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칼럼

과학과 종교의 관계는 단순하지 않다

[과학지식인 열전] 종교를 과학으로 재단하거나, 분리시키지 말자

과학지식인 열전 과학을 우상파괴자로 인식하는 사람들은 과학이 지닌 긍정적인 힘을 강조한다. 과학은 무지몽매한 인간을 계몽하는 도구로, 종교적 독단으로부터 빠져 나와 새로운 합리성을 향해 가는 새로운 사유로 인식되곤 한다.

정확히 18세기 계몽주의 시대에 유행했던 과학에 대한 이러한 사고방식이 그때로부터 300년이나 지난 현대에도 합당한 것인지는 의문이다. 과학은 18세기보다 현대에 이르러 더욱 발전했지만, 종교는 사라지지 않았고 오히려 더욱 현대인들에게 안식을 제공하고 있다. 과학과 종교를 대립관계로 설정하는 방식은 역사 속에서 무기력해진다.

중복되지 않는 교도권 (NOMA)

아마도 스티븐 제이 굴드의 NOMA(Nonoverlapping magisteria: 중복되지 않는 교도권)는 이러한 고민 속에서 등장한 한 과학자의 답일 것이다1. 굴드에 의하면 종교와 과학은 교도권, 즉 가르치는 영역에서 크게 중복되지 않는다. 따라서 과학이 종교를, 종교가 과학을 오해하지만 않는다면, 서로 싸울 일은 없다. 굴드의 이러한 주장은 상식적이다. 문제는 굴드가 생각하는 것처럼 과학과 종교의 관계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데 있다.

굴드의 NOMA는 종교에 친화적인 사람들과 적대적인 사람들 사이의 중재의 길을 모색하려는 시도다. 굴드에 따르면 과학과 종교가 적대적이고 껄끄러운 관계를 유지할 필요는 없다. 언제나 제3의 길은 열려 있고, 그것이 바로 NOMA다.

NOMA의 주장은 간단하다. 교도권(magisteria)이란 카톨릭의 용어로, 교회가 신도들을 가르칠 수 있는 권위를 뜻한다. 즉, 어떤 분야가 어떤 영역에 대해 교도권을 지녔다는 것은, 해당 분야가 해당 영역에 대해 다른 분야보다 더 나은 학제나 해결방법을 지니고 있음을 뜻한다.

굴드에 따르면, 과학은 자연의 실재적인 영역에 대한 교도권을, 종교는 우리의 삶과 행동에 대한 도덕적 의미를 규명하는 영역에 대한 교도권을 지닌다. 서로의 교도권이 이처럼 다르기 때문에 각 분야가 자신의 길을 향해 올바로 나간다면 부딪히거나 싸울 일은 없다는 것이다.

굴드가 종교로부터 과학을 보호하려고 하는 이유는 그가 창조과학자들과 전쟁을 치르면서 겪은 경험 때문일 것이다. 종교가 과학을 악용할 때 어떤 결과가 나올 수 있는지 굴드는 잘 알고 있었다. 그 반대편에서 굴드가 과학으로부터 종교를 보호하려는 이유를 찾는 것도 어렵지 않다. 극단적인 광신자들의 과학에 대한 공격을 방어했던 것처럼, 굴드는 과학을 극단적인 방식으로 악용하는 이들과도 싸워왔기 때문이다.

그는 과학이 어떻게 인종차별을 정당화하고, IQ로 사람들을 서열화하는지를 비판하는데 주저하지 않았고, 그러한 극단적인 과학주의자들에게 언제나 적대적이었다. 그러한 비판은 사회생물학과 진화심리학에도 가해졌고 격렬한 논쟁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2. 과학이 가지 못했고, 갈 수도 없는 영역은 분명히 존재한다. 과학으로 모든 영역을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과학자는 나이브하다. 그러한 과학주의는 종교의 독단주의처럼 나이브하다. 그것이 굴드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과학이 설명할 수 없는 영역이 존재한다고 해서 그것을 종교가 자연스럽게 떠맡을 수 있다는 결론은 도출되지 않는다. 그것은 논리적으로 부당한 일이다. 이러한 오류를 잘 아는 굴드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를 그 나머지 영역에 배치하려고 했던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 그는 다만 두 가지 근거를 제시한다.

첫 번째 근거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중용의 미덕, 즉 황금률이다. 극단적인 두 의견이 갈등할 때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그 사이의 길을 택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굴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을 잘못 이해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중용을 중간의 뜻으로 사용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극단적으로 신을 믿는 이들과, 극단적으로 신을 믿지 않는 이들이 존재한다고 해서, 그 중간의 길인 절반의 신을 믿거나 안 믿을 수는 없는 일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황금률은 그의 ‘윤리학’에 등장하며,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과학에 관한 작품이 아니라 형이상학에 관한 작품이다. 게다가 아리스토텔레스는 황금률을 덕(virtues)을 논의하면서 등장시키고 있다. 덕이 있는 행동은 온화하고(moderate), 나쁜 행동은 극단적이라는 뜻이다. 복잡한, 그래서 두 가지 극단적인 의견들이 대립할 때마다 굴드가 제시한 중용을 택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에 가깝다. 그럴 수는 없다. 사형제도에 찬성하는 사람들과 반대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고 해서, 사람을 반쯤만 사형시킬 수는 없다.

굴드가 제시하는 또 한가지 근거는 ‘종교는 철저히 도덕에 관계한다’는 것이다. 굴드는 역사적인 근거들을 제시하며 인류가 경험했던 도덕적 전이들은 대부분 종교가 수행해온 것들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엔 굴드가 종교에 바라는 감정이 녹아 있는 듯 하다.

굴드는 종교가 인류에게 도덕적으로 더욱 진보된 가치들을 전해주는 분야가 되길 바란다. 따라서 굴드의 주장 속에서 나타나는 종교의 모습은 굴드의 머리 속에서 희망하는 종교의 모습이다. 특히 굴드는 자연은 철저히 비도덕적이라고 판단한다. 자연엔 도덕이 없다. 자연은 잔인하다. 따라서 자연을 연구하는 과학은 도덕적 판단을 내릴 수 없다. 이러한 근거들에 따라서 과학은 자연을, 종교는 도덕을 관장한다. 두 분야가 중첩될 이유는 없다3.

도덕에 관한 영역을 종교만이 담당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하다. 과학과 종교의 극단적인 대립을 화해시킬 목적으로 쓰여진 굴드의 NOMA는 비종교적이면서도 도덕을 다루는 여러 분야들, 예를 들어 인문학과 사회과학을 설명하지 못한다. 실상 굴드가 희망하고 바라는 종교의 모습은 세속적인 인본주의자들이 꿈꾸는 그런 종교의 모습일 뿐, 실재하고 우리가 목도하는 그런 종교는 아닌 것이다. 희망을 이야기할 수는 있다. 하지만 굴드가 생각했던 그런 세속화된 종교는 없다.

과학자의 종교에 대한 두 극단적인 태도

과학자들이 종교에 대해 보이는 태도는 두 종류의 극단적인 정형으로 나타나곤 한다.

그 한가지는 어떻게든 종교와 과학을 화해시켜보려는 태도다. 과학과 종교의 대화는 국내에서도 여러 형태로 재생산되고 있다. 처음엔 기독교를 중심으로 논의되던 과학과 종교의 대화는 이제 불교를 넘어 유교에까지 차용되고 있다.

그들은 빅뱅이론과 진화론을 언급하며 과학이 발견한 신에 대해서, 그리고 종교가 지닌 과학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러한 대화 속에서 양자역학의 발견을 이미 불교가 예견하고 있었다는 주장도 자주 등장하며, 양자역학이 불교의 교리를 증명했다는 주장도 흔히 목도할 수 있다.

기독교를 불교로 치환한 것뿐인 이러한 논의가 얼마나 생산적일지는 알 수 없으나, 과학과 종교의 대화는 어떤 분야의 학자들에게는 괜찮은 비즈니스 영역이다. 두 번째 종류의 정형은 종교를 증오하는 과학자들이다. 종교의 역사란 결국 피의 역사일 뿐이며, 과학의 진보는 종교가 말하는 진리를 모두 부정해왔다는 것이다. 도킨스와 호킹 같은 과학자들이 이러한 극단에 서 있다.

하지만 역사는 단순하지 않다. 경제학자 케인즈가 뉴턴의 신비주의적인 면모를 드러낸 이후로, 다윈과 헉슬리조차 어느 정도는 종교적이었다는 이유로, 과학과 종교의 관계를 대립으로만 바라보는 것에는 무리가 있다는 주장들이 있다. 하지만 뉴턴이 살던 시기의 유럽에서, 그것도 근대과학이 막 꽃피던 시기의 초창기 과학자를, 현대적 관점에서 판단하는 것에는 무리가 있다. 다윈과 헉슬리가 살던 19세기의 영국 빅토리아 시기도 마찬가지였다. 당시의 사회적 배경은 과학자라 해도 종교에 대해 함부로 적대감을 드러낼 수 없는 그런 시기였고, 다윈과 헉슬리도 그러한 시대에 살던 사람이었을 뿐이다.

조금 더 현대의 예들을 들어 보는 것이 공평할 것이다. 종교에 가장 적대적일 것 같은 과학자 집단, 즉 진화생물학자들 중에서도 우리는 심심찮게 극단적으로 종교적이었던 이들을 찾아볼 수 있다.

“진화의 불빛에 비추지 않고는 생물학의 그 무엇도 의미가 없다”라는 말을 남긴 도브잔스키는 기독교인이었고 아마추어 신학자이기도 했다. 통계학의 아버지이자, 다윈의 이론과 멘델의 이론을 수학적으로 종합했던 로날드 피셔 경은 신실한 성공회 신자였다. 피셔와 함께 진화론의 수학적 공식화를 주도했던 홀데인은 신비주의자로 알려져 있으며, 이런 과학자들에 의해 현대 진화론의 ‘근대 종합’이 이루어졌다. 반대편에는 샤르댕처럼 신부이면서도 진화론을 연구했던 학자가 있고, 다윈과 함께 자연선택을 발견했으면서도 신비주의자로 돌변한 월러스가 있다.

과학과 종교의 관계는 굴드의 생각처럼 중첩되지 않는 것도 아니고, 대립적인 것도 아니다. 그 중간쯤 어디에 해답이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일상에서처럼, 그 두 분야는 개개인의 일상 속에서 부딪히고, 중첩되고, 때론 서로에게 무관심하기도 하다.

과학은 사실만을 발견하는 지루한 학문이 아니며, 때로는 우리의 도덕적 가치판단에 깊이 개입한다. 이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은 쉬운 것이 아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점은, 과학을 우상파괴자로 보는 시각이 역사적으로도, 현실에서도, 과학을 위해서도 지나치게 단순하다는 것이다. 종교를 과학으로 재단하려는 도킨스와 둘을 갈라 놓으려는 굴드에게, 유전학자 앨런 오(H. Allen Orr)가 했던 말이 조금은 위안을 줄지 모른다. 이 글은 종교인들에게 무언가를 말하고자 하지 않는다. 이 글은 전적으로 과학자들에게로 향해 있다.


“이런 말이 진화생물학자는 종교에 관해 아무런 말도 할 수 없다는 뜻은 아니다. 할 수 있고 실제로 하기도 한다. 최소한 어떤 경우에 ‘주님은 매우 신비스러운 방식으로 일하신다’라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좀 더 일반적으로는, 성경의 문자주의적 접근에 대한 거부를 요구할 수도 있다.

인류가 아프리카 사바나로부터 수백만 년 전에 진화해 나왔다는 자연의 사실들이 있고, 이러한 사실들은 협상의 대상이 아님은 분명하다. 하지만 도킨스의 책은 너무 나갔다. 이유는 당연히 ‘만들어진 신’이라는 책이 그 자체로 진화생물학 책도 일반 과학 책도 아니기 때문이다. 도킨스가 주장하는 신에 관한 어떤 주장들도 어떤 실험이나 데이터에 기반한 것이 아니다. 그건 그저 도킨스의 말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과학과 종교 사이에서 서로가 어떠해야 한다는 논쟁이 없었다고 결론 내려서는 안 된다. 스티븐 제이 굴드에 의해 제안된 것처럼 이 둘은 완전히 다르고 따라서 서로가 서로를 침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주장은 지나치게 단순하다.

합법적인 과학과 인증된 종교 사이의 불일치는 언제나 있었고 또 계속될 것이다. 이와 관련된 주제들은 인식론적(과학과 종교는 단순하게 전자는 유물론을 전제하고 후자는 그렇지 않은 채로 주장을 펼치는 것인가?) 영역과, 윤리학의 영역(우리는 의학이 성취할 수 있는 한계를 어디서 정해야 하며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을 포함한다.

이러한 질문들은 어렵고, 과학자들과 종교사상가들 사이의 광범위한 토론이 장점이 되는 것들이다. 하지만 그런 토론이 가치 있으려면 토론은 도킨스가 하려고 했던 것보다는 조금 더 높은 수준의 정교한 논의들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4.”





1. Stephen Jay Gould, “Nonoverlapping Magisteria,” Natural History 106 (March 1997): 16-22.

2. 사회생물학과 진화심리학을 둘러싼 굴드와 에드워드 윌슨 혹은 굴드와 여러 진화심리학자들의 논쟁은 인터넷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3. 굴드의 NOMA에 대한 비판은 앨런 오의 다음 글에서 더욱 자세히 찾아볼 수 있다. 이 글을 쓰기 위해 앨런 오의 글을 많이 참고했음을 밝혀둔다. 과학에 대한 오해를 다루는 짧은 예로 종교와의 관계가 언급되었기 때문에, 깊이 있는 논증은 생략했다. H. Allen Orr, “Gould on God: Can religion and science be happily reconciled?”, October/November, Boston Review, 1999.

4. H. Allen Orr, “Mission to Convert”, New York Review of Books, Volume 54, Number 1 • January 11,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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