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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최초의 이학박사 이원철 (상) /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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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2년 한국천문연구원의 전영범 박사와 박윤호 연구원은 보현산천문대의 1.8m 광학망원경을 이용해 소행성 ‘2002DB1’을 발견했다. 2002DB1는 소행성을 처음 발견하면 붙이는 임시번호로서 앞의 네 자리 숫자는 발견년도를 의미한다.

첫 번째 알파벳인 D는 발견한 달을 가리키는 표시로서, 매달을 반으로 나눠 차례대로 알파벳을 붙인다. 또 두 번째 알파벳은 그 기간에 발견된 소행성의 순서를 나타내는 표시로서, ‘I’를 뺀 25개의 알파벳을 차례대로 붙이는데 초과해 다시 반복되면 숫자를 붙인다. 즉, 2002DB1은 2002년 2월 16일 이후(D)에 27번째(B1) 발견한 소행성이라는 의미다.

국제천문연맹 산하 소행성센터에서의 검증이 끝나면 일련번호가 붙고 발견자는 소행성에 고유 이름을 붙일 수 있다. 전영범 박사팀은 그 소행성에 ‘이원철’이라는 이름을 붙여 정식으로 승인받았다. ‘최무선’, ‘장영실’, ‘허준’, ‘홍대용’, ‘김정호’ 등 소행성에 역사적으로 유명한 우리나라 위인들의 이름이 붙은 경우가 꽤 있다. 그럼 이원철은 과연 누구이기에 소행성에 그의 이름이 헌정된 것일까.

국립중앙관상대 초재대장으로 근무하던 시절 이원철 박사의 집무실 모습. ⓒ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
국립중앙관상대 초재대장으로 근무하던 시절 이원철 박사의 집무실 모습. ⓒ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

이원철은 한국인 최초의 이학박사로서, 우리나라의 천문학과 기상학 분야를 개척하는 데 앞장선 과학자이다. 최초 박사라는 이름답게 그의 이력에는 유난히 ‘초대’라는 수식어가 많이 따라붙는다. 한국기상학회 초대회장, 국립중앙관상대 초대대장, 인하공과대학 초대학장 등이 바로 그것이다.

1896년 8월 19일 서울시 중구 다동에서 이중억 씨의 넷째 아들로 태어난 그는 어릴 때부터 주위 사람들에게 신동으로 불렸다. 탁월한 기억력과 신속한 수치 계산 덕분이었다. 중앙관상대장으로 재직 중일 때 필요한 전화번호를 모두 암기해 일상 업무 수행시 전화번호부를 찾는 일이 거의 없었으며, 원주율을 소수점 아래 수십 자리까지 외울 정도로 그는 기억력이 뛰어났던 것으로 전해진다.

연희전문학교 재학 시절에는 수학교수가 풀지 못하는 난제를 10분 만에 풀어낼 만큼 수학에서 뛰어난 재능을 인정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박사학위를 받은 후에도 항상 방에서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이 목격될 만큼 노력하는 인물이기도 했다.

정식학교에 입학하기 전의 5년 동안 한학을 공부했던 그는 보성고등보통학교와 선린상업학교를 거쳐 연희전문학교 수학물리과에 입학했다. 연희전문학교 재학 중에는 수학에서 뛰어난 재능을 인정받아 3학년 때부터 학생강사라는 신분으로 2년간 통계학을 강의했다.

1926년 이학박사 학위 취득해

집안 형편이 그리 좋지 못했던 그가 미국으로 유학을 갈 수 있었던 것은 그곳에서 베커 교수와 루퍼스 교수를 만났기 때문이다. 베커 교수는 미국 앨비언대학을 졸업한 후 1905년 부인과 함께 우리나라로 건너와 연희전문학교 교수가 된 인물이며, 루퍼스 교수도 앨비언대학 출신으로서 1907년 부인과 두 아들을 데리고 연희전문학교의 교수로 온 천문학자이다.

졸업 후 2년 동안 모교의 수학강사로 일했던 이원철은 그의 재능을 높이 산 베커 교수의 후원과 루퍼스 교수의 주선에 의해 1921년 앨비온대학으로 유학을 가서 다음해인 1922년 이학사를 취득했다.

그 후 그는 루퍼스가 천문학 교수로 있던 미시간대학교로 옮겨 본격적인 천문학 연구를 시작해 1923년 석사학위를 취득한 데 이어 1926년에는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는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최초의 이학박사 학위였다.

그의 박사학위 논문은 독수리자리의 에타별에 대한 정교한 분광학적 관찰과 계산을 통해 그 별이 맥동변광성임을 밝힌 것이다. 그리스 신화에서 왕자 가니메데를 납치하기 위해 제우스가 변신한 모습이라고 전해지는 것이 바로 독수리자리다. 또 동양에서 내려오는 칠월 칠석의 전설 중 견우성이라고 알려진 별이 바로 독수리자리의 알파별인 알타이르다.

옛날에는 별의 밝기가 일정하다고 믿었지만, 1596년 독일 신부인 파브리치우스는 ‘미라’라는 별을 통해 같은 별이라도 밝아졌다 어두워졌다 한다는 사실을 처음 발견했다. 이후 천문학자들은 쌍성계를 이루는 두 별이 서로 돌면서 한 별이 다른 별을 가리는 식(蝕) 현상 때문에 별의 밝기가 변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 같은 식쌍성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 별들이 존재했다. 이에 대해 1914년 하버드대학교 천문대의 H. 섀플리는 별 가운데에는 스스로 수축 및 팽창을 거듭하면서 밝기가 주기적으로 변하는 변광성이 있다는 맥동설을 펼쳤다.

독수리자리 에타별이 맥동 변광성임을 밝혀

이후 이 학설을 확인하기 위해 그 같은 별을 찾아서 연구하는 천문학자들이 많았는데, 이원철도 바로 그런 별 가운데 하나인 독수리자리의 에타별을 골라 연구한 것이었다. 에타별은 7.2일 동안 밝기가 3.7등급에서 4.5등급으로 변하는 변광성이다.

그는 이 연구결과의 일부를 1926년 9월에 열린 미국천문학회 36회 학술회의에서 발표했다. 그의 박사학위 논문은 ‘독수리자리 에타별의 대기에서의 운동’이라는 제목으로 미시간대학의 학회지에 수록되었다. 그는 미시간대학 천문대에서 31.5인치 반사망원경과 프리즘 분광기를 이용해 71회의 분광학적 관측결과를 얻고, 이를 세밀하게 분석·계산해 독수리자리 에타별에 대한 다양한 결과들을 구함으로써 이 별이  맥동 변광성임을 밝혔다.

그의 연구를 당시 천문학계의 세계적인 새로운 발견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당시 식민 지배를 받던 우리 민족에게 자부심을 안겨주기에는 충분했다. 1929년에 발간된 대중종합지 삼천리 3호에는 이원철 박사에 대해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기사가 게재됐다.

“미국 미시간대학의 학창에 파묻혔을 때도 뛰어난 그의 재분은 수리문제를 향함에 석연히 풀리지 아니하는 것이 없고 또 천재라하리만치 독창력에 부하여 끝끝내 천문을 연구함에 있어서 수십년 내로 정예의 과학을 가지고도 수백의 세계 천문학도가 찾지 못하던 유명한 별 한 개를 역학의 힘을 통하여 발견하였으므로 천문학자들은 그 별 이름을 씨의 이름을 따서 ‘원철별’이라고 공칭한다고 합니다.”

이처럼 당시에는 그가 에타별을 처음 발견한 것으로 잘못 알려지기도 했으나, 어쨌든 그는 원철별로 널리 알려진 자신의 천문학 연구를 통해 일제강점기의 우리 민족에게 자긍심을 높여줬다. 학위를 마친 후 그는 곧바로 귀국해 연희전문학교에서 12년 동안 천문학을 가르쳤다. (하편에서 계속)

이성규 객원편집위원
2noel@paran.com
저작권자 2014-12-23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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