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vember 25,2017

슈만, 열정, 그리고 정신병

박지욱의 메디시네마(101) 애수의 트로이메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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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시절의 음악시간, 솔직히 고역이었습니다. 지루한 음악을 억지로 감상하는 것도, 이해 못할 음악 이론을 배우는 것도, 들어본 적이 없는 외국어 악상 기호를 외우는 것도, 가창으로 실기시험을 치루는 것도 모두 힘든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나마 쉬운 것은 음악사(音樂史)였을까요? 바하, 모짜르트, 베토벤 같은 위인의 이름으로 치루는 시험은 그나마 쉬웠는데, 그것도 낭만주의 시대에 이름 자체가 어렵습니다. 하는 수 없이 “쇼슈리멘”으로 외웠습니다. 짐작하듯, 쇼팽, 슈만, 리스트, 멘델스존의 이름 첫 글자들의 조합입니다.

지금은 ‘음악 감상’이 별도의 취미랄 것도 없는 세상이지만 70~80년대만 해도 클래식 음악을 일상적으로 듣기는 힘든 시절이었으니 다양한 국적으로 된 고전 음악가들의 이름은 암호와 다를 것도 없었지요. 하여간 그렇게 시험을 치르면서 그들의 이름도 음악도 조금씩 익숙해집니다. 하지만 슈만은 필자에게도 여전히 생소한 음악가로 남았습니다. 같은 낭만주의 음악가들 중 쇼팽이나 슈베르트가 가지는 대중적 지명도에 비하면 한참이나 밀리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영화 <애수의 트로이메라이>를 보고 나면 그에 대한 생각이 좀 달라집니다.

영화의 시작은 파가니니의 연주회 장면입니다. 파가니니(저명한 바이올린 연주자인 기돈 크레머가 역을 맡음)가 신들린듯한 연주 솜씨로 청중들을 홀립니다. 객석 한 켠에서 연주를 듣던 청년 로베르트 슈만(Robert Schumann; 1810~1856)은 다짐합니다. 자신도 음악가가 되리라. 피아노계의 파가니니가 되리라고.

슈만은 동부 독일의 츠비카우라는 도시에서 출판업자(서적상)의 아들로 태어납니다. 어려서부터 책을 좋아하고, 음악에도 재능을 보였던 슈만은, 법학도의 길을 접고 음악가의 길로 전향합니다. 피아노 교습을 위해 라이프치히의 프리드릭 비크(Friedrick Wieck; 1785~1873)의 문하생으로 들어갑니다.

슈만을 처음 만났을 무렵의 45세된 비크.  ⓒ 위키백과

슈만을 처음 만났을 무렵의 45세된 비크. ⓒ 위키백과

저명한 음악 교사이자 피아노 판매상인 비크의 문하생 중 가장 뛰어난 연주자는 자신의 외동딸인 클라라(Clara Wieck; 1819~1896)입니다. 클라라는 아버지의 열렬한 교육과 훈련을 통해 신동 피아니스트로 이름을 날렸고, 유럽 각지에 연주 여행을 다닐 정도였습니다. 클라라는 이름을 날리고, 아버지는 수입도 늘고, 교사로서의 명성도 날렸습니다. 그런데 슈만이 딱 나타난 것입니다.

슈만과 클라라의 나이 차는 9세입니다. 20세 청년이 처음 만난 클라라는 아직 어린 아이였지요. 클라라와 슈만은 오누이처럼 지냈지요. 하지만 클라라가 16세 되던 무렵에 슈만에 대한 사랑을 느낍니다. 하지만 슈만은 클라라를 어린 동생 대하듯 합니다.

클라라는 연주 여행을 다니는 동안, 슈만은 파가니니처럼 되기 위해 과도한 연습에 매진했고, 결국 손가락을 못 쓰게 되어 연주자로서의 앞길이 막힙니다. 하는 수 없이 작곡가로 변신을 해보지만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려 들지 않아 명성을 떨치지는 못합니다.

한편으로는 생계를 위해 자신의 또다른 특기인 펜을 들어 음악 잡지를 창간하고 여러 필명으로 글도 씁니다. 잡지를 통해 젊은 음악가들의 활동을 지원하기도 하고, 신예 음악가들을 인 쇼팽이나 브람스를 등용시키기도 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음악계에서 누리는 명성과 영광은 클라라에 비하면 한참이나 쳐집니다. 그런데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집니다.

비크는 노발대발합니다. 비크는 슈만의 재능을 높이 사고, 아들처럼 대해주기는 했지만 막상 슈만이 클라라와 결혼하려 하자 극구 반대합니다. 비크가 아는 슈만은 여성 편력도 심하고, 무능한데다가, 음악가로서의 장래도 불투명하며, 성격도 과격합니다. 비크는 앞으로도 별볼일 없을 슈만이 자신의 금지옥엽인 클라라의 명성에 편승할 작정으로 어린 딸을 꼬드긴 파렴치한으로 여기는 것이지요.

사실 완전히 거짓말도 아닙니다. 인간적인 결점이 너무나도 많은 슈만이었으니까요. 슈만을 사랑하고 존경하는 클라라는 자신의 연주회도 레퍼토리에 슈만의 작품을 넣어보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슈만을 모릅니다. 무명 작곡가와 유명 여류 피아니스트 커플의 탄생, 그 자체만으로도 큰 화젯거리가 될 법합니다. 더하여 아버지의 극렬한 반대. 이렇게 음악사상 가장 열렬하고도 유명한 음악가 커플이 탄생합니다. 두 사람은 결국 부친의 반대를 극복하기 위해 법정에 탄원을 하고 마침내 법정의 명령으로 결혼에 성공합니다(1840년).

물론 비크는 딸의 결혼식에 가지도 않았고, 딸이 어려서부터 쳤던 피아노도 딸에게 주질 않아, 인연을 끊으려 합니다. 하지만 나중에는 피아노도 보내주고 화해도 해서 관계를 회복합니다.

클라라와 슈만.  ⓒ 위키백과

클라라와 슈만. ⓒ 위키백과

두 사람은 슬하에 여덟 명의 아이를 두었고 이제부터 행복하게 잘 살기만 하면 됩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슈만이 정신병에 시달립니다. 슈만은 음악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 20대 초부터 우울증 증상을 보입니다. 증상은 기분이 저조기와 고조기를 오르내리며 반복되는 양국성장애(조울증) 상태로 발전합니다. 23세에는 콜레라로 형과 형수가 죽자 큰 충격을 받아 자살을 시도합니다.

한편으로는 매독도 앓았습니다. 매독은 성병으로 시작하지만 점점 진행하면 뇌가 망가지므로 정신 이상 증상을 일으킵니다. 슈만에겐 엎친 데 덮친 격이지요. 그러면서도 슈만은 수시로 자살 충동을 느낍니다.

슈만은 30세에 결혼했는데, 결혼으로도 정신의 병은 전혀 나아지질 않습니다. 34세에 클라라와 러시아 여행을 다녀온 후부터는 상당히 악화되어 극도의 탈진, 우울, 환청, 공포감에 시달리다가 나아지기를 반복합니다. 힘든 시기에는 아무런 기운을 차리지도 못하다가 증상이 나아지면 작곡 활동을 재개하기를 반복합니다. 클라라의 격려에 힘입어 싫어했던 교향곡도 작곡합니다. 하지만 결국 43세에 이르면 오락가락했던 정신의 불안정은 고착이 됩니다. 44세에는 한겨울에 라인강에 투신했다가 주변의 도움으로 겨우 목숨을 건집니다. 이 일로 정신병원에 입원합니다. 그리고 퇴원하지 못하고 4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납니다. 마지막에는 그토록 열렬히 사랑했던 클라라도 알아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의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슈만의 정신을 좀먹은 병은 매독으로 인한 신경계 퇴행, 매독 치료제인 수은으로 인한 부작용, 그리고 원래부터 가지고 있었던 양극성 장애의 합작품이었을 가능성이 커 보입니다.

슈만은 그 누구보다도 자유 분방한 음악가였습니다. 그래서 틀에 얽매이길 싫어했는지 형식미를 중시하는 교향곡이나 소나타에서 우리에게 큰 인상을 남겨주진 않습니다. 하지만 그의 매력이 눈부시게 빛나는 작품들은 작은 소품이나, 아름다운 가곡들입니다. 그 중에서도 이 영화의 제목이 된 <트로이메라이>를 추천하고 싶습니다. 연주 시간이라야 고작 2분 30초 정도에 불과한 이 곳의 연주 장면을 이 영상(https://www.youtube.com/watch?v=qq7ncjhSqtk )과 함께 추천합니다.

호로비츠의 모스크바 음악원 연주 실황 음반.  ⓒ 박지욱

호로비츠의 모스크바 음악원 연주 실황 음반. ⓒ 박지욱

영상은 1986년 4월 20일에 모스크바 음악원 대강당에서 열렸던 블라디미르 호로비츠(Vladimir Horowitz; 1903~1989)의 모국 방문 공연장의 모습입니다. 호로비츠는 1925년에 소련을 떠나 서방에 망명했다가 60년 만에 냉전의 화해 분위기를 타고 모스크바 연주회를 가졌습니다. 여든을 넘긴 늙은 피아니스트가 연주회의 앵콜곡으로 슈만의 <트로이메라이(Träumerei; 꿈)>를 고국 동포들에게 들려줍니다.

이미 여든 살을 넘겼고, 우울증과 알코올 중독으로 고생했고, 연주 기량도 전성기에 비해 한참 쳐지는 늙고 병든 피아니스트가 고국의 동포들 앞에서 들려주는 ‘꿈’은 무슨 이야기를 담고 있었을까요? 음악을 듣는 청중들도 울고, 연주하는 호로비츠도 뜨거운 눈물을 감추지 못합니다. 그 화면을 지켜보는 필자도 가슴이 찡해져옵니다. 필자는 이 연주보다 더 감동적인 <트로이메라이>를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슈만의 트로이메라이에 부치는 그 어떤 찬사보다도 감동적인 이 장면과 함께 겨울로 가는 길목에서 시린 손을 호호 녹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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