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철 박사가 귀국할 당시 우리나라는 천문학 연구를 진행할 수 있는 여건이 전혀 갖추어지지 않은 상황이었다. 따라서 그는 대학에서의 강연과 YMCA에서의 정기적인 대중 강연 등에 자신의 학문적 열정과 재능을 쏟아 부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중등학교에서 태양계에 관한 극히 간단한 내용만 지리 교사에 의해 교육되었을 뿐 제대로 된 천문학 강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따라서 이원철 박사의 천문학 강의는 당시 고등교육 수준에서 거의 유일한 천문학 강의로서, 연희전문학교의 자랑거리였다.
연희전문학교 건물 옥상에는 15㎝ 굴절망원경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이 박사는 그 망원경을 이용해서 천문학 강의를 이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망원경은 일본이 제2차세계대전에 매진하던 1942년에 전시물자로 징발돼 없어지고 말았다.
그의 존재감은 1932년 ‘삼천리’ 지에 게재된 다음의 기사를 통해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원철 박사가) 원철성을 발견하여 세계 천문학계에 절대의 공헌을 하고 미국 내 학자들의 이목을 놀라게 한 것은 일찍이 우리 신문계를 통하여서도 널리 알려진 바이거니와 (중략) 연전(延專)에 와서는 일반 학생들에게 비상한 환영을 받으며 연전 수물과의 존재가치가 전혀 씨에게 달려 있는 감이 불무하다. 연전의 세 가지 보물 중에 수위의 영예를 걸머지는 씨로서 (중략) 조선 학계에 있어서도 씨의 존재는 발군의 지위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 일반의 정평이다.”
그는 연희전문학교의 과학부장으로서 12년간 수물과 연구실을 관장하며 ‘과학연구’ 지를 간행하기도 했다. 또한 학교 박물관에 구하기 힘든 도서와 자신이 사용하던 물품을 기증하는 등 물질의 희사도 마다하지 않았으며, 체육부장을 겸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이원철 박사는 서울 YMCA가 일반인을 위해 개설한 교양강좌 중 과학강좌를 맡아서 진행했다. 그의 강좌에는 항상 많은 사람들이 참석했으며, 이 강연은 과학의 대중적 확산에 상당한 공헌을 했다.
과학의 대중적 확산에 공헌
한편, 그는 최초의 우리 천문학사 영어 논문의 연구 작업에도 큰 도움을 주었다. 그의 스승이었던 미시간 대학의 루퍼스 교수는 1935년에 안식년 휴가를 얻어 우리나라에 들어와 1년간 천문학에 관한 우리의 옛 문헌과 유적을 조사하는 작업을 했다.
이원철 박사는 정식 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익힌 상당한 수준의 한학 실력을 발휘하여 스승의 연구에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도왔다. 새로운 사료를 발굴하고 도서관과 사적지를 함께 답사하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루퍼스 교수는 1년간의 연구결과를 왕립아시아학회 한국지회의 잡지에 발표했다. ‘한국천문학사’라는 제목의 그 보고서는 고대에서부터 조선시대까지 전통 천문학을 개관한 것으로서, 34장의 관련 유물사진도 담고 있는 등 한국천문학사 연구의 필요성을 일깨워준 논문이다.
그런데 1938년 이원철 박사는 12년간 몸담았던 연희전문학교를 사직했다. 당시 동우회사건 및 흥업구락부사건 등에 연관된 교수들이 학교를 떠난 바 있다. 따라서 이원철 박사도 이 사건들과 관련돼 떠났다는 설이 있으나 확실치는 않다. 그 후 해방될 때까지 이 박사의 활동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해방 후 그는 한국 전통시대에 천문과 기상업무를 담당했던 관상감을 부활시키기 위해 적극 나섰다. 1945년 9월 22일 미 군정청 학무국 기상과 과장을 거쳐 10월 2일 관상대 복구 결정을 얻어낸 그는 조선총독부 기상대를 관상대로 재조직하고 자신이 초대대장을 맡았다.
이후 이 박사는 기상기술원 양성소를 설립해 기상요원을 배출하고 장비를 도입하는 등 기상업무의 현대화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1961년까지 관상대 책임자로 일하면서 기상 및 천문 분야의 인력을 키우고 법과 제도를 확립하는 등 우리나라 천문기상 행정의 정착에 기여했다.
또한 관상대 직원을 중심으로 1947년 3월 한국기상학회를 조직하여 우리나라에 기상학이 뿌리내리게 했다. 기록에 의하면 한국기상학회의 회원 수는 1958년 170명에 달했다. 여건상 학회지를 펴내는 등의 본격적인 학술 활동을 벌이지 못한 이원철 박사의 한국기상학회는 현재 기상학회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으며, 현재의 한국기상학회는 1963년에 창립됐다.
우리나라가 세계기상기구(WMO)의 68번째 정회원국으로 가입한 것도 그가 관상대장으로 일하던 1956년이었다. 관상대는 어감이 좋지 않다는 여론에 따라 1987년 중앙기상대로 명칭이 바뀐 다음 1990년 12월 27일 기상청으로 승격했다.
우리나라 기상업무 정착에 기여
기상청 청사는 1998년 12월에 보라매공원 부근으로 이전했지만, 이원철 박사가 근무했던 국립중앙관상대 자리는 기상청 서울기상관측소라는 이름으로 아직까지 남아 있다. 우리가 뉴스를 통해 접하는 서울의 최저기온 및 최고기온, 풍향, 풍속 등은 모두 이곳에서 측정된 자료들이다.
이원철 박사는 해방 이후 연희대학으로 새 출발을 한 연희전문학교에 기상학과를 독립된 학과로 신설하고 직접 이학부장 및 기상과장을 맡기도 했다. 하지만 관상대장 업무에 매진하면서 전임교수로 일할 수 있는 처지가 못 되었으며, 기상학과는 1년 후 물리기상학과로 개편되고 말았다.
그는 관상대 초대대장으로 근무하면서 직원과 함께 직접 역서를 편찬해서 배포하기도 했다. 역서는 음력날짜, 월령, 일월식, 조석, 24절기의 시각, 매일의 일월 출몰 시각 등을 계산한 결과를 담고 있는 책이다. 그는 그 책의 서두에서 부정확하고 미신적 행위와 많은 관련을 맺고 있는 음력을 버리고 단일한 양력을 사용할 것을 강조했다.
이원철 박사는 인하공과대학 설립 과정에 참여하면서 초대학장으로 선임돼 1954년부터 1965년 말까지 신설 대학의 기초를 닦았다. 인하공대는 과학기술 분야의 지도적 인재를 양성할 목적으로 이승만 전 대통령이 하와이 교민들이 보내준 성금으로 세운 학교로서, 당시 학계에서 존경받는 전형적인 과학자였던 이 박사를 학장을 선임한 것이었다.
그는 연희대학과 세브란스의과대학의 통합과정에 합동위원으로 참여했으며, 연세대학교 재단 이사장을 역임하는 등 비록 강단에 서지는 않았지만 지속적으로 교육과 관련된 역할을 맡으면서 교육에 열정을 쏟았다.
또한 YMCA 재단이사와 이사장을 역임했으며, 가문에서 전해오던 토지와 자신의 저택까지 전 재산을 YMCA에 기부하여 사회봉사를 실천했다. 그는 1963년 3월 14일 서울 갈월동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 이성규 객원편집위원
- 2noel@paran.com
- 저작권자 2014-12-31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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