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vember 20,2017

히데키 앞에서 운 아인슈타인

과학서평 / 천재와 괴짜들의 일본과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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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대해 나쁜 감정을 가진 사람이라도 이 책을 읽으면 일본 과학자들은 달리 보게 될 것 같다. 일본 과학자들이 잇따라 노벨상을 수상하는 가운데 일본과학자들의 인간적인 면모를 잘 들여다볼 수 있는 책이 나왔다.

‘천재와 괴짜들의 일본과학사’이다. 불과 150년의 과학역사를 가진 일본이 어떻게 과학분야에서만 22개의 노벨상을 수상하게 됐을까?

제목을 다소 우스꽝스럽게 지었지만, 이 책은 아주 진지한 책이다. 노벨상을 받은 과학자는 물론이고, 19세기 말 일본 역사를 장식한 과학자에 대해 깊이 있고 자세한 내용을 잘 담았다.

전쟁후 유카와 히데키가 프린스턴을 방문했을 때

이 이야기의 중심에는 일본과학자로서는 처음으로 1949년 노벨상을 받은 유카와 히데키가 자리 잡고 있다. 히데키에 관한 내용 중 관심을 끄는 것은 2차 대전 이후 그러니까 미국이 일본에 원자폭탄을 투하한 다음, 미국 프린스턴을 방문해서 아인슈타인과 오펜하이머 박사와의 만남에 대한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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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9월 유카와는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의 초청을 받아 미국으로 갔다. 첫 번째 이유는 그의 유명한 이론인 중간자 이론 때문이었다. 두 번째는 14년 전 유카와의 중간자 이론의 논문 게재를 거절했던 오펜하이머가 미안한 생각에 도우려는 마음이 있었다. 오펜하이머는 유카와의 중간자 이론을 노벨상 후보로 적극 추천했다.

유카와 부부가 프린스턴에 도착했을 때 가장 먼저 아인슈타인이 부부를 찾았다.

“내가 원리를 발표했기 때문에 원폭이 개발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많은 시민을 살상했습니다. 내 책임은 매우 큽니다. 부디 용서해주십시오.”

‘인류역사상 가장 위대한 학자가 몇 번이나 사과하면서 눈물을 흘렸다.’고 이 책은 기록했다. 아인슈타인은 2차 대전 후 미국정부와 관계를 끊고 평화운동을 벌였다.

일본은 과학의 전통이 확실히 우리보다 오래됐다. 대한민국이 일제 치하에서 인재를 양성할 수 없는 상황이었을 때 일본 과학자들은 미국으로 독일로 영국으로 과학공부하러 떠났다. 일본 과학자들이 발표한 이론은 유럽 및 미국 과학자들에게도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유카와 히데키를 존경해서 물리학자를 꿈꿨던 지은이 고토 히데키(後藤秀機)는 일본 현대과학의 시작을 1868년 후쿠자와 유키치가 쓴 훈몽궁리도해(訓蒙窮理圖解)에서 찾는다. 일본 최초의 과학입문서인 이 책은 1872년 소학교의 이과교과서로 사용됐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유럽 사절단으로 갈 때 서양 기술을 도입해야 한다며 영국 공학자를 추천해줄 것을 요청햇다. 그래서 스코틀랜드 글래스고 대학의 윌리엄 톰슨 교수라는 물리학 거장을 만났고 그 뒤 많은 스코틀랜드 과학자와 기술자들이 일본을 방문했다. 유럽의 과학을 제대로 받아들이자는 이런 움직임이 엄청난 토양으로 작용했다.

세균학자 기타사토 시바사부로는 1885년 독일로 유학가서 세계 최고인 베를린 대학 로베르트 코흐 연구실에서 공부한 뒤 일본으로 돌아와 전염병연구소를 세웠다. 이 연구소의 명성은 유럽에도 높아서 제1회 노벨상은 기타사토가 받아야 했다는 의견마저 나올 정도이다.

저자는 러일전쟁에서 가장 많은 병사를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은 비타민 부족이라고 분석했다. 해군 군의관인 다카기 가네히로는 각기병을 치료하려면 쌀밥이 아닌 보리밥을 먹어야 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러나 군 지도자는 보리밥을 먹어야 각기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다카기의 조언을 무시하고, 장병들에게 보기 좋은 쌀밥을 제공했다. 결과는 처참했다.

러시아 군은 괴혈병으로 쓰러졌는데, 가지고 있던 콩으로 콩나물을 길러 먹었으면 비타민 C가 공급돼 고칠 수 있는 병이었다. 일본군의 경우, 군 지도자가 쌀밥을 고집하는 바람에 비타민B 부족으로 발생하는 각기병이라는 보이지 않는 무기에 사망자를 많이 냈다. 청일전쟁 당시 뤼순 전투에서 전사자가 15,400명이었지만, 러일전쟁에는 27,800명이 각기병으로 죽었다.

과학자들의 비애는 가장 최근에도 있었다. 일본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 폭발사고 때 양심있는 과학자들은 몹시 괴로워했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나자 곡기 끊고 세상 떠나 

니시와키 야스시(西脇安) 교수는 1954년 미국이 태평양 비키니 섬에서 실시한 수소폭탄 실험의 위험성을 전세계에 알려 무분별한 해상 실험을 저지하는데 큰 역할을 한 인물이다. 니시와키 교수는 어느 순간 일본 관리들이 원자력발전소에 대한 안전조치를 소홀히 하는 것이 엄청난 충격과 분노를 느꼈다. 2011년 후쿠시마에서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고가 났을 때 일본 정부의 잇단 거짓말과 국민들의 안전을 소홀히 하는 조치에 그는 절망했다.

이 책에 따르면 니시와키 교수는 텔레비전 뉴스를 보다가 “피난 구역은 20킬로가 아닌 50킬로미터 까지 하지 않으면 안 돼”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그는 식사를 거부하기 시작해서 후쿠시마 사고가 난 뒤 16일 후 9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아마도 이 같은 과학자들의 ‘무사정신’이 일본 과학계를 그렇게 빨리 세계적인 과학강국으로 일어서게 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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