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건 대낮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한 은행에 무장 강도가 들이닥쳤다. 그들은 소총으로 은행원들을 협박한 후 현금과 귀중품 등을 훔쳐갔다. 그런데 무장 강도의 일행 중에는 타냐라는 이름을 지닌 젊은 여성도 한 명 끼어 있었다. 비디오 판독 결과 그들은 좌익 과격파인 공생 해방군 단원들이었다.
사건이 일어난 지 한 달 후인 1974년 5월 경찰은 그들의 근거지를 급습해 공생 해방군 단원 6명을 사살했다. 하지만 현장에서 용케 도주한 타냐가 자신의 부모 및 기성 사회를 공격하겠다는 내용이 담긴 카세트테이프를 경찰에 보내 왔다. 그로부터 약 1년여의 추적 끝에 결국 타냐도 경찰에 체포됐다.
배심원들은 그녀에게 징역 35년의 중형을 선고했으나, 타냐는 감옥에 간 지 2년도 채 되지 않아 지미 카터 대통령에 의해 가석방되었다. 더구나 그녀는 재판을 받을 당시부터 감옥에 있지 않고 가택 연금을 당한 상태였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이유는 바로 그녀의 신분 때문이었다. 타냐의 본명은 패트리샤 허스트로서, 20세기 초 미국의 미디어 재벌 월리엄 랜돌프 허스트의 손녀였다. 허스트 가문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건물 중 하나가 바로 허스트캐슬이다.
1947년 캘리포니아 중부 ‘샌 시메온’ 해안가에 들어선 이 건물에는 온도조절장치가 있는 거대한 로마식 야외수영장을 비롯해 호화로운 극장, 거대한 규모의 식당이 있다. 또 초특급 호텔처럼 꾸며진 156개의 손님 방과 파티 참석객들을 위한 17개의 탈의실을 갖췄으며, 건물 곳곳엔 고대 이집트와 로마에서 공수해온 국보급 보물들이 자리 잡고 있다. 처칠과 루즈벨트를 비롯해 찰리 채플린, 클라크 케이블, 엘리자베스 테일러, 존 웨인 같은 유명 인사들이 이곳에서 휴가를 즐겼다.
26개의 신문사, 8개의 라디오 방송국, 13개의 잡지사 등 당시 거의 모든 미국 언론을 장악했던 허스트의 손녀가 왜 무장 강도로 변신해 사회를 경악케 한 것일까. 그녀는 19살이던 1974년 2월 4일 공생 해방군에게 납치됐었다. 납치 직후 공생 해방군은 거액의 몸값을 요구했으나 허스트 가문은 응하지 않았다.
그리고 2개월이 지난 후 허스트 양은 공생 해방군과 한 패가 되어 무장 강도 행세를 한 것이다. 그녀는 은둔지에 같이 있던 공생 해방군이 다 사살된 후 혼자 도망쳤으며, 한참 후 경찰에 체포당할 때에도 총격전을 벌이며 끝까지 저항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그녀의 이 같은 행동에 대해 재판 당시 변호인단은 ‘스톡홀름 증후군’에 해당된다며 무죄를 주장했다. 즉, 엄청난 신분과 가문의 재력, 그리고 스톡홀름 증후군 덕분에 그녀는 감옥에서 쉽게 풀려날 수 있었다.
인질들의 이해하기 힘든 행동
스톡홀름 증후군이란 그녀가 강도 짓을 하기 바로 전 해인 1973년 8월 23일 스웨덴 스톡홀름의 크레디트 은행에서 발생한 은행 강도 사건에서 유래했다. 당시 은행에 침입한 강도 2명은 6일간 인질극을 벌이면서 경찰과 대치했는데, 4명의 인질들이 자신들을 억류한 강도들에게 정서적으로 밀착하는 현상을 보인 것.
강도들에게서 풀려날 때 포옹과 키스를 하는가 하면, 감옥으로 이송되는 강도들의 안전을 걱정하는 행동을 하기까지 했다. 또 강도들에게 유리한 증언을 하고, 심지어 한 여성 인질은 강도 중 한 명에게 반해 약혼자와 파혼까지 하는 기막힌 일이 벌어졌다.
이 인질극은 처음부터 끝까지 TV에 생중계되었는데, 거기서 수사를 도우며 해설을 맡았던 범죄심리학자 닐스 베예로트는 인질들의 이해하기 힘든 행동을 일컬어 ‘스톡홀름 증후군’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스톡홀름 증후군은 이처럼 인질이나 피해자들이 자신의 생존에 대한 위협을 경험하는 와중에 가해자의 부당한 폭력을 부정한 채 가해자의 친절한 특성에 대해서만 애착 관계와 유대를 형성하는 것을 말한다.
실제로 자신을 납치해 18년간 감금하고 성폭행한 범인을 적극 옹호한 사례도 있다. 11살 때 납치당한 후 2009년에 극적으로 구출된 미국의 제이시 두가드가 그 주인공이다. 그녀는 성폭행으로 2명의 딸을 낳았으며 범인으로부터 상습적으로 폭력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경찰 조사관에게 범인을 훌륭한 남편이라며 두둔한 것으로 알려졌다.
스톡홀름 증후군은 유괴나 인질 사건뿐 아니라 가정폭력이나 데이트 폭력 등 대인관계 상황에서 지속적인 폭력에 노출된 피해자들에게서도 발생한다. 이 경우 남성의 폭력이 빈번할수록 여성들은 더욱 그에게서 떠나는 것을 망설이는 경향이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여성 포로들이 진화시킨 독특한 생존 전략
스톡홀름 증후군 같은 이상한 현상이 일어나는 이유에 대해서는 다양한 관점의 설명이 시도된 바 있다. 프로이트적 설명에 따르면 자아가 위협에 맞닥뜨렸을 때 방어 기제를 작동시켜 유아기 상태로 회귀함으로써 극단적인 의존상태가 될 수 있다고 해석한다.
범죄심리학에서는 가해자들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 사고 능력을 상실한다고 하며, 권력의 불균형과 좋고 나쁜 대우의 간헐적 발생이라는 두 가지 요인을 갖춘 관계에서 강한 정서적 애착이 형성된다는 트라우마적 유대 이론으로 설명하는 이도 있다. 이처럼 스톡홀름 증후군의 발생 원인에 대한 연구는 주로 범죄심리학이나 사회심리학, 임상심리학 등의 심리학 분야에서 주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런데 최근 스톡홀름 증후군의 원인을 진화적 기원에서 논한 연구결과가 발표되어 주목을 끌고 있다. 지난 4일 휴먼네이처(Human Nature)에 실린 미국 오리건대학교의 미셸 스칼리제 스기야마 교수의 논문이 바로 그것이다.
원시농경사회에서의 부족 간 침략 전쟁에 대해 연구해온 스기야마 교수는 우리의 여성 조상들이 전쟁에 직면하여 발달시킨 생존 및 생식 전략을 분석했다. 그 조사 대상 자료는 북미의 인디언 부족 및 북극의 에스키모인, 호주의 아보리진, 아프리카의 산족, 남미의 원주민 부족 등 45개 원시농경사회에서 전승되어 온 설화들이었다.
그 결과 물리적 감금을 당한 채 신체적·성적·정서적 학대를 당하는 스톡홀름 증후군은 원시농경사회의 포로들이 직면한 상황과 유사한다는 결론을 내린 것. 더불어 포로로 잡힌 여성들이 생존 및 생식 가능성을 증가시키기 위해 그 같은 상황을 받아들이고 저항을 포기하는 독특한 생존 전략을 진화시키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스톡홀름 증후군은 남성보다는 여성에게 많이 일어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이성규 객원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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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작권자 2014-11-10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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