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ril 26,2018

한국의 노벨상 홍역… 일본은?

후쿠오카 신이치 교수의 ‘동적평형’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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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서평 ‘일본은 없다’라는 제목의 책이 유행한 적이 있다. 일본이라는 국가의 허구와 부조리를 폭로하는 책이다. 하지만 과학에 한정지어 말하면 단연코 ‘일본은 있다’. 아니 많다. 많은 정도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과학은 일본의 절반 수준에도 미치지 못한다. 절반은커녕 그 절반의 절반이라도 따라갈 수 있다면 다행일지 모른다.

일본에 대한 전 국민적 악감정을 잠시 억누르고 그들이 세운 과학의 전통을 마주하는 순간, 우리는 바로 이 비참한 진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를 위해 굳이 자연과학분야의 노벨상 수상자를 비교할 필요도 없다. 해마다 노벨상 수상이 발표되는 계절이 오면 한국은 한바탕 홍역을 치른다. 한국의 과학정책과 일본을 비교하며 기초과학에 대한 중장기적 투자를 주문하는 현장의 목소리가 전해진지 벌써 십여년이지만 연구 현장의 분위기는 변한 것이 없다. 노벨상은 단순한 정책의 문제가 아니다. 과학은 국가의 정책으로만 발전하는 분야가 아닌 까닭이다 .

과학은 문화다. 그리고 일본에겐 그것이 있고, 우리에겐 없다. 선정에 따른 실수도 잦고, 이제 현장의 기초과학자들에게 그다지 환영을 받지도 못하는 노벨상 따위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국격을 위한 노벨상이 아니라면 한 국가의 과학정책은 노벨상이 아니라 과학이라는 문화가 뿌리내리게 하는데 집중되어야 한다.

모투 기무라, 이미니시 긴지라는 이름

필자가 박사과정생이던 시절, 콜드스프링하버 미팅에 참석할 기회가 있었다. 뉴욕 케네디 공항에서 콜드스프링하버 연구소까지 가는 셔틀에서 한 스위스의 과학자를 만났다. 세포생물학을 전공한다던 그 과학자와 이런 저런 한담이 오가던 중에 그의 입에서 모투 기무라(Motoo Kimura)라는 이름과 ‘중립 가설(Neutral Theory of Molecular Evolution)’이라는 책이 등장했다. 한국이라는 조그만 나라에서 온 우리와의 대화를 위해 자신이 아는 동양인 과학자 한 명을 생각해 낸 듯싶었다.

진화론에 대한 관심으로 평소에 기무라에 대해 알고 있었던 필자와 그 과학자는 함께 웃으며 즐거운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기무라가 누군지도 모르는 필자의 동료들은 그저 무표정한 얼굴로 우리를 응시할 뿐이었다.

미국이라는 땅에서 박사후연구원 과정을 밟으면서 우연히 일본 동경대학교의 대학원생들과 합동세미나를 가진 적이 있다. 동경대의 연구수준은 어떤지 궁금하기도 하고, 일반적으로 영어에 능통하지 못한 일본인 과학자들 덕에 포스터들을 아주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 재미있는 사실은 당시 필자가 본 포스터의 대부분이 어류 및 쥐의 행동연구였다는 점이다. 모델동물로 널리 알려진 쥐의 행동연구야 신경생물학의 연장선상에서 지원할 수 있다 해도, 어류의 기본적인 모델동물인 제브라 피쉬(zebrafish)도 아닌 송사리를 이용한 지극히 기초적인 행동 및 생태 연구 포스터가 한 둘도 아니고 십 여 개씩 붙어 있는 광경은 압권 중의 압권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동경대학교의 기초과학연구소라는 곳에서는 기초 중에서도 가장 기초적인, 언뜻 보아서는 산업이나 경제 및 인류의 복지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은 연구가 수행되고 있는 것이다.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나눈 대화에 의하면, 일본엔 이런 기초과학 연구소가 즐비하며 경제적으로도 다른 연구소들에 비해 크게 어려움을 겪지 않는다고 했다.

그때 문득 떠오른 과학자가 있다. 이마니시 긴지(Imanishi Kinji, 今西錦司)다. 그는 1902년에 태어나 1992년에 죽었다. 기무라는 1924년에 태어나 1994년에 죽었으니 20년 정도 앞선 대선배인 셈이다. 긴지는 곤충학으로 학문을 시작해서 훗날 일본 영장류학의 기초를 세운다.

그의 학문적 관심사는 매우 폭넓어서 생물학 뿐 아니라 인류학, 생태학, 철학에도 깊은 관심이 있었다. 부잣집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19세기 유럽의 과학 중흥기에 귀족 출신으로 유명한 과학자가 된 이들과 닮은 점이 있다. 전문 등반가로서도 유명한 업적을 남겼는데 이는 골턴이나 훔볼트를 떠올리게 한다.

긴지에 대해 자세히 언급할 수는 없지만 그는 ‘고구마를 씻어 먹는 일본 원숭이’ 연구를 주도한 인물이다. 그의 연구방식과 결과들은 처음엔 서구 학자들에게 환영 받지 못했다. 그의 ‘서식역 분할’이라는 진화론도 다윈의 자연선택에 반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고, 긴지는 서구 과학자사회에서 왕따를 당하기도 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런 게 아니다. 기억해야 하는 것은 이미 오래 전에 한 일본의 과학자가 서구의 주류 과학계에 충격을 주었다는 점이다. 기무라와 긴지가 서구과학계에 던진 충격이 황우석 교수가 던진 충격과 질적으로 다르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과학은 문화다

비단 노벨상이나 주류 과학계를 이끄는 과학자들의 수로 ‘일본이 있다’고 주장할 생각은 없다. 식민지 시대를 거치면서 과학의 발전 기회를 놓친 우리의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채 비교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어쩌면 일본의 과학은 조선의 피로 완성된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배울 건 배워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언제고 산업 및 경제 뿐 아니라 과학까지 일본의 꽁무니만 쫓아다니게 될지도 모른다.

필자의 어린 시절에 ‘전파과학사’라는 출판사가 있었다. 지금도 많은 책을 펴내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전파과학사에서 펴낸 상당수의 교양과학도서들이 일본인 저자의 것이었다. 물론 그 사정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국내 교양과학도서 시장은 영국과 미국 그리고 일본이 지배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일본 저자들의 과학도서들이 꼭 필자의 마음에 들었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언젠가부터 필자에겐 일본인 저자의 이름으로 출판된 교양과학도서를 우습게 보는 버릇이 생겨 있었다. 터무니없이 허무맹랑한 이론, 사이비과학에 가까운 이론, 지나치게 가볍고 내용이 충실하지 않은 책들이 일본인 저자들의 이름을 걸고 쏟아져 나왔고, 필자는 곧 관심을 접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그러한 편견엔 변함이 없다.

하지만 부러운 점도 없지 않았다. 도대체 출판 시장이 얼마나 크길래, 과학자의 수가 얼마나 많길래, 또 국민들의 과학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얼마나 크길래 이렇게 끊임없이 자국의 과학자들이 교양과학도서를 출판하는 것일까. 천재는 단 한편의 작품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수 없이 많은 실패작들 속에서 탄생한다고 한다면, 이러다 언젠가는 정말 대단한 과학저술가가 등장하게 되는 건 아닐까.

실패가 용인되는 실리콘밸리에서 애플과 구글이 등장할 수 있었듯, 이런 실패들 속에서, 이런 다양성 속에서 언젠간 대단한 일이 벌어지지 않을까. 그리고 필자의 짐작은 현실이 되었다.

과학분야의 노벨상이 한 순간에 등장할 수 없다는 데는 대부분 동의한다. 과학의 문화적 속성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과학이 하나의 문화로 사회에 정착하기 위해서는 더욱 오랜 숙성의 기간이 필요할지 모른다. 그것은 과학이라는 지식체계가 유럽이라는 시공간 속에서 오래도록 숙성되어 나타난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동아시아가 아무리 빠른 시간에 과학의 기예적 속성을 받아들이고 체화할 수 있었다고 해도, 과학의 문화적 속성마저 그렇게 쉽게 얻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문화는 충돌하게 마련이다. 동아시아엔 동아시아에서 숙성된 우리만의 문화적 전통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문화와 과학을 하나로 묶어 융합시키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일본은 그걸 해냈고, 우리는 여전히 하지 못했다. 그것이 필자에게 일본이 부러운 유일한 이유다.

분자생물학자 출신의 문필가

예로부터 생물학 분야의 과학자들 중, 유려한 문체로 대중에게 사랑 받는 책을 저술한 이들은 자연사 전통의 학자들이었다. 다윈을 예로 들지 않더라도 국내 과학자들 중 대중을 대상으로 한 출판 및 강연에 힘을 쏟고 있는 이들이 대부분 자연사 전통의 학자들이다.

리쳐드 도킨스, 매트 리들리, 스티븐 제이 굴드, 에른스트 마이어, 존 메이나드 스미스 등 국내 교양과학 도서 시장을 좌지우지하는 생물학 진영의 필자들도 대부분 자연사 전통에 서있는 인물들이다. 생물학의 전통은 하나가 아닌데, 자연사의 반대편에서 근접인을 다루는 생리학 전통의 필자들은 그다지 글쓰기에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듯 하다.

DNA의 구조를 발견한 왓슨의 ‘이중나선’이라는 지극히 가벼운 일기 같은 책이 그나마 생리학 전통의 책으로는 드물게 유명세를 탔다. 하지만 이 책은 그다지 깊이가 있지도 감동적이지도 않다. 오히려 사실을 왜곡해 놓은 부분이 많기 때문에 과학사가들에게는 금기시되기도 한다. 결국 과학자들의 사생활을 마치 대통령의 섹스스캔들처럼 벌려놓았기 때문에 유명해진 것이지, 양서가 될 만한 책은 아니라는 뜻이다.

‘동적평형(動的平衝)’을 저술한 후쿠오카 신이치도 생리학에서 뻗어 나온 분자생물학 전통에 몸담은 학자다. 그는 쥐의 췌장세포에서 발현되는 막단백질을 분리하고 그 기능을 연구하는데 평생을 바쳤다. 실제로 ‘동적평형’에서 신이치 교수가 설명하고 있는 대부분의 생물학 이야기들은 철저히 분자생물학의 발견에 기대고 있다.

분자생물학의 개론서

그는 분자생물학 분야에선 드물게 감성적 문필가의 면모를 지닌 학자다. 그의 책 ‘생물과 무생물 사이’가 일본에서만 무려 60만권 이상이 팔렸다고 하니, 분자생물학자로서 얼마나 쉽고 명확하고 수려하게 글을 쓰는지는 쉬이 짐작이 가는 일이다.

‘동적평형’의 제목은 전작인 ‘생물과 무생물 사이’에서 다룬 루돌프 쇤하이머(Rudolph Schoenheimer)의 ‘몸 구성성분의 동적 상태(dynamic state of body constituents)’ 혹은 ‘동적평형’이라는 개념에서 따온 것이다. 루돌프 쇤하이머 또한 생리화학자(physiological chemist)로 철저하게 실험의 전통 속에서 숨을 쉰 인물이다.

방사성동위원소를 사용해서 동물의 소화와 영양을 연구하던 생리화학의 전통은 훗날 생화학과 오늘날의 식품영양학으로 이어진다. 실제로 쇤하이머의 연구를 개괄하는 ‘동적평형’은 식품영양학에 대한 글들로 가득 차 있다. 2장의 제목은 ‘당신은 당신이 먹은 것이다: 소화=정보의 해체’이며, 3장의 제목은 무려 ‘다이어트의 과학: 분자생물학이 말하는 살찌지 않게 먹는 법’이다.

분자생물학에 대한 쉬운 개론서를 추천하는 분들에게 국내의 번역서들 중 마땅히 권할 책이 별로 없어 난감하다. 물론 매트 리들 리가 지은 ‘게놈’이 어느 정도 분자생물학의 성과들을 다루고 있지만 지나치게 진화생물학적 관점으로 접근하고 있고, 미쉘 모랑쥬의 ‘분자생물학: 실험과 사유의 역사’도 대중이 접근하기엔 그 장벽이 만만하지 않다.

만약 최신 분자생물학의 뉴스들을 언론의 사탕발림에 넘어가지 않고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싶은 독자들이 있다면 신이치 교수의 ‘생물과 무생물 사이’와 ‘동적평형’을 읽으라고 권하고 싶다. 특히 ‘생물과 무생물 사이’의 2장~4장은 DNA와 단백질에 관한 교과서적 지식을 매우 쉬운 문체로 풀이하고 있고, ‘동적평형’의 5장은 쥐를 이용한 형질전환 실험들과 줄기세포에 관한 좋은 설명을 제공한다.

물론 신이치 교수의 책은 과학자이면서도 탁월한 그의 문필가적 자질 덕에 아무런 생물학적 지식이 없이도 잘 읽힌다. 필자처럼 쉽고 유려한 글쓰기에 자질이 부족한 이들의 글과는 많이 다를 것이다.

자기복제와 동적평형

‘동적평형’을 관통하는 주제는 ‘생명에 대한 재정의’다. 도킨스의 ‘이기적인 유전자’를 읽은 독자들이라면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생명이란 자기복제가 가능한 시스템”이라는 답을 내어놓기 일쑤다. 실제로 DNA가 주인공이었던 20세기에 생명은 DNA의 자기복제 시스템으로 상징되곤 했다.

생명이란 무엇인가? 이 영원한 물음에 대해 지난 날 다양한 답변이 시도되었다. DNA의 세기였던 20세기적 견해로 본다면 물론 ‘생명이란 자기복제가 가능한 시스템’이라는 대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분명 이는 상당히 간결하며 기능적인 정의였다. 하지만 이 정의에는 생명이 갖는 또 하나의 아주 중요한 특성이 제대로 반영되어 있지 못하다. 그것은 생명이 ‘가변적이며 영속적인 시스템’이라는 예스럽고도 새로운 관점이다.

신이치 교수에게 이러한 관점을 선사해준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췌장세포의 막단백질을 연구하며 넉아웃 생쥐(knock-out mice: 원하는 유전자가 제거된 생쥐)를 만들었던 저자의 경험이고, 다른 하나는 루돌프 쇤하이머라는 과학자의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혁명적인 연구결과다. 신이치 교수가 꽤나 선대의 학자인 쇤하이머의 연구결과를 미리 알았던 것인지, 아니면 훗날 쇤하이머를 알고 나서 자신의 연구결과가 투영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단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두 과학자의 생명에 대한 철학은 묘하게 겹친다.

췌장의 막단백질인 GP2를 분리하고 이 유전자를 없앤 생쥐를 만드는 것이 신이치 교수가 박사후연구원 시절 수행했던 연구다. 지금도 넉아웃 생쥐를 만드는데 2년에 가까운 시간이 소요되므로 당시로서는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이렇게나 힘든 과정을 거쳐 만든 생쥐엔 ‘에비스마루 1호’라는 애칭이 붙여졌다.

나름대로 중요한 단백질일거라고 생각했던 GP2가 통째로 사라진 이 생쥐는 아주 건강하게 잘 자랐다. 게다가 늙어 죽을 때까지 별다른 이상징후도 보이지 않았다. 췌장의 세포막을 구성하고 소포체를 만드는 데 중요한 단백질이 사라졌는데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처음에 크게 낙담했고, 지금도 반은 그런 상태다. 이제는 어느 정도는 ‘사실 바로 여기에 생명의 본질이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뭔가 중요한 것을 간과했던 것이다.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기본적인 물음에 대한 인식의 일천함이다. 우리의 생명은 수정란이 생긴 그 순간부터 행진을 시작한다. 이는 시간의 축에 따라 흐르는, 과거로 되돌릴 수 없는 일방통행의 과정이다 .

실험이 실패한 그 순간, 신이치 교수는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아마 성공에 눈이 먼 과학자였다면 평생 깨닫지 못했을 그런 행운일지 모른다. 심혈을 기울여 만든 생쥐가 아무런 표현형을 보여주지 않으니 좋은 논문을 낸다는 것은 기대조차 할 수 없다. 게다가 이 프로젝트에 쏟아 부은 시간을 생각한다면 통곡이라도 해야 할 판이다. 하지만 이 실패는 신이치 교수에게 생명에 대해 깊이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

물론 어떤 유전자들은 몸에서 제거해도 생쥐의 건강에 아무런 지장이 없다. 모든 유전자가 다 똑같이 중요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넉아웃 생쥐를 만드는 기술이 개발된 이후 상당히 많은 과학자들이 유전자 사냥에 나섰고, 실제로 어떤 유전자들은 통째로 사라져도 생명에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질병조차 유발하지 않는 유전자들도 많았다.

이런 경우 평범한 과학자들은 시간낭비를 했다고 생각한다. 재수없는 유전자를 골랐다고 불평하는 과학자들도 많다. 생쥐가 죽지도 않으면서 적당한 표현형을 보여주는 유전자를 고른 과학자들은 의기양양해진다. 자신이 운이 좋았다는 사실은 까맣게 잊어버린 채.

분자생물학자들은 이런 현상을 설명하는 개념으로 ‘중복’ 혹은 ‘잉여(Redundancy)’라는 말을 사용한다. 최근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잉여 인간’이라는 말의 의미와 비슷한 것이다. 잉여란 없어도 별로 상관이 없는, 혹은 사라져도 다른 구성원에 의해 충당이 가능한 상태를 뜻하는 말이다.

예를 들어 액틴(actin)이라는 단백질은 염색체 이곳저곳에 동일한 유전자가 산재되어 있다. 그만큼 세포가 이 단백질을 많이 필요로 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한 염색체의 액틴 유전자를 없애봐야 그렇게 나온 넉아웃 생쥐에겐 별다른 이상이 생기지 않는다. 다른 액틴 유전자들에 의해 그 부족분이 금방 메워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태가 이렇게 단순한 것만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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