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소는 없어도 우리 눈에 다채로운 빛깔로 보이는 오팔(Opal)보석. 이 보석은 표면의 규칙적인 나노 구조로 인해 특정 파장의 빛만 반사하기 때문에 우리 눈에 다양한 색깔로 보인다. 이처럼 나노 구조에 의해 빛의 선택적인 반사가 일어나는 물질을 일컬어 ‘광결정’ 이라고 한다.
국내 연구진이 차세대 광학소재로 주목받는 광결정의 상용화를 앞당길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해 주목받고 있다. 카이스트 생명화학공학과 고 양승만 교수 연구팀이 광식각 공정을 이용해 미세패턴 기술을 개발한 것이다. 고 양승만 교수는 콜로이드 및 유체역학 분야의 대가로 불리던 과학자다.
밝은 곳에서도 디스플레이 사용 가능
기존의 LCD와 같은 디스플레이는 화면을 밝히기 위해 백라이트 유닛(backlight unit)을 사용한다. 즉 패널 뒤편에 형광등을 부착하면 그 빛이 패널에 존재하는 RGB 픽셀을 투과해서 나오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밝은 광원 아래에서는 투과되는 빛이 상대적으로 약해 화면이 잘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이번 고 양승만 교수팀은 백라이트에 의지하는 것이 아닌, 태양광과 같이 외부에 존재하는 빛의 반사로 화면을 표시할 수 있는 기술 과정 중 중요 부분에 대한 공정을 개발했다. 이럴 경우 외부 빛이 밝을수록 더욱 선명한 화면을 표시할 수 있다. ‘밝은 빛에서는 노트북을 사용할 수 없다’는 말도 머지않아 옛말이 될 수 있다.
“저희 연구팀이 개발하고자 하는 디스플레이는 외부에 존재하는 빛이 패널로 입사하게 되고 그 빛이 반사함에 따라 화면을 표시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디스플레이를 만들기 위해서는 RGB를 반사할 수 있는 픽셀이 필요해요. 이번 연구에서는 그러한 RGB 반사 픽셀을 만들 수 있는 공정을 개발한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반사형 디스플레이는 외부광원의 반사를 통해 디스플레이가 되기 때문에 밝은 조명 아래서 더 선명한 화면 표시가 가능합니다. 또한 백라이트 유닛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전력소비가 훨씬 더 감소될 수 있죠. 특히 휴대용 디바이스의 경우 베터리 수명을 크게 향상 시킬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해당 기술을 이용하면 별도의 광원을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한번 충전으로 디스플레이를 수일 이상 사용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사실 그동안 광결정을 인공적으로 제조하기 위한 과학자들의 노력은 매우 컸다. 하지만 대부분 덩어리 형태로 만들어 제작 효율성이 떨어졌으며 형성된 구조의 기계적 안정성이 낮아 상용화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연구팀은 오팔 보석이 갖고 있는 나노 구조를 모방해 적용하기로 했다. 자외선에 의해 광경화가 일어나는 물질 위에 오팔보석과 동일한 나노 구조로 유리구슬을 배열하고 고분자 물질 내부로 함침한 것이다. 자외선을 미세영역에 선택적으로 노출한 다음 나머지 영역을 현상해내는 광식각 공정을 이용해 광결정을 미세한 패턴으로 제조하는데 성공했다.
“광결정은 빛의 파장의 절반수준에서 규칙적인 나노구조를 형성함으로써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한 규칙적인 구조를 만들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이 균일한 크기의 나노입자를 적층하는 것이죠. 이 같은 연구는 오랫동안 진행돼 왔지만 규칙적인 배열을 갖는 나노입자들이 기계적으로 취약해 부서지기 쉽고 부서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원하는 모양을 갖도록 패턴화하는데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자외선에 노출된 영역에서 나노입자만을 선택적으로 제거해주면 입자가 있던 자리에 공기주머니가 생긴 형태의 규칙적 나노 구조가 형성된다. 이러한 구조는 연속적인 형태를 띠고 있어 기계적으로 높은 안정성을 갖는다. 이를 통해 기계적 안정성을 확보함과 동시에 미세패턴을 만들 수 있는 것이다.
고 양승만 교수의 생전 마지막 논문
이번에 개발된 광결정 미세패턴은 햇빛 아래에서도 선명하게 볼 수 있는 차세대 반사형 디스플레이의 핵심 소재로 사용될 전망이다. 이번 연구의 공동저자인 KAIST 생명화학공학과 김신현 교수는 “반도체 공정 기술을 광결정 패턴기술과 결합해 광결정의 실용화 기술 확보가 가능할 것”이라며 “향후 전력소모가 매우 낮은 차세대 반사형 컬러 디스플레이 소자를 구성하는 핵심 광학소재로 사용될 수 있다”고 연구의 의의를 밝혔다.
“이번 연구를 시작하기 전에도 광결정에 대한 연구를 꾸준히 진행해 오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연구실 동료가 유리구슬 입자가 고온에서 자발적으로 고분자 필름 내부로 함침돼 들어간다는 것을 실험적으로 발견하게 됐죠. 당시에는 그러한 과정이 단층의 유리구슬에만 적용된다고 생각했는데 다수의 층을 갖는 유리구슬 결정구조에도 적용될 수 있고 함침과정에서 나노구조가 유지된다는 것을 실험적으로 알게 됐어요. 같은 원리가 감광성 고분자 필름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면 광결정을 미세패턴화하는 곳에 이용할 수 있을 거라 생각돼 연구를 시작하게 됐습니다.”
해당 연구는 지난 2009년 초에 시작해 2012년까지 총 4년간 지속적으로 진행됐다. 연구를 시작하게 된 것은 당시 고 양승만 교수가 이끌던 창의사업단인 광자유체집적소자연구단에서 2단계 연구를 시작하던 시점이다.
“당시 양승만 교수님께서 이 연구에 많은 관심을 갖고 계셨어요. 2012년까지 지속적으로 논의하며 연구를 발전시켜 나갔죠. 2013년 초에는 양승만 교수님과 함께 해당 연구를 논문으로 정리했고 2013년 9월 17일에 학술지 ‘어드밴스트 머티리얼(Advanced Materials)’ 지에 투고했습니다. 논문을 투고하고 9일 뒤에 양승만 교수님께서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셨어요. 그로 인해 해당 논문이 교수님 생전에 투고한 마지막 논문이 됐습니다.”
해당 연구는 앞으로 당장 반사형 컬러 디스플레이를 만들 수 있는 공정에 사용될 수는 없다. 김신현 교수는 “일부 기사는 당장이라도 세상을 바꿀 것 같은 디스플레이가 나온 것처럼 보도했지만 아직은 어디까지나 기초연구 단계”라며 “본 연구가 더욱 발전하고 전 세계 과학자들에게 영감을 줄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고 이야기 했다. 그럴 경우 단독연구는 아닐지라도 세계에 있는 과학자들과 함께 조금씩 광결정 기반의 반사형 디스플레이를 현실화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연구는 기존의 광결정 형성 방법을 발전시켜 좀 더 실용적인 광결정 형성을 가능케 했다는 점에 의의가 있어요. 기존방법으로는 힘들었던 광결정 미세패턴화와 구조적 안정화와 높은 반사율 등을 동시에 달성할 수 있었고, 이러한 부분들이 광결정의 실용화에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됩니다.”
앞으로 광결정 형성 공정 및 디스플레이 소자 개발에 좀 더 노력을 기울일 예정이라는 김신현 교수. 그에게는 아직까지도 실용화에 있어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많이 남아 있다.
“예를 들면 균일한 나노입자를 규칙적인 결정 구조로 형성하는 과정에서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데 이를 획기적으로 단축시킬 수 있는 공정을 개발하려고 하죠. 이러한 연구 개발이 추가된다면 조금은 더 실용화에 접근하는 길이 될 것 같습니다.”
한편 고 양승만 교수는 콜로이드 및 유체역학 분야의 세계적인 대가로서 지난해 9월 불의의 의료사고로 고인이 되기 직전까지 연구를 진행해왔다. 저명학술지에 193편의 논문을 게재하기도 했다.
2007년에 듀폰 과학기술상, 2008년 올해의 KAIST인상, 2009년에는 경암학술상을 수상한 바 있으며 고인이 된 후 2014년 3월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연구진들은 고인을 기리며 이번 연구 결과를 고 양승만 교수에게 헌정했다.
- 황정은 객원기자
- hjuun@naver.com
- 저작권자 2014-05-19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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