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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화학섬유계의 선구자 김동일 /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 (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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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을 길러 한 달에 알을 1000개씩 낳게 하면 엄청나지 않을까.” 이것은 1908년 3월 9일 평안남도 강서군 성암면 남양리의 약 80여 가구 되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아이의 소박한 꿈이었다. 장남으로 태어난 그 아이는 농민이었던 부친의 각별한 교육열에 힘입어 어릴 때부터 서당에서 한문을 수학하고 평양으로 가서 보통학교를 거쳐 평양공립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거기서 그는 새로운 꿈을 갖게 됐다. 화학 참고서의 서문에 나온 다음과 같은 문구를 읽은 것이 계기였다. “화학이란 일상생활과 밀접한 관련성을 가진 학문이다. 예컨대 아침에 일어나서 세수를 할 때 비누와 치약이 필요하다. 창문에는 유리를 끼워야 한다. 집 짓는 데는 시멘트가 있어야 한다.”

그 문구대로 그는 기술자가 되어 조그만 비누공장이나 유리병 공장 같은 것은 운영해 보겠다는 꿈을 지니게 됐다. 평양고보 졸업 후 그는 일본 유학을 떠나 규슈의 사가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그리고 계획대로 도쿄대학교 공학부에 입학하여 한국인 최초로 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응용화학을 전공했다.

한국 화학섬유계의 선구자이자 화공학계의 산증인이었던 김동일 박사. ⓒ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
한국 화학섬유계의 선구자이자 화공학계의 산증인이었던 김동일 박사. ⓒ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바로 해방 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초대학장을 맡아 혼란기에 과학기술 두뇌들을 양성한 선각적 교육자였으며, 한국 화학섬유계의 선구자이자 화공학계의 산증인이었던 김동일 박사이다. 약간 나이가 지긋한 분들의 경우 양복의 안감으로 쓰이는 레이온(인조견)을 처음 국산화한 장본인이라고 하면 그를 쉽게 기억할 것이다.

도쿄대를 졸업한 후 한국인 차별로 인해 무보수 조교 생활을 하던 그는 1934년 도쿄 소재의 이와키 주식회사에 연구주임으로 입사했다. 거기서 그는 동양에서 처음으로 초산섬유소(아세틸셀룰로이드)의 피막을 사용하여 안전유리를 만드는 데 성공하는 등 새로운 연구와 공정 개발로 생산원가를 절감해 두각을 나타냈다.

5년 후 평양에서 인견사를 생산하는 가네보 화학공업주식회사의 연구부장으로 자리를 옮긴 그는 삼작산 섬유소를 원료로 인견사를 만드는 새로운 제조법을 개발해냈다. ‘가네라리아’라는 명칭으로 불린 이 인견사는 그 회사에서 생산하는 3대 주력 상품 중 하나가 되었으며 당시 언론에 크게 보도되기도 했다. 이처럼 연구 개발에 전력하면서 그는 일본 정부의 특허를 7건이나 획득했다.

서울대 공과대학 초대학장 역임

1942년 김동일은 김연수 씨의 요청을 받아들여 민족 자본으로 설립된 경성방직의 영등포공장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거기서도 그는 공정 개선 및 경영의 합리화를 도모해 생산성을 일본계 방직회사보다 높임으로써 상처 받은 민족적 자존심을 조금이나마 회복시켜주었다.

광복이 되자 그는 당시 도쿄제대 선배로서 미군정청의 문교부장으로 있던 유억겸 씨의 권유에 의해 산업계 생활을 접고 학계로 자리를 옮기게 된다. 경성대학교 교수가 된 그는 이듬해 경성대학교 이공학부 공학계의 정식 대학과정과 경성공업전문학교 및 경성광산전문학교의 3개교가 통합 개편하여 창립된 국립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의 초대학장으로 영입됐다.

개교 초기 교수진의 확보 및 영입이 큰 문제로 떠올랐으나 김동일의 노력 하에 교수진을 확보하여 개교하기에 이르렀다. 전공이 화학섬유였던 그는 학장의 직무를 수행하면서도 산·알칼리, 인조비료, 유리공업, 화약, 화학공업개론 등의 교과목을 전공교수가 확보될 때까지 강의를 맡아했다.

또한 해방 직후 좌·우익의 극단적인 대립과 국대안(국립 서울대학교 설립안) 반대 파동을 겪기도 했으나 그는 의연하게 대처했으며, 우리나라의 구학제가 미국식 학제인 오늘날의 6-3-3-4 학제로 바뀌는 기틀을 다지는 데 노력했다.

2년의 학장직 임기를 마치고 교수직에 전념하던 6.25전쟁 중이던 1952년 3월 제3대 학장을 다시 맡아 전시체제 하에서도 학생들에게 이론과 실무를 체득하도록 하는 데 큰 공헌을 했다. 그 와중에 그는 삼작산 섬유소에 대한 연구 논문을 잇달아 발표해 1952년 4월 서울대학교에서 이공계 최초의 이학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1956년 미국 미네소타 대학과의 ICA 프로젝트에 따라 교환교수로서 6개월간 가 있다가 귀로에 그는 우리나라 최초로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개최된 제9회 국제 순수 및 응용화학연합회(IUPAC) 총회에 대한화학회의 대표로 참석했다. 이후 냉전 체제 속에서 소련의 반대를 무마해가며 IUPAC 입회를 위해 꾸준히 노력하여 마침내 1963년 런던의 제22차 총회에서 입회 승인을 얻어냄으로써 한국 화학계의 국제화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

과학기술 진흥 위해 평생 헌신해

1959년 14년간의 공대 학장 및 교수 생활을 마감한 그는 과학기술계 전반에서 더 광범위한 활약으로 헌신한다. 한국원자력원 초대 상임원자력위원으로 활동하며 제1차 원자력 학술회의를 치르고 대학에서 핵화학공업 개론을 가르치는 등 우리나라 원자력 발전의 초석을 놓았다.

1962년에는 상공부 산하의 공업표준심의회의 초대 회장직을 맡아 2년 동안 우리나라 공업표준규격의 제정 등에 공헌했다. 또한 그해 정부의 방침에 따라 설립된 흥한화학섬유주식회사의 기술 및 건설담당 부사장으로 임명되어 한국 화학섬유공업의 선구적 개척자 노릇을 했다. 이 회사는 그 후 원진레이온(주)가 운영하다가 공해 산업이라는 이유로 1996년 폐쇄되었다.

1970년에는 정부의 권유에 따라 한국석유산업개발센터를 설립해 이사장직을 맡았다. 한국 연안의 대륙붕에서 석유가 나올 가능성이 있다는 연구보고에 따라 발족된 이 기관에서 그는 석유산업 관련 최신정보 수집 창구 역할을 하여 우리나라 석유산업의 발전에 기여함과 동시에 오일쇼크 등으로 표류하던 우리나라 석유문제 탐구에 일조했다. 또한 액화천연가스(LNG)의 도입을 누구보다 가장 먼저 주장하기도 했다.

그는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과총)’의 창립에도 큰 역할을 했다. 1966년 과총 창립 준비위원으로 실무를 주도하며 90개 과학기술 관련 단체를 하나로 집결시킴으로써 과총 초대 부회장에 추대되었으며 상임 고문직을 평생 동안 맡아 과학기술 진흥을 위해 한평생을 희생적으로 봉사했다. 1966년부터는 화학회관 건립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해 1971년 화학회관 건립을 이루어내기도 했다.

1986년 과총 산하의 원로과학기술자문단 초대 단장으로 추대된 그는 퇴직한 고급 과학기술인력의 활용을 위해서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후 한국과학기술자문봉사단으로 개칭된 이 기관은 지금도 많은 사업을 수행하고 있다. 1908년 7월 20일 세상을 떠난 그는 학계와 산업계를 번갈아가며 이론과 실무의 간격을 좁혀왔다는 점에서 실학의 전통을 계승한 산학협동의 선구자로 기억되고 있다.

이성규 객원편집위원
2noel@paran.com
저작권자 2015-02-11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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