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nuary 17,2017

소설가 이미륵은 ‘동물학 박사 1호’

전공 그만두고 독일서 문필가로 일생 마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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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압록강은 흐른다’를 아시나요? 이 소설을 쓴 이미륵(1899~1950)을 아십니까? 이 이미륵이 우리나라 동물학 박사 1호라는 사실을 아시나요?

2016년은 이미륵의 자전적 소설 ‘압록강은 흐른다’가 발행된 지 꼭 70년이 되는 해이다.

이미륵 박사(1948년) ⓒ 이미륵박사기념사업회

이미륵 박사(1948년) ⓒ 이미륵박사기념사업회

이 책은 한국인에 의해 최초로 독일어로 쓰여진 한국의 풍습과 문화 등을 소개하는 자전적 소설로 1946년 출판돼 나오자 마자 독일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다.당시 독일의 한 잡지는 이 소설을 ‘올해 가장 훌륭한 독일어로 쓰여진 책’이 외국인에 의해 출간됐다고 평가했고, 수많은 독일 교과서에 글이 인용되어 실릴 정도였다.

일제 강점기에 독일에 망명해 그곳에 머물면서 독일어로 글을 썼던 이미륵은 한국인 동물학 박사 1호였다. 그는 독일에 건너가 어렵게 동물학 박사 학위를 받았지만 학위를 받고 난 뒤에 동물학 분야의 연구를 계속하지 않고, 글을 쓰는 문필가로 생을 마쳤다.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 박성래 교수는 이미륵에 대해 “한국인으로 역사상 첫 동물학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은 이의경(李儀景)‘이라고 쓰고 있다.(‘인물과학학사 ①’, 408~413쪽, 2011년) 바로 이 이의경이 이미륵의 본명이다.

이의경은 이미륵의 아명이자 필명. 그는 1950년 3월 위암으로 사망할 때까지 독일에서 문필가로 활동하면서 ‘유창하고 간결한’ 독일어를 구사하면서 한국의 풍습과 인정, 문화를 그린 작품을 발표해 독일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그가 ‘압록강이 흐른다’로 주목 받은 뒤에는 뮌헨대학 동양학부 외래교수로 초빙되어 한국학과 동양철학을 강의하면서 교육자로서의 삶도 살았다.

그는 왜 각고의 노력 끝에 박사학위를 취득한 동물학 분야에 정진하고 않고 글 쓰는 일을 직업으로 삼고 살아갔을까. 엄혹한 시대적 상황이 동물학 공부를 계속하게 그를 놔두지 않은 걸까.

1917년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한 그는 1919년 3‧1운동에 참여하면서 일본 경찰에 쫓기는 몸이 돼 중국 여권으로 독일 유학을 떠나는 길을 선택하게 됐고, 몇 달간의 긴 기다림 끝에 1920년 독일에 도착하게 된다.

그는 경성의전에서 공부한 것을 계속 살리기 위해 처음 의과대학에 들어갔고 2군데 대학을 거쳐 마침내 뮌헨대학에서 동물학으로 전공을 바꾸어 박사학위를 받는다.

그의 동물학 박사 학위 논문은 국립중앙도서관에 진열되어 있다. 논문 제목은 ‘변칙(비정상) 조건 하에서 플라나리아 재생 시 규제적 현상(Regulative Erscheinungen bei der Planarienregeneration unter anormalen Bedingungen)’ (1928)이다. 비정상적인 조건에서 플라나리아가 어떻게 재생되는지를 실험 관찰한 내용이다.

당시 독일 내 사정이 어려웠고, 조선으로 귀국할 수도 없는 처지라서 그랬는지, 동물학박사 학위를 기반으로 한 직업을 얻거나 그와 관련한 연구활동을 계속하지 않았다.

왜 그는 각고의 노력 끝에 얻은 동물학박사 학위를 밑바탕으로 한 활동을 하지 않았을까?

이미륵박사기념사업회의 박균 회장은 이에 대해 “이미륵 박사가 이 점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기술해놓은 글이 남아 있는 것은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의 자연과학에 대한 인식이나 세계관 등을 살펴봄으로써 어느 정도 그에 대한 이유를 추론해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미륵의 박사학위 논문 표지. 이미륵박사의 동물힉 박사 학위 논문은 국립중앙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이미륵의 박사학위 논문 표지. 이미륵박사의 동물힉 박사 학위 논문은 국립중앙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 이미륵박사기념사업회

박성래 교수는 “이미륵의 일생은 한국 과학사의 중요한 한 단면을 보여준다”면서 “40년이나 주권을 강탈되는 특수한 경험을 해야 했던 조선인으로서는 ‘최초의 동물학 박사’라는 귀한 자격을 갖추고도 귀국해 활동할 수 없는 그런 시대적인 아픔”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같은 책, 409쪽)

이 문제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 그 전 단계로 왜 그는 의과대학을 다니다가 의사가 되는 길을 포기하고 동물학으로 전공을 바꿨을까 하는 궁금증도 일어난다. 그 이유는 ‘이미륵 평전’ 314쪽에 밝혀져 있다.

1930년대에 이미륵에게 서예지도를 받았던 귄터 데본 교수(하이델베르크 한학과)의 1973년 증언이다. 데본 교수가 ‘왜 의학공부를 중단하였는지’ 물었더니 “의대 재학 시절 수술실에서 환자가 사망한 일이 있었어요. 그때 의료진이 환자의 죽음에 대해 별로 슬퍼하는 기색도 없이 냉정하게 돌아서는 것을 보고, 의학이라는 학문의 냉혹성에 회의를 느낀 적이 있어요”라고 말한 적이 있다고 한다.

동물학 전공으로 바뀌게 된 점은 ‘그래도 압록강은 흐른다’에서 일부 이유를 추론해볼 수 있다. 이 책의 387쪽에 “나(이미륵)는 머리가 혼란한 채로 걸어갔다. 둘이서 우리 집 앞까지 와서 작별 인사를 할 때 나는 그(중국인 친구)에게 생물학을 한번 시도해보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속으로는 이 학과도 오래 계속하지 못하리라고 나는 믿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 대화에서 볼 수 있듯 이미륵은 주변의 충고로 동물학을 전공하겠다는 생각을 하지만 마지막 대목에서 읽을 수 있듯 그는 이 학문에 대한 회의도 마음 속에 품고 있음을 볼 수 있다.

1935년 독일 제자들에게 서예 지도를 하는 이미륵. ⓒ 이미륵박사기념사업회

1935년 독일 제자들에게 서예 지도를 하는 이미륵. ⓒ 이미륵박사기념사업회

아무튼 그는 중국인 친구의 강력한 조언으로 동물학 공부를 시작하게 된다. 이미륵은 중국인 친구와 대화를 나눈 뒤 연구소 주임 교수를 만나 “나는 기억력도 나쁘고 또 실제적인 것보다는 이론적인 데 더 치우치는 경향이 있지만… 생물학부에서 박사 학위를 얻고 싶다”고 얘기했다. 이후 그는 “식물학을 제1부전공, 인류학을 제2부전공”으로 정하고 실습에 참여하는 연구과정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가 왜 동물학 연구를 더 이상 하지 않았는지에 대해서는 더 이상 명쾌한 설명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그는 아마도 의학이니 동물학이니 자연과학보다는 더 폭넓게 인간을 이해할 수 있는 길을 찾았는지도 모른다.

그가 동물학 연구를 계속하지 못했던 점에 대해 박성래 교수는 “해방 전까지 일본에서 생물학과를 졸업한 조선인은 일본에 유학한 6명뿐”이라며 “그만큼 조선의 생물학은 빈약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미륵의 동물학 박사학위는 한국 생물학사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설명했다.

박 교수는 “이미륵이 동물학자 이의경으로 살지 못하고 이미륵이란 문필가로 일생을 마친 것은 한국 과학사의 비극의 한자락”이라고 안타깝게 표현했다.

이미륵의 독일어 작품들과 우리말로 번역된 작품들. ⓒ 이미륵박사기념사업회

이미륵의 독일어 작품들과 우리말로 번역된 작품들. ⓒ 이미륵박사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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