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3년 일본 은행의 총재 시부자와 에이이치가 당시 인천수산시험장의 정문기를 찾아왔다. 정문기는 우리나라 어류 연구의 대가였으며, 그를 찾아온 시부자와 역시 일본의 유명한 어류 이름 전문가였다.
시부자와가 정문기 선생을 찾아온 이유는 순한자로 쓰여진 124쪽짜리의 조선시대 책을 일본어로 번역해달라는 부탁을 하기 위해서였다.
정문기는 부탁대로 일본어 번역을 완성했으나, 마침 그때 미군이 도쿄를 공습하면서 책으로 출판되지는 못했다. 그로부터 약 30년 후인 1974년 이 책은 한국어 번역판으로 출간되었다. 이 책이 바로 정약전이 흑산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며 저술한 ‘현산어보’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해양생물학서로 알려진 ‘현산어보’는 흑산도 근해에 서식하는 해양생물을 상위범주와 하위범주로 분류한 수산학 및 해양생물학 백과사전이다. 해양생물 55류 226종을 망라했는데, 어류는 물론이고 해충(海蟲), 해금(海禽), 해수(海獸), 해초(海草)까지 연구대상으로 삼았다. 이는 조선시대를 통틀어 가장 광범위하고 가장 많은 양이었다.
지난 2012년 조선시대의 실학자 정약전은 저서 ‘현산어보’가 우리나라 해양 생물학 발전에 크게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 헌정 대상자로 선정됐다.
정약용의 형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 정약전은 1758년 경기도 광주에서 진주목사를 지낸 아버지 정재원과 어머니 해남 윤씨의 3남 1녀 중 첫째로 태어났다. 정재원은 부인이 2명이었는데 정약전의 어머니인 해남 윤씨는 둘째 부인으로서, 이복형으로 정약현이 있으며 동복 동생으로는 정약용과 정약종이 있었다.
신유박해 이후 흑산도로 유배돼
1776년 호조좌랑이 된 부친을 따라 서울로 오게 된 정약전은 권철신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권철신은 경전에만 매달리는 해석에서 벗어나 실천 중심의 독창적인 해석을 시도했던 대학자로서 성호 이익의 수제자이기도 했다. 때문에 정약전은 성호 이익을 평생의 스승으로 모셨는데, ‘현산어보’를 저술한 것도 이익의 영향을 약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익이 저술한 ‘성호사설’을 보면 그가 안산 바닷가에 살며 생물을 관찰했던 기록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1783년 사마시에 합격해 진사가 된 정약전은 과거에는 별로 뜻이 없다가 정약용이 벼슬에 오른 이후인 1790년 증광별시에 응시해 병과로 급제했다. 이후 성균관 전적을 거쳐 병조좌랑을 지내다가 1798년에는 임금의 명으로 ‘영남인물고’를 편찬하기도 했다.
서양 학문에 관심이 많았던 이벽, 이승훈 등의 남인 인사들과 친하게 지내던 정약전은 그들을 통해 천주교를 받아들였다. 특히 맏형 정약현의 처남이던 이벽은 정약전과 정약용 형제에게 천주교 교리를 직접 전한 이로 알려져 있다.
그 후 두 형제는 천주교와 거리를 두었으나 정조가 사망한 이후 순조를 대신해 수렴청정을 하던 정순왕후가 천주교 금압령을 내리면서 일어난 신유박해 때 반대파들의 공격을 받고 결국 정약전은 흑산도로 정약용은 전남 강진으로 각각 유배되었다.
정약전이 반대파의 공격을 받은 것은 그의 유별난 서양 과학에 대한 탐구심도 한몫했다. 1790년 그가 증광별시를 볼 때 오행(五行)에 관한 시험문제가 출제된 적이 있었다. 그때 정약전은 이에 대한 답안을 서양의 4원소설을 인용해 써냈으며 병과로 장원급제했다. 그런데 바로 이 문제와 답안 때문에 그는 훗날 보수파의 탄핵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유배를 떠난 정약전은 흑산도보다 약 40㎞ 정도 육지에서 더 가까운 우이도에 일단 정착했다. 섬으로 들어가면서 그는 호를 매심(每心)에서 손암(巽庵)으로 바꿨다. 손암은 암자로 홀연히 들어간다는 뜻으로서, 당시 그의 심정이 어떠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가 유배된 지 며칠 후 우이도 주민 문순득이란 자가 근처의 다른 섬으로 홍어를 사러 갔다가 폭풍을 만나 망망대해를 표류하게 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 후 문순득은 오키나와, 필리핀, 중국 등지를 거쳐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는데, 정약전은 그의 경험담을 정리해 ‘표해시말’이란 책을 펴냈다.
사촌서당에서 현산어보 집필
우이도에서 몇 년 기거하던 그는 1807년 흑산도의 사리마을로 거처를 옮겼다. 흑산도의 초목 중 약 95%는 상록수인데, 그중의 90%는 동백이다. 때문에 가까이서 보면 사시사철 푸르지만, 조금만 벗어나도 섬 전체가 검푸르게 보이고 더 멀리 나가면 검게 보이므로 흑산도(黑山島)라는 이름이 붙었다.
흑산도의 흑(黑)은 어두움의 상징 같은 뜻이어서 외지인에게는 흑산도라는 이름 자체만으로도 어둡고 두려운 느낌이 들기 마련이었다. 따라서 정약용은 그의 형이 있는 흑산을 일컫을 때 항상 ‘현산(玆山)’이라 쓰곤 했다.
여기서 ‘玆’ 자는 ‘검다’라는 뜻으로서 ‘자’ 또는 ‘현’으로 읽힌다. 정약전의 저서가 처음에 ‘자산어보’로 널리 알려진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하지만 한문학자 임형택 교수 등에 의해 검을 현(玄) 자를 두 개 붙여 쓰는 ‘玆’ 자는 현으로 읽어야 한다는 주장이 강력히 대두되었다. 또 ‘玆’이 대명사일 때는 ‘자’로 독음되지만 검다는 뜻일 때는 ‘현’으로 읽어야 한다는 의견이 있는 것을 감안해 여기서는 ‘현산어보’로 통일하기로 한다.
6척 거구였던 정약전은 흑산도에 들어와서도 마을 사람들과 술을 함께 마시는 등 스스럼없이 어울려 지냈다. 또한 때때로 어부들을 따라 고깃배를 타고 물고기를 잡으러 다니기도 했다. 때문에 흑산도 주민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정약전을 따르며 격의 없이 지냈다.
사리마을에서 사촌서당(沙村書堂)이라 불리는 서재를 열어 아이들을 가르치던 정약전은 매우 중요한 인물 한 명을 만나게 된다. 바로 장창대라는 주민으로서, 정약전의 해양생물 연구에 도움을 준 사람이다.
정약전에 의하면 장창대는 가난해서 책을 많이 가지고 있지는 않았지만 집안에 틀어박혀 책 읽는 것을 좋아하고 성격이 꼼꼼해서 보고 들은 것에 대해 깊이 관찰하는 인물이었다. 정약전은 장창대에게서 얻어들은 정보를 정리하고 독자적인 연구를 더해 ‘현산어보’라는 책을 완성시켰다.
그는 이 책에서 해양생물의 명칭, 크기, 형태, 생태, 맛, 어획방법, 이용법 등 수산학 정보를 놀라울 정도로 세밀하게 기록했으며, 이를 토대로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131종이나 되는 해양생물의 이름을 직접 지었다. 이 같은 분류와 작명은 이전의 해양생물 연구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 즉, 정약전은 수산학 및 해양생물학을 체계화한 최초의 조선 유학자였던 것이다. (하편에서 계속)
- 이성규 객원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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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작권자 2014-06-13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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