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인상파 화가 드가(Edgar Dega, 1834-1917)의 그림 중 ‘여인의 초상(Portrait of Woman)’이란 작품이 있다. 이 그림을 소장하고 있는 곳은 호주 멜버른에 있는 빅토리아 국립미술관이다.
1937년 이 그림이 미술관에 도착했을 때 미술관은 축하 행사를 열며 드가의 그림이 처음 전시되는 것을 기뻐했다. 그러나 그림 원판을 본 사람들은 크게 실망했다. 그림의 주제인 여인 얼굴 한쪽이 멍이 든 것처럼 어둡게 변색돼 있었기 때문이다.
얼굴 부분 군데군데에 의도적인지, 아니면 실수를 한 것인지 분간하기 힘든 푸르고 검은 색 붓자국들이 남아 있었다. 당시 상황에서 그림을 그린 드가의 본래 의도를 밝혀낸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러나 지금 그 비밀이 밝혀지고 있다.
가속기로 세밀한 부분까지 밝혀내
4일 ‘워싱톤 포스트’, ‘가디언’ 등 주요 언론들은 첨단 기기로 X레이를 투사해 그림의 성분을 조사한 결과 탈색된 부분은 실제로 다른 사람의 얼굴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고 보도했다. 드가가 그 위에 또 다른 여인의 얼굴을 그렸다는 것.

그러나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덧칠한 부분이 사라졌고, 바탕에 있던 사람의 얼굴 색깔이 드러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이런 사실이 밝혀지자 많은 미술 평론가들이 실망하고 있다. 한 평론가는 평범한 그림을 너무 비싸게 구입한데 대해 불만을 표명했다.
평론가들을 분개하게 한 이 그림의 비밀을 밝혀낸 것은 과학자들이다. 과학자들은 이온 가속장치인 싱크로트론(synchrotron)을 이용해 드가가 다른 사람의 얼굴 그림 위에 또 다른 여인의 얼굴 그림을 덧 그렸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싱크로트론이란 강력한 전기장·자기장 속에서 입자를 가속화하는 장치를 말한다. 전자를 가속하는 것을 일렉트론 싱크로트론, 양성자를 가속하는 것을 프로톤 싱크로트론이라고 하는데, 보통 싱크로트론이라고 하면 일렉트론 싱크로트론을 말한다.
과학자들은 이 가속기를 이용해 그동안 볼 수 없었던 세밀한 부분을 밝혀내고 있다. 지난해 유럽핵입자물리연구소(CERN)의 강입자충돌기(LHC)를 통해 우주를 구성하는 단위인 쿼크 입자를 발견한 것 역시 싱크로트론의 위력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빅토리아 미술관 다릴 하워드(Daryl Howard) 박사를 팀장으로 하는 연구팀은 호주 싱크로트론에서 입자를 가속화해 얻어낸 강력한 빛 ‘엑스레이(X-ray)’을 이용했다. 빠른 전자를 물체에 충돌시키면 투과력이 강한 복사선(전자기파)이 방출되는 데 이 복사선을 엑스레이라고 한다.
거대한 싱크로트론을 활용한 만큼 이번 연구에 사용된 엑스선은 매우 강력했다. 태양 빛보다 수백만 배 강한 빛이었다. 빛을 그림에 칠한 물감에 투사한 후 다양한 물감 분자들을 매우 정밀하게 분석해낼 수 있었다.
복원 기술로 미술관 역사 새로 써 나가
색을 재현해내는 데는 엑스레이 형광 및 색채 재구성 기술(X-ray fluorescence and color reconstruction techniques)을 이용했다. 분석 결과 아연으로 칠해진 영역은 흰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다르게 칠해진 부분들 역시 세월이 지난 그림의 역사를 규명해낼 수 있었다. 그리고 ‘여인의 초상’에 등장하는 얼굴이 원래는 다른 얼굴이었으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 그림을 무시하고, 그 위에 다른 얼굴을 덧붙인 것임을 발견했다.
하워드 박사는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초상화에 숨겨진 얼굴이 드가의 모델로 유명한 에마 도비니(Emma Dobigny)의 얼굴임을 확신하고 있다”고 말했다. 1851년 파리 빈민가에서 출생한 그녀는 젊었을 때 드가를 만났고 그림 모델로 자주 등장하고 있다.
연구팀은 드가가 처음에는 도비니의 얼굴을 그렸다고 마음에 들지 않았고, 그 위에 다른 모델의 얼굴을 그린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표면에 덧칠해진 물감이 벗겨지고, 원래 그렸던 얼굴의 푸르고 어두운 색이 드러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연구를 이끈 하워드 박사는 미술인이 아닌 화학자다. 그녀는 드가의 그림 외에도 다른 그림, 조각 등을 분석해 그 작품의 스토리를 재구성하고 있는 중이다. 싱크로트론을 이용할 경우 작품 소재들을 정말 분석해 원래 모습을 재현해낼 수 있다는 그녀의 주장이다.
최근 첨단 과학은 변형된 미술 작품들을 원래 그대로 복원시키는 중요한 기술로 자라잡고 있다. 지난 2월 미국의 ‘아트 인스티티튜트 오브 시카고 예술대학 연구팀은 엑스레이(X-ray) 촬영으로 고흐의 명작 ‘아를의 침실’ 시리즈를 면밀하게 분석한 바 있다.
그리고 그중 한 점 속에 지금과는 다른 색채가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아를의 침실’ 연작 중 1888년 가장 먼저 그려진 첫 번째 작품 속의 벽의 색깔은 지금과 같은 하늘빛이 도는 파란색이 아닌 연한 보라색이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때 사용한 기술 역시 강력한 빛의 입자인 ‘엑스 레이(X-ray)'를 이용한 것이다. 관계자들은 향후 이 기술을 고 미술품 복원에 활용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럴 경우 엄청난 분량의 미술품이 복원되고, 미술관의 역사를 새로 써 나아갈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 이강봉 객원기자
- aacc409@naver.com
- 저작권자 2016-08-05 ⓒ ScienceTimes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