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염병이 발생해 유행을 하는데도 이를 제때 알아차리지 못해 대재앙을 겪은 것은 인류 역사에서 한두 번이 아니었다. 에이즈에 이어 지카(zika)바이러스병이 이런 대재앙의 조짐을 보이고 있어 전 세계가 긴장하고 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지카바이러스병이 지난해 중남미에서 유행을 시작해 올 들어 미국, 아시아 등 세계 곳곳에서 환자가 발견되자 지난 2월 1일 국제보건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지카바이러스병이 감염병 경보 단계 중 최고 등급인 6단계의 팬데믹(pandemic)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국제보건비상사태는 지난 2009년 신종플루 대유행 당시와 2014년 서아프리카 지역을 중심으로 유행해 1만1천여 명이 숨진 에볼라 바이러스 사태 때도 선포됐다.
왜 어떤 감염병은 유행의 시작과 함께 금방 알아차리는데 어떤 감염병은 제때 알아차리지 못하는 걸까? 에볼라, 신종플루, 사스(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와 같이 전파력이 강하고 치명률이 높은 감염병은 유행 초기에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하지만 바이러스가 사람의 몸에 들어와 서서히 증식하고 또 생명을 앗아갈 정도가 되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 `느림보 감염병‘들은 이들 감염병과는 다르다. 특히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던 감염병이 아니면 눈치 채기가 더욱 어렵다. 에이즈의 세계적 대유행, 즉 팬데믹에서 서서히 우리 몸을 공략하는 병원체의 위력을 엄청난 대가를 치르고서야 알아차렸다. 하지만 이런 교훈은 첨단과학 기술 시대를 맞이한 지금에 와서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것이 이번 지카바이러스병 유행으로 입증됐다.
새로운 감염병이든, 재유행감염병이든 세계적 대유행으로 이어질 때까지 모두 풍토병(endemic)-유행병(epidemic)의 단계를 항상 거친다. 사스나 신종플루 등은 강한 전파력과 교통수단의 발달, 그리고 국제 간 활발한 교류를 등에 업고 이런 단계를 눈 깜짝 할 사이 거치며 순식간에 팬데믹의 대열로 뛰어올랐다.

지카, 에이즈 모두 원인바이러스는 원숭이에서 시작
하지만 에이즈와 지카바이러스병은 이와는 전혀 다른 길을 걸었다. 에이즈와 지카바이러스병은 많은 점에서 서로 닮았다. 원인 바이러스의 기원(origin)이 원숭이라는 점과 아프리카에서 시작됐다는 사실, 수혈, 성 접촉으로 전파된다는 점, 그리고 인간이 그들의 존재를 알아차렸을 때 이미 많은 사람들의 몸에는 그들이 들어와 자리 잡고 증식하고 있었던 것 등이다.
지카바이러스는 지난해 갑자기 나타난 것처럼 보였지만 알고 보니 이미 오래 전부터 인간의 몸을 야금야금 갉아먹고 있었다. 그리하여 지금 캐리비언 국가 사람들은 캐리비언 해적의 출몰을 무서워하는 것이 아니라 지카바이러스의 습격을 가장 두려워하고 있다.
2016년 2월초 현재 브라질에서만 150만 명이 이 바이러스에 감염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콜롬비아에서도 2만 명의 환자가 발생한 것으로 추산된다. 온두라스, 베네수엘라, 엘살바도르 등에서도 3천~5천명의 감염자가 나오는 등 모두 160만 명가량이 지카바이러스병에 걸린 것으로 나타났다. 이른 시일 안에 그 확산을 막지 못한다면 제2의 에이즈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다.
지카바이러스 1947년 우간다 지카 숲 서식 원숭이에서 처음 발견
지카바이러스는 1947년 우간다 엔테베 인근 지카 숲에서 서식하는 붉은털 원숭이(rhesus monkey)에서 처음 분리됐다. 그 뒤 의학자들이 사람의 혈청을 분석한 결과 1950년대 아프리카와 아시아인 일부에서 바이러스 감염이 확인됐다.
이어 2007년까지 지카바이러스는 인간의 눈을 피해 ‘은인자중’하며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다. 2007년 아프리카와 아시아 국가가 아닌 지역에서는 처음으로 마이크로네시아연방국에서 그 모습을 한번 슬쩍 드러냈다. 그 이전까지 지카바이러스열 환자는 전 세계에서 14명에 그쳤다.
지카바이러스는 2013년 10월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에서 다시 한 번 그 존재를 드러내는 등 당시까지 모두 8,723사례의 감염을 일으켰다. 마이크로네시아나 폴리네시아는 국제교류가 왕성하지 않고 국제적으로 주목받는 국가들도 아니어서 이곳에서의 유행은 풍토병 수준으로 취급당했다.
지카는 드디어 브라질에서 진면목을 드러냈다. 브라질 보건부는 2015년 5월 지카바이러스가 브라질에서 활개를 치고 다닌다고 공식보고 했다. 소두증 아이들이 급속히 늘어난다는 사실도 함께 알려지면서 지카바이러스 확산과 연관돼 공포가 증폭됐다. 마침내 브라질 정부는 11월 11일 국가공중보건비상사태를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지카바이러스병이 풍토병을 넘어 유행병으로 번졌으며 사실상 팬데믹 문턱에까지 이른 것이다.

인간이 감염병의 정체를 알았을 때 이미 그 원인 바이러스가 세계 곳곳에서 퍼져 있었던 것은 지카가 처음은 아니다. 20세기 후반기, 그리고 21세기 들어서도 세계 공중보건 위협의 주역인 에이즈 바이러스는 지카바이러스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정말 은밀하게 자손을 퍼트리는 감염의 달인이었다.
1981년 4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몇몇 병원에서 젊은 남성동성애자, 즉 게이들 가운데 정상인은 걸리지 않는 희귀 세균성 폐렴인 뉴모시스티스 카리니(Pneumocystis carinii) 폐렴이 발견됐다. 이들에게서는 면역체계가 무너졌을 때 입안과 목구멍에 생기는 곰팡이 캔디다(Candida) 감염증 등의 여러 증상과 질병이 나타났다. 이들 중 사망자가 속속 나오기 시작했다.
뉴모시스티스 카리니 폐렴 에이즈 환자 1952년 미국에서 입원 기록
미국 질병통제센터(CDC)는 <질병과 사망 주보>(MMWR, Morbidity and Mortality Weekly report)란 주간보고서를 매주 발행(우리나라 질병관리본부도 이와 같은 주보를 매주 발행하고 있음)하는데 두 명의 사망자가 생기자 이들에 관한 내용을 주보에 실어 전국 병의원과 의사들에게 배포했다. 에이즈란 거대한 죽음의 빙산이 물위로 솟구치는 순간이었다. 그것은 재앙을 담은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젖힌 격이었다. 그 뒤 에이즈가 지구촌에 어떤 충격과 공포를 주었는지, 그리고 지금도 주고 있는지는 우리 모두 잘 아는 바대로다.
그 뒤 에이즈가 언제, 어디서 시작됐는지 의학자들과 의사학자(醫史學者)들의 에이즈 기원 찾기가 시작됐다. 프랑스의 의사이자 의사학자인 미르코 그르멕(Mirko D. Grmek)이 쓴 <에이즈의 역사>(Histoire du sida)와 영국의 에드워드 후퍼(Edward Hooper)가 쓴 <강-HIV와 AIDS 기원을 찾아가는 여행>(The River-A journey to the source of HIV and AIDS)은 에이즈의 역사를 오롯이 담았다.
이들 책은 1952년 미국 테네시 주의 한 병원에 뉴모시스티스 카리니 폐렴 환자가 입원한 기록이 있으며 1958년 영국 맨체스터에서 선원이 기묘한 병에 걸려 고통을 겪다가 1959년 사망한 사실이 있어 이들이 미국과 영국에서 발생한 최초의 에이즈 환자들(?)이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
또 의사학자들은 역학적 정보를 바탕으로 1976년 미국에서 에이즈가 사실상 유행하기 시작했다고 추정하고 있으며 같은 해 아프리카 적도 부근에서 에이즈에 감염된 유럽인이 몇 명 입원한 적이 있었다고 보고 있다. 1979년 12월에는 미국에서 혈우병 환자 가운데 에이즈 환자가 있었다는 것이 나중에 드러났다.
감염병은 유행하기 전 얼마나 일찍 그 정체를 정확하게 파악하느냐에 방역의 성패가 달려 있다. 만약 에이즈를 1970년대 중반이나 후반에라도 알아차렸다면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대재앙의 수준으로까지 가지 않았을 것이다. 이는 지카바이러스병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과거는 되돌릴 수 없다. 지금이라도 지카가 팬데믹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 대한민국에 상륙하는 것을 막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해야 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 안종주 과학저술가
- 저작권자 2016-02-16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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