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ctober 22,2017

살인범 누명을 쓴 의사 이야기

박지욱의 메디시네마(96) 도망자(The Fugit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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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소개드릴 영화는 미국에서 1963~67년까지 인기리에 방영된 TV 드라마를 1993년에 영화로 만든 <도망자>입니다. 우리나라도 1980년대에 같은 이름으로 공중파에 방영되어 사오십대 독자들에겐 친숙합니다(아재 감별 포인트가 될 듯 합니다!).

The_Fugitive_movie

시카고의 한 저택, 안주인이 처참하게 살해되었고 현장에서 경찰은 남편을 살인 용의자로 체포합니다. 외부 침입의 흔적도, 도난품도 없어, 아내가 남길 막대한 유산과 보험금을 노리고 남편이자 저명한 혈관외과의사인 리처드 킴벌이 강도 사건으로 위장해 아내를 살해했다는 것이지요. 어처구니가 없는 이 상황에서 킴벌은 현장에 있었고, 자신과 격투도 벌인, ‘외팔이 사내’를 찾으라고 호소하지만 경찰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습니다.

마침내 킴벌은 사형 선고를 받고 죽을 날만 기다리는 비참한 신세가 됩니다. 하지만 버스로 이감하던 중 사고가 나고, 그 틈을 이용해 킴벌은 탈주합니다. 이후로는 그를 쫓은 연방 보안관 사무엘 제라드와 킴벌의 아슬아슬한 추격전이 펼쳐집니다. 하지만 동시에 진범이 남긴 단서를 통해 킴벌 역시 범인을 추격합니다. 쫓기면서도 쫓는, 이중의 추격전이 전개됩니다.

이 영화와 드라마는 미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사무엘 셰퍼드 사건’을 소재로 삼았습니다. 아내를 살해했다는 누명을 쓴 의사가 오랜 시간 복역하고 극적으로 풀려난 이 이야기는 <도망자>는 물론이고, <헐크> 그리고 연초에 국내 공중파에서 방영된 <피고인>등 많은 영화나 드라마의 소재가 되었습니다.

셰퍼드(Samuel H Sheparrd; 1923~1970)는 클리블랜드 교외의 베이빌리지(Bay Village, Ohio)에 살던 정골(整骨) 의사(Doctor of Osteopathy, D.O.)입니다. 정골의사는 우리나라에는 없는 제도이지만 미국에서는 의사와 같은 대우를 받는 국가 공인 자격입니다. 그래서 ‘닥터’로 불리지요. 많은 자료들이 셰퍼드를 정골요법 의사 혹은 신경외과 의사로 묘사하는데, 그는 신경외과 전공의 과정도 마친 정골의사입니다.

그는 고교 때 만나 결혼에 성공한 동갑내기 아내 메릴린, 일곱 살 난 아들 샘과 함께 호반의 저택에서 단란한 가정을 이루어 삽니다. 그의 운명을 갈갈이 짓이겨버린 비극적인 사건은 1954년 7월 3일 토요일 밤에 벌어집니다.

이웃들이 놀러와서 자녁도 먹고 늦게까지 영화도 보고 되돌아간 후, 아내는 2층 침실로 올라가고, 셰퍼드는 1층 쇼파에서 잠이 듭니다. 새벽 3~4시경, 2층에서 아내의 비명 소리가 들렸고, 셰퍼드는 후닥닥 달려 올라갑니다. 현장에는 어둠 속에서 괴한이 아내를 공격하고 있었고, 셰퍼드는 괴한에게 덤벼듭니다. 하지만 괴한에게 일격을 당해 기절하고 맙니다. 얼마 후 정신을 차리고 깨어보니 아내는 이미 숨을 거둔 상태였습니다.  얼마나 황망한 일일까요. 그런데 그때 아래층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고 셰퍼드는 황급히 내려갑니다. 그러자 괴한이 집밖으로 달아나기 시작합니다.

셰퍼드는 괴한을 뒤쫓았지만 호수 근처에서 괴한을 놓칩니다. 그런데 그 순간 괴한이 달려들어 뒷통수를 가격하는 바람에 또다시 정신을 잃고 쓰러집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요? 다시 정신을 차려보니 이번에는 호수에 빠진 상태였고, 간신히 헤엄을 쳐 나와 목숨을 건집니다. 그제서야 집으로 돌아온 셰퍼드는 주변 이웃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그때가 새벽 6시였습니다.

경찰과 검시관이 와서 현장과 아내의 시신을 조사합니다. 검시관은 메릴린의 머리에만 35군데의 상처가 있다며, 범인은 분노에 미쳐 날뛰며 피해자를 공격한 것으로 확신합니다. 셰퍼드 역시 여러 군데 상처를 입었고 특히 목뼈의 부분 골절도 입은 것을 확인합니다. 셰퍼드는 괴한이 ‘머리숱이 아주 많은 사람’이라고 진술합니다.

경찰은 외부 침입의 흔적이 없는 점, 집에서 기르던 개가 짖지 않은 점, 그 소란통에 아이가 깨지 않은 점, 도난 물품도 없는 점을 주목합니다. 그리고 남편의 이야기, 특히 결정적인 순간에 두 번이나 기절했다는 이야기는 미심쩍어 보이기도 했을까요? 경찰은 괴한의 이야기는 남편이 살인 강도로 위장하기 위해 꾸며낸 것으로 단정하고, 셰퍼드를 살인범으로 기소합니다!

토요일 밤에 호숫가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 피해자는 임신 중인 여인, 더구나 범인은 의사인 남편, 강도 위장 살인 사건,… 이런 키워드 덕분에 이 사건은 전국적 관심과 공분을 불러모으기에 충분합니다. 그래서 그의 수사와 재판은 전국민의 관심 속에서 진행됩니다.

검찰은 범죄 동기가 될 만한 셰퍼드의 불륜이나 부부간의 불화를 조사합니다. 셰퍼드는 처음에는 극구 부인했다가 나중에 이를 번복하는 실수를 합니다. 때문에 그는 믿을 수 없는 사람으로 낙인이 찍힙니다. 한편으로는 검시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검시관은 현장에 ‘수술기구’를 사용한 흔적이 있다고 자신있게 밝혀 의사인 남편이 아내를 죽이고 의학 지식을 이용해 자해한 것으로 해석할 여지를 남깁니다. 나중에 밝혀진 바로는 남편에게 유리한 증거들은 채택되지 않은 정황이 있습니다.

공정하고 엄숙해야 할 재판도 엉망이 됩니다. 법정에는 전국 각지에서 몰려온 취재진들로 아수라장이 되어 피고인과 변호인 사이의 소통도 지장을 받을 정도가 됩니다. 배심원들은 취재 열기에 주눅이 들고, 한편으로는 남편을 범인으로 몰고 가는 편향적인 언론 기사의 영향을 받습니다. 하지만 판사는 이를 막는 어떠한 노력도 안 합니다. 판사 스스로가 판결을 이미 예단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나중에 밝혀집니다.

한마디로 구체적인 증거를 통한 신문이 아니라 여론몰이식, 마녀사냥식 재판이 진행되었고, 배심원들은 남편의 유죄를 의심하지 않습니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내려진 선고 공판에서 배심원들은 셰퍼드에게 2급 살인죄로 유죄 평결을 내리고, 판사는 즉시 종신형을 선고합니다. 셰퍼드는 끝까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지만 모두 소용이 없었습니다. 범죄 사건의 피해자인 가족이 가해자로 내몰리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지요. 하지만 이 비극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선고 17일 후 모친은 권총으로 자살을, 그로부터 11일 후에는 부친이 암으로 세상을 떠납니다. 셰퍼드는 수갑을 찬 채 부모님의 장례식에 참석하는 처지가 됩니다.

수감 중에도 셰퍼드는 포기하지 않고 다섯 차례나 항소를 제기합니다. 하지만 번번이 기각을 당하다가 마침내 10년 만인 1964년에 항소가 받아들여집니다. 1966년에 대법원의 재심 결정으로 증거가 보강된 재판이 이루어졌고, 편견 없는 배심원들이 만장일치로 무죄 평결을 내립니다. 12년 만에 셰퍼드는 석방됩니다.

자유의 몸이 되긴 했지만, 그는 결코 과거로 되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의사로 새 출발을 해보지만 의료 과실로 두 번이나 피소 당하고 일을 그만둡니다. 대신 프로 레슬링계에 투신합니다. 고교 졸업 무렵에는 운동 특기생으로 데려가려는 대학이 몇 군데나 될 정도로 출중한 운동 신경의 소유자였으니까요.

잔혹한 운명으로부터 얻은 슬픈 이름 ‘살인자(Killer)’를 예명으로 쓰며 40경기에 출전합니다(1969.8.~1970.4.). 자신을 레슬링 선수로 키워준 스승과 복식조를 이루어 경기에 나섰고, 해부학 지식을(!) 이용해 실전 테크닉도 개발합니다. 그리고 동료이자 스승의 딸과 재혼도 합니다. 하지만 결혼 6개월 만에 만성 알코올 중독으로 인한 간부전을 앓았고 집에서 숨진 채로 발견됩니다.

셰퍼드의 공식적인 사인은 베르니케 뇌병(Wernicke’s encephalopathy; 알코올 중독으로 뇌가 망가지는 병)이었습니다. 자유의 몸이 된 지 4년 동안, 그는 빈털터리, 알코올 중독자가 되었고, 마침내 그의 목을 조르는 잔혹한 운명에 도움의 태그를 얻지 못하고 비참하게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이제 겨우 46세였습니다.

살아남은 유일한 혈육은 아들 샘 리즈입니다. 온 가족을 비명에 보낸 그는 평생을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살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아버지에게 씌워진 불명예를 벗겨내려고 백방의 노력을 합니다. 비공개된 증거들을 찾아내고, 당시에 잘못된 수사와 검시가 있었다는 것도 밝혀냅니다. 모든 것이 아버지를 범인으로 정해놓고 증거들을 짜맞춘 것이라는 것도 알아내지요. 1997년에는 사건 현장에 남겨진 혈흔이 모친도 부친도 아닌 제3자의 것임을 확인합니다. 혈흔의 주인은 셰퍼드의 집에 유리창 청소부로 드나들던 리처드 에벌링으로 밝혀집니다.

에벌링은 혈흔에 대해 사건 2일 전에 그 집에서 유리창 청소를 하다가 손가락을 베어 흘린 피라고 말했었는데, 알고 보니 그날 유리를 닦은 사람은 따로 있었습니다. 그와 함께 일한 동료는 에벌링이 셰퍼드의 집에서 메릴린의 반지를 슬쩍하다가 발각되었고, 메릴린이 경찰에 신고하려는 바람에 앙심을 품었다고 증언도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살인을 했다는 증거는 없었습니다.

하여간 셰퍼드가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혀있는 동안에도 에벌링은 이런저런 범죄에 연루되었고, 마침내 사건 후 35년이 지난 1989년에 노파를 살해하여 종신형을 받습니다. 정확한 때를 알 수 없지만, 에벌링은 대머리였던 자신이 ‘가발’을 쓰고 메릴린을 죽였으며, 그 남편을 두 번이나 때려눕혔다는 이야기를 떠벌였다고 합니다. 그 일로 조사를 받게 되자 거짓말을 한 것이라 발뺌합니다. 그리고 1998년에 감옥에서 죽을 때까지 자신이 진범이라는 사실을 인정한 적은 없습니다. 이렇게 사건은 영원히 미제사건이 되었습니다.

진실을 밝히려는 아들 샘 리즈 셰퍼드의 노력 때문에 DNA 채취를 위해 1997년 경에 양친의 시신은 발굴됩니다. 그때 두 사람, 그리고 뱃속의 아이까지 포함해 세 사람은 모두 화장되어 유골은 한 곳에 봉안되었습니다. 아들 샘은 아버지의 삶을 송두리째 앗아간 불법적인 구금의 책임을 물어 오하이오 주정부를 고소하지만, 기각되고 맙니다. 이후로 그의 소식은 찾기 어렵습니다. 살아있다면 아들의 나이도 이제 70입니다.

영화 <도망자>는 셰퍼드 사건의 오마쥬라는 것을 굳이 숨지지 않습니다. 일단 주인공이 의사이고, 의사를 쫓는 연방 보안관의 이름이 ‘사무엘’ 제라드로 셰퍼드의 이름을 썼습니다. 영화 속 의사의 이름은 ‘리처드’ 킴벌인데 유리창 청소부의 이름이   ‘리처드’ 에벌링입니다. 병원에 잠입한 킴벌이 ‘유리창’ 블라인드 청소부로 위장한 것도 눈여겨 볼만 합니다. 영화 속 주인공이 ‘범인이 외팔이’라고 외친 것처럼 실제 주인공도 범인은 ‘범인은 머리숱이 많은 남자’라고 주장했습니다.

어쩌면 감독은 영화를 통해 망각의 깊은 늪 속에서 잠겨있는 당사자들의 이름을 계속 인양하라고 강요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드라마가 미국에 나왔던 1963~67년이라면 바로 셰퍼드가 대법원에서 재판을 받고 풀려나던 때인데, 드라마는 처음부터 셰퍼드가 무고하다는 전제로 만들어졌습니다. 현실과 드라마, 드라마보다 더 극적인 현실이 뒤섞여 있는 시대는 비단 그 시절만의 전유물은 아닌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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