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 28,2017

‘퍼스트 무버’가 중요한 게 아니다

과학서평 / 축적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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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와 비슷한 시기에 자동차 산업을 일으키려 했던 태국은 한 해 250만대의 자동차를 생산하지만, 독자적인 브랜드는 하나도 없다. 이에 비해 우리나라는 자체 브랜드로 세계 자동차 시장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한국과 태국의 차이는 무엇이었을까?

‘축적의 길’을 쓴 이정동 서울대 공대교수는 ‘독자기술 축적’이라는 도전에 나선 것을 가장 큰 이유로 꼽았다. 1983년 우리나라의 1인당 GDP가 2,000달러 수준에 불과했을 때, 현대는 독자적인 가솔린 엔진인 ‘세타엔진’을 개발하자는 아이디어를 실행에 옮겼다. 관심있게 봐야 할 것은 이 아이디어가 현실로 이뤄지기까지 10년이라는 ‘축적의 시간’이 있었다는 점이다.

최초 모델개발에 성공한 1992년 그리고 실질적인 상용화에 돌입한 1993년까지 10년 동안 터보차저 엔진개발 97개, 내구성 개선에 53개, 차형개발에 88개, 트랜스미션 개발에 26개 및 기타검사에 60개 등 324개의 테스트 엔진을 만들었다가 부수었다. 10년이라는 ‘시간’의 축적과 324번이라는 ‘시행착오’의 축적이 ‘독자엔진개발’이라는 혁신을 만들어냈다고 본 것이다.

 ‘개념설계’ 능력을 축적해야 한다

이 교수는 중간소득함정에 빠진 우리나라가 단순한 실행능력에서 탈피해서 ‘개념설계’의 단계로 도달한 몇가지 성공사례의 하나로 이것을 들었다.

서울공대 교수 26명은 2015년에 ‘축적의 시간’을 공동집필했다. 우리나라 산업이 선진국으로 도약하지 못하고 주춤하는 이유를 심도있게 분석한 책이다.  그리고 그 원인으로 우리나라 기업들이 ‘개념설계’를 하지 못한다고 분석했다.

산업현장에 대한 깊은 성찰과 경험을 바탕으로 낸 신선한 진단이었다. 그렇다면 왜 개념설계 능력이 없는 것일까? 복잡하고 다양한 원인을 압축해서 추상적으로 설명한 것이 바로 ‘축적’되지 않았다고 봤다. 전문가의 축적, 노하우의 축적, 기술의 축적, 경험의 축적 등이다.

이정동 지음 / 지식노마드 값16,000원 ⓒ ScienceTimes

이정동 지음 / 지식노마드 값16,000원

‘축적의 시간’을 기획하고 대표 저자 역할을 했던 이정동 교수가 이번에는 후속편으로 ‘축적의 길’을 냈다. 어떻게 하면 축적을 해서 개념설계를 할 수 있느냐 하는 나름대로 해법을 제시한 책이다.

축적의 길은 개념설계에 도달하는 열쇠를 4가지로 들었는데, 첫 번째는 ‘고수의 시대’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사회 모든 분야에서 진정한 전문가가 필요하다는 이야기이다.  사실 우리나라의 많은 분야에서 진정한 전문가는 매우 드물다. 자칭 타칭 전문가라고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전문가가 아닌 경우가 너무 많다.

특히 현장을 잘 모르는 공무원이나 교수나 언론인 정치인 등은 겉으로 드러난 것만 보고 분석하고 판단하는데, 현장과 분리된 상태에서 나온 진단은 탁상공론에 빠지기 쉬워 적절한 대책을 만들기 어렵다. 충분히 설명할 수 있는 것도 불확실하다고 애매하게 포장해서 호도한다.

축적이 중요하다는 이 교수의 입장에서 보면, 우리나라의 많은 전문가들이 이야기하는 ‘팔로워에서 벗어나 퍼스트 무버가 되자’는 주문같은 말은 핀트가 안 맞는다. 퍼스트 무버냐 아니냐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이 교수의 생각이다.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스케일업(scale up)할 수 있느냐 없느냐를 중요하다고 봤다.

이 책에서 경계하는 것 중 하나는 선진국과는 다른 방식으로 추진하는 중국의 사례이다. 중국은 13억 인구와 엄청난 시장의 규모, 계획적인 중국정부의 추진력에 바탕을 두고 ‘공간단축’의 축지법을 쓴다. 엄청난 물량과 제조현장을 기반으로 수없는 시행착오를 과감하게 반복함으로써 축적의 ‘시간’을 줄인다고 저자는 분석했다.

축적을 다른 말로 하면 아마도 엔지니어링의 중요성을 재확인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산업에서 아이디어나 새로운 기술이 나왔을 때 이를 실행하려면 ‘과정’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 확인하도록 해준다.

과정의 중요성을 두 번째 열쇠로 지목하고 저자는 이를 ‘스몰베팅 스케일업’ (small betting scale up)전략이라고 설명했다. 혁신은 아이디어에서 시작하지만 그 아이디어가 성공하려면 수많은 시행착오를 통과하는 지속적인 스케일업 투자가 필요하다.

포스트잇의 아이디어가 1968년에 나왔지만 실제 사업화된 것은 무려 12년이 지난 1980년이다. 간단히 말해서 12년이지, 그 기간동안의 시행착오 횟수와 들어간 시간 및 인력 등을 따지면 엄청난 시간과 비용과 노하우의 ‘축적’이 있었을 것이다.

첫번째 열쇠는 ‘전문가 시대가 와야 한다’

애니메이션 영화로 우뚝 선 픽사는 1995년 ‘토이스토리’에서 2016년 ‘도리를 찾아서’까지 17편의 장편애니메이션을 발표하면서 큰 성공을 거뒀지만, 그 사이에 안보이는 곳에서 수 백 편의 아이디어가 나왔다가 수없이 죽어 없어졌다.

요컨대 스케일업이란 수많은 수행착오라는 ‘양’과 ‘시간’을 통해서 갈고 닦은 ‘혁신’의 열매이다. 시행착오 하는 동안 수 많은 사람의 노력과 오랜 시간을 견디는 비용이 당연히 들어갔다. 반짝하는 아이디어로 하루 아침에 대박을 치는 그런 것은 없다고 보면 현실에 매우 부합한다.

그러므로 세 번째 열쇠로 ‘위험공유사회’를 든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시행착오란 실패를 뜻하므로, 실패의 위험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면 안된다. 주어진 일만 열심히 착오없이 멋지게 성공시키는 그런 일은 축적의 길에서는 없다.

축적이 성공하려면 리더가 축적이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를 해야 하므로, 네 번째 열쇠로 저자는 축적지향의 리더십을 꼽았다.

우리나라의 여러 전문가들이 보는 관점과 매우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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