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cember 14,2017

알려지지 않은 살인자 ‘패혈증’

치사율 높지만 사망 정확히 집계되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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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대부’를 보면 알 파치노가 위스키를 병째 들이마시는 장면이 나온다. 바로 미국의 대표적 위스키 브랜드인 ‘잭 다니엘’이다. 사탕단풍나무 숯을 이용한 여과공정 덕분에 짙은 그을음 향이 나는 것이 특징인 잭 다니엘은 유럽이 지배하던 위스키 시장에서 그 특유의 맛을 앞세워 세계적인 위스키로 떠올랐다.

창업주는 7세 때 양조장 일꾼으로 들어가 17세 때 미국 최초의 증류소로 정식 등록한 재스퍼 뉴턴 잭 다니엘이다. 술 판매가 금지된 남북전쟁 당시 북군 병사들이 몰래 숨겨줄 만큼 그의 위스키 맛은 뛰어났다.

많은 수상경력과 자선기부 등으로 이름을 날리던 잭 다니엘은 어느 날 아침 일찍 사무실에 나갔다가 금고번호가 생각나지 않자 홧김에 금고를 발로 걷어찼다. 그때 발가락이 부러지면서 후유증을 앓기 시작해 1911년에 사망했다. 사인은 바로 패혈증이었다. 그의 허무한 죽음으로 인해 미국에서는 한때 ‘일찍 일하러 가지 마세요’라는 말이 유행어가 되기도 했다.

전 세계적으로 매년 3000만명이 패혈증에 걸리며 그중 약 600만명이 사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 ScienceTimes

전 세계적으로 매년 3000만명이 패혈증에 걸리며 그중 약 600만명이 사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 ScienceTimes

요즘 우리나라에서도 이와 유사한 죽음 때문에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한식당 ‘한일관’ 대표 김 모 씨가 자신의 아파트에서 목줄을 하지 않은 이웃의 프렌치 불독에 물려 6일 만에 사망한 것. 김 씨는 개에 물린 당일 응급실에서 치료를 받고 약을 복용했지만, 5일째 되던 날 몸살 기운을 느껴 다음날 다시 응급실에 갔다가 사망하고 말았다. 김 씨의 사망 원인은 패혈증이었다.

2014년 갑작스런 복통으로 장협착수술을 받다가 사망해 의료사고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가수 신해철 씨의 사인 역시 패혈증이었으며, 고령에 지병을 앓았던 김대중, 김영삼 전 대통령 모두 패혈증으로 숨을 거두었다.

아동 및 신생아 사망원인 1위

정확한 통계는 아니지만 전 세계적으로 매년 3000만명이 패혈증에 걸리며 그중 약 600만명이 사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담배가 끼치는 해악과 비슷한 수준이다. 국내의 패혈증 진료인원은 지난해 기준으로 6만5957명(건강보험심사평가원 자료). 그중 약 31%는 사망한다고 보면 되는데, 이 같은 사망률은 심근경색이나 뇌졸중보다 훨씬 높다.

미국에서도 매년 100여 만명이 패혈증에 걸리는데, 그중 28~50%가 사망한다. 이는 유방암과 전립선암, 에이즈를 합한 사망자보다 많은 수치다. 이처럼 치사율이 높은 패혈증은 가장 많은 의료비용을 발생시키는 질병이기도 하다. 미국 병원들은 2011년 약 200억 달러 이상을 패혈증 치료에 사용해 2위인 관절염(약 50억 달러)과 큰 차이를 나타냈다.

패혈증은 병원 중환자실에서 자주 발생하는 질병이다. 면역기능이 떨어져 있거나 수술을 받은 환자일수록 패혈증에 걸리기 쉽기 때문이다. 또한 전 세계적으로 아동 및 신생아 사망원인 1위도 단연 패혈증이다. 따라서 지난 5월 세계보건기구(WHO)는 모든 회원국에 패혈증에 대한 대응전략 마련을 권고하기도 했다.

하지만 개발도상국은 물론 선진국에서도 패혈증은 잘 알려지지 않고 관심을 받지 못하는 질병으로 분류돼 있다. 최근 실시한 조사에 의하면 영국 국민 중 44%가 패혈증에 대해 알지 못한다고 답변했다. 그러는 사이 패혈증은 매년 8~13%씩 증가하고 있으며, 선진국에서도 패혈증으로 인한 사망률이 증가세를 나타낸다.

패혈증이 그동안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한 까닭 중 하나는 이 질병으로 인한 사망이 정확히 집계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영국 일간지 ‘가디언’에 의하면 패혈증으로 인한 사망 중 40%만이 사망원인으로 패혈증이 기록된다고 한다. 국내에서도 말기암 등의 중증환자들이 중환자실에서 패혈증으로 사망할 경우 패혈증 사망사례로 보고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세계 최초로 패혈증 관리법안 도입

지난 2012년 3월 미국 뉴욕주의 퀸즈 지역에 살던 12세 소년 로리 스탠턴은 학교에서 농구를 하다 팔꿈치가 긁히는 상처를 입었다. 로리는 곧 뉴욕 굴지의 병원 응급실에서 치료를 받은 후 귀가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나흘 후 로리는 사망하고 말았다. 병원에서 패혈증과 유사한 징후를 발견했지만 패혈증 진단을 내리는 데는 실패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뉴욕주는 세계에서 최초로 패혈증 관리를 위한 법안을 도입했다. 일명 ‘로리 규정’으로 불리는 이 법안은 패혈증의 조기 발견 및 치료를 위해 병원이 입증된 관행만 채택할 것을 요구한다. 이후 미국의 다른 주들도 이와 유사한 법안을 도입하기 시작했다.

패혈증 치료에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건 조기 진단이다. 현재 패혈증 치료제는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원인이 되는 신체 감염 부위를 찾고 항생제나 항진균제 투여 및 수액 공급 등으로 치료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패혈증은 초반엔 증상이 매우 미약해 알아차리기 힘들다. 또한 감염을 일으킨 병균을 파악하는 데도 기존 방식으로 48시간 이상 걸리는 등 초기 대응이 힘들다.

그런데 최근 패혈증이 악화되기 전에 신속히 포착할 수 있는 기술이 등장했다. 바로 빅데이터, 예측 분석, 실시간 분석 등의 데이터 분석 기술이 그것이다. IT 서비스 업체인 히타치컨설팅이 의료기기 제조사와 함께 시제품을 내놓은 ‘헬스패치’가 좋은 사례다.

1회용 밴드와 비슷한 이 기기는 심장 부위에 부착해 심장 박동, 체온, 에너지 소비량, 혈압, 자세 등의 데이터를 수집해 스마트폰으로 보낸다. 그러면 스마트폰에 설치된 앱을 통해 환자의 데이터가 의료 기관으로 전송된다.

의료기관의 데이터 솔루션은 그 같은 데이터를 토대로 위험에 처한 환자를 파악해 의료진에게 경고하면, 혈청 검사 등을 통해 패혈증을 조기 진단한다는 개념이다. 4차 산업혁명을 이끄는 기술이 과연 ‘알려지지 않은 살인자’ 패혈증을 잡을 수 있을지 두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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