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ptember 25,2017

모계로 권력세습하는 사회 있었다!

강석기의 과학에세이 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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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고고학자는 미국 남서 지역에서 선사 시대의 특정 시기 동안 아메리카 원주민 사회에 역사 시대 푸에블로 공동체보다 훨씬 심한 불평등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이 특정 시기는 1150년 전에서 880년 전 사이로, 규모나 매장 의식, 귀중품의 축적에서 동시대 다른 유적지와 구별되는 고고학 유적지가 그 증거였다.

- 켄트 플래너리 & 조이스 마커스, ‘불평등의 창조’에서

14세기 후반 중세 유럽에 등장한 필사본 ‘맨더빌 여행기’에는 아마조니아라는 섬나라가 나온다. 이곳의 주민은 모두 여자로 선거로 뽑는 여왕이 통치한다. 평소 여자들끼리 지내다 남자 생각이 나면 외국으로 나가 밀회를 즐기다 들어온다. 임신이 돼 아들을 출산하면 좀 키우다 아버지에게 보내거나 죽인다.

이 정도로 극단적인 여성사회는 전설 속에나 존재할지 모르지만 세계 곳곳에 모계사회가 있었고 지금도 있다. 다만 모계사회는 가족이 구성되는 방식이지 나라의 권력까지 모계로 세습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학술지 ‘네이처 커뮤니케이션스’ 2월 21일자에는 모계로 세습되는 권력지도층이 이끈 선사시대 사회가 있었다는 연구결과가 실렸다.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등 여러 기관의 고고학자들은 미국 남서부 차코 캐니언(Chaco Canyon)에 있는 푸에블로 보니토(Pueblo Bonito) 유적에서 발굴한 유골의 DNA를 분석해 이런 결론을 얻었다.

미국 남서부 일대에 살았던 인디언들을 푸에블로라고 부르는데 이들이 남긴 가장 거창한 유적이 차코 협곡에 있는 푸에블로 보니토로 800년에서 1130년까지 330년 동안 번성한 사회의 흔적이다. 수만 제곱미터 면적에 4층 석조 건물로 방이 650개에 이른다. 사진을 보면 우리가 생각하는 전형적인 북미인디언들의 거주지(천막)와 규모가 다름을 알 수 있다. 참고로 지금부터 ‘불과’ 1000년 전이지만 이들은 문자가 없었기 때문에 ‘선사 시대’다.

미국 남서부 뉴멕시코주 차코 캐니언에 자리한 푸에블로 보니토 유적의 전경이다. 4층 규모의 석조 건물로 모두 650개의 방이 있다.  ⓒ James Q. Jacobs

미국 남서부 뉴멕시코주 차코 캐니언에 자리한 푸에블로 보니토 유적의 전경이다. 4층 규모의 석조 건물로 모두 650개의 방이 있다. ⓒ James Q. Jacobs

어머니와 딸, 할머니와 손자 관계도 밝혀져

1896년 고고학자들은 33호 방이라고 명명한 공간에서 주검 14구를 발견했다. 이 가운데 두 구는 널빤지 마루 아래 놓여 있었고 나머지 열두 구는 위에 있었다. 따라서 33호 방은 묘지인 셈이다. 그런데 이들 주검 주변에는 터키석으로 만든 구슬과 펜던트, 소라고둥 나팔, 조가비 팔찌 등 장신구 수만 점이 함께 매장돼 있었다. 푸에블로 보니토의 규모나 이들 장신구로 볼 때 33호 방에 매장된 사람들은 당시 사회의 지배층이었을 것이다.

미국의 고고학자 켄트 플래너리와 조이스 마커스는 2012년 펴낸 책 ‘불평등의 창조’에서 푸에블로 보니토의 유물을 바탕으로 당시 사회를 이루던 인디언들이 그 전후에 그 지역에 살았던 어떤 사회보다 불평등이 심했다고 추측했다. 즉 계급사회였다는 말이다.

펜실베이니아대 더글라스 케넷 교수 등 고고학자들은 푸에블로 보니토 사회의 지배층 구조를 알아보기 위해 33호 방에 잠들어있던 주검의 DNA를 분석해보기로 했다. 그 결과 모두 아홉 명의 미토콘드리아 게놈을 분석했고 이 가운데 여섯 명은 핵 게놈도 분석했다. 그리고 방사성동위원소를 분석해 연대도 추정했다. 과연 이들은 권력을 세습했을까? 만일 그랬다면 부계로 이어졌을까 모계로 이어졌을까?

아홉 명의 미토콘드리아 게놈을 비교한 결과 모두 동일했다. 미토콘드리아는 정자에는 없고 난자에만 있으므로 이는 아홉 명 모두가 단일 모계 혈통이라는 말이다. 즉 푸에블로 보니토 유적은 모계로 세습되는 권력층이 지배하는 사회가 남긴 것이다.

한편 핵 게놈을 분석한 결과 남녀가 각각 세 명이었다(남성에게만 있는 Y염색체의 서열 유무로 판단). DNA친자확인처럼 염기서열을 비교한 결과 이 가운데 한 쌍은 어머니와 딸로 추정됐고 다른 한 쌍은 할머니와 손자로 추정됐다. 연구자들은 이 결과를 바탕으로 가계도를 재구성했다.

중미의 마야 문명이나 남미의 잉카 문명과는 비교가 안 되지만 북미에서는 상당한 규모였던 푸에블로 보니토 사회는 그러나 12세기 들어 급격히 쇠락하다 사라졌다. 아마도 극심한 가뭄이 계속돼 더 버티지 못하고 떠나버린 것으로 보인다.

수백 년이 지난 뒤 이 일대에 터를 잡은 인디언 부족의 상당수도 모계사회였다. 그러나 권력의 세습을 막고 재산의 축적을 억제해 사회의 불평등을 많이 완화했다고 한다. 이번 푸에블로 보니토 주검 DNA 분석은 권력과 부의 추구가 수컷들의 전유물만은 아님을 보여준다.

푸에블로 보니토 33호 방에서 발견된 주검 열네 구 가운데 아홉 구에서 미토콘드리아 게놈을 분석하는데 성공했다. 그 결과 모두 동일하게 나와 이 사회의 권력이 모계로 세습된 것으로 확인됐다. 게놈 분석 결과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가계도다.  ⓒ 네이처 커뮤니케이션스

푸에블로 보니토 33호 방에서 발견된 주검 열네 구 가운데 아홉 구에서 미토콘드리아 게놈을 분석하는데 성공했다. 그 결과 모두 동일하게 나와 이 사회의 권력이 모계로 세습된 것으로 확인됐다. 게놈 분석 결과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가계도다. ⓒ 네이처 커뮤니케이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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