 가만히 있으면, 그의 초상 사진을 제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후 기술이 더 발전하면서 1850년대부터 인물 사진이 획기적으로 증가하게 된다.

1867년에 촬영된 존 허셜의 초상 사진으로 돌아가자. 그보다 더 앞선 과학자 사진은 없을까? 1850년대부터 인물 사진이 많이 촬영되었다면, 존 허셜보다 더 앞선 과학자의 초상 사진도 남아있을 법하다. 아니나 다를까, 마이클 패러데이가 1861년경에 촬영한 사진을 온라인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전자기 유도를 발견하고 전기장의 개념을 제안한 업적으로 유명한 마이클 패러데이는 대중에게 과학을 설명해주는 크리스마스 강연을 시작한 인물이기도 하다.

내친김에 과학계 바깥도 살펴보자. 중요한 철학자들의 초상 사진은 어떨까? 천왕성이 발견된 해인 1871년에 ‘순수이성비판’을 출판하여 위대한 철학자의 반열에 오른 칸트는 초상화만 남겼고, 그의 손자뻘인 헤겔도 초상화가 전부다. 하지만 그 직후부터 달라진다.

헤겔보다 다섯 살 어리지만 학계에서 더 일찍 성공한 친구 셸링은 1848년에 ‘다게레오타이프’ 사진을 촬영했다. 평생 유복하게 살면서도 세상에 대해 몹시 비관적이었던 쇼펜하우어는 역시나 부자답게 초상 사진을 여러 점 남겼는데, 1846년에 촬영한 것이 가장 이른 작품으로 보인다. 이들보다 한참 후배인 니체는 당연히 많은 사진을 남겼는데, 주목할 만한 것은 1882년에 루 살로메, 파울 레와 함께 찍은 작품이다. 당시 40세에 가까웠던 니체는 21세의 루 살로메를 짝사랑했다. 그 짝사랑을 짐짓 외면하려는 듯, 사진 속 니체의 얼굴은 엉뚱한 쪽으로 향해 있다.

니체(맨 오른쪽)  ⓒ 위키백과

니체(맨 오른쪽) ⓒ 위키백과

그러니까 과학자와 철학자의 사진이 촬영되기 시작한 것은 1850년대부터라고 결론지을 수 있겠는데, 그 시기는 빅토리아 시대의 초기이며, 빅토리아 시대의 대표적인 특징은 자본주의의 급성장, 제국주의, 성(性)에 대한 억압, 인간 내면의 이중성 등이다. 소설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는 빅토리아 시대 사람들의 이중성을 묘사한 작품이다.

앞서 우리는 초상 사진이 인물을 더 현실적이고 동시대적으로 느끼게 만든다고 전제했다. 누구나 동의할 만한 전제지만, 그렇다고 사진이 진실을 고스란히 보여준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회화와 사진은 모두 시각적 매체이며, 무릇 매체는 온전한 진실의 일부만 전달한다.

이 글에서 언급한 모든 사진은 전통적인 회화를 무척 닮았다. 왜 아니겠는가? 당시에 사진을 찍은 사람은 거의 예외 없이 자신이 초상화 속의 역사적 인물처럼 보이기를 바랐을 것이다.

한참 더 나중에 촬영된, 아인슈타인이 혀를 쑥 내민 모습으로 나오는 유명한 사진도 진실의 일부만 보여주기는 마찬가지다. 아인슈타인은 그렇게 파격적이기만 했을까? 전혀 그렇지 않다. 새로운 양자역학 앞에서 그는 완고한 보수주의자였다.

2차 세계대전 이후의 독일 회화를 대표한다고 평가받는 게르하르트 리히터는 사진과 회화를 뒤섞는 독창적인 기법으로 유명하다. 그의 많은 작품들은 흐릿한 사진 위에 물감을 마구 칠해놓은 형태다.

혹시 사진은 현실적이고 회화는 비현실적이라는 이분법적 통념을 뒤엎기 위해 그런 기법을 고안한 것일까? 정확한 내막은 알 수 없으나, 그의 작품들이 사진의 회화성을 도드라지게 한다는 점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우리는 어떤 매체를 통해 과학과 과학자를 만날까? 주요 매체로 교과서, 회화, 사진을 들 수 있을 성싶다. 교과서는 명쾌한 결론과 깔끔한 질서를, 회화는 위대함과 불멸을 강조한다. 이들 매체가 진실의 일부만 보여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진도 고유한 편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겠지만, 그래도 과학자의 초상 사진은 과학자를 현실 속의 한 인간으로 보게 해준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요긴한 매체다. 존 허셜과 마이클 패러데이의 사진을 응시하노라면,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오, 뉴턴의 사진이 없다는 사실이 새삼 아쉽게 느껴진다.

* 이 글은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서 발간하는  ‘TePRI Report로부터 제공받았습니다.

  • 전대호 유미과학문화재단 이사daehojohn@hanmail.net
  • 저작권자 2019.08.22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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