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언스타임즈 로고

지동설 주장한 조선의 코페르니쿠스 홍대용 (상) /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 (23)

  • 콘텐츠 폰트 사이즈 조절

    글자크기 설정

  • 프린트출력하기

지난 5월 29일 천안시 동남구 수신면 장산서길 113번지에 연면적 3443㎥ 규모의 과학관이 개관했다. 임대형 민간투자사업으로 추진돼 총사업비 202억원이 투입된 이 과학관의 1층에는 천문의기가 전시된 ‘달빛마당’과 천체 투영장비 등이 설시된 ‘플라네타리움’이 조성됐다.

또한 4층에는 800㎜ 주망원경과 15대의 보조망원경을 갖춘 천체관측실이 들어섰으며, 상설전시관인 3층에는 여러 가지 과학체험기구가 있는 과학체험관 및 과학사전시관을 비롯해 홍대용 선생의 일대기를 전시한 ‘홍대용주제관’으로 구성됐다.

홍대용주제관이 있는 이유는 바로 이 과학관이 천안에서 출생한 ‘조선의 코페르니쿠스’ 홍대용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된 ‘홍대용과학관’이기 때문이다.

청나라의 문인 엄성이 그린 홍대용 초상화. ⓒ 퍼블릭 도메인
청나라의 문인 엄성이 그린 홍대용 초상화. ⓒ 퍼블릭 도메인

홍대용은 중국을 통해 들어온 서양과학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과학사상가로서 박지원, 박제가 등의 실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북학사상의 선구자이다. 특히 전통적인 우주관을 비판하고 지동설과 무한우주의 개념을 제시함으로써 중국 본위의 중화주의 세계관을 버리고 인간 및 모든 사물의 평등관을 세우는 데 일조했다.

그는 1731년(영조 7) 홍대용과학관이 들어선 터의 바로 앞인 충남 천안시 수신면 장산리 수촌마을에서 나주목사를 지낸 아버지 홍역(洪櫟)과 어머니 청풍 김씨 사이의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할아버지 홍용조는 대사간과 충청감사를 지냈으며, 증조부인 조숙은 참판을 지낸 높은 문벌의 집안이었다.

홍대용은 12세부터 35세까지 당시 경기 지역의 대표적 성리학자 김원행이 있는 석실서원에서 수학했다. 이 기간 동안 박지원 및 박제가 등 북학파를 형성했던 인물들과 교유하며 엄격한 학풍 하에 도학자로서의 기반을 닦았던 것.

성리학 대신 자연과학을 공부해

하지만 그는 여러 차례 과거에 응시했으나 그때마다 번번이 낙방했다. 학문을 게을리 했거나 머리가 나빠서가 아니라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그는 과거시험과 관련이 있는 학문 대신 자연과학 등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특히 관심을 보인 학문은 천문학, 수학, 역산학, 음악, 병법 등 실질적인 분야였다. 또한 명문가 출신이어서 과거가 아니어도 마음만 먹으면 출세는 보장받을 수 있었지만, 관직에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어릴 때부터 학자가 되려면 필히 공부해야 했던 성리학에 대해 의문을 가졌던 것으로 전해진다. 인간의 도리를 가르치기는 하지만 농사짓는 법 등 인간의 삶에 실용적인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이유 때문이다.

학문에 대한 그의 이 같은 성향은 중국에 사신으로 가는 작은 아버지를 따라 북경에 가 선진 학문 및 서양 과학 문물을 접하면서 마치 봇물 터지듯이 크게 영향을 받았다. 당시 중국에 파견되던 사신단은 삼사(三使)라 하여 정사, 부사, 서장관이 있었는데, 그의 작은 아버지 홍억(洪檍)은 정언, 교리 등의 벼슬을 지내다 1765년 말 서장관이 되어 북경 사행에 참여했다.

홍대용은 홍언의 수행군관, 즉 자제군관(子弟軍官)이란 자격으로 중국에 갔다. 사신의 경우 공식 일정을 소화하느라 바쁘지만, 친인척 중에서 임명되는 자제군관들은 상대적으로 일정이 여유로웠다. 이때 북경에서 약 60일간 머무르는 동안 그는 엄성, 반정균, 육비 등의 중국 학자들과 교우관계를 맺으면서 그들의 개방적인 학문 태도에 감명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에 온 선교사들로부터 서양 문물 접해

특히 그중에서도 엄성과는 뜻이 잘 맞아 조선에 돌아와서도 소식을 주고받을 만큼 친했다. 엄성은 죽기 전에 손수 붓으로 홍대용의 초상화를 그려서 보냈는데, 그 초상화는 오늘날에도 전해지는 그의 유일한 초상화이다.

홍대용은 북경에 머물면서 서양 선교사들을 만나 천주교와 천문학을 논하면서 그들이 갖고 있던 회중시계와 만년필 등의 서양 문물을 접했다. 만년필을 처음 본 그는 먹물이 안에 들어 있어 편리하다며 정교하게 만든 솜씨에 탄복했다.

그는 이 같은 서양 문물의 우수함이 수학과 정교한 관측에 있음을 깨닫고 서양과학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그렇게 해서 나온 책이 바로 그의 저서 ‘주해수용’과 ‘의산문답’이다.

서양의 수학과 천문학, 천문기구를 직접 연구한 결과를 담은 주해수용에서는 오늘날의 구구단을 소개한 것은 물론 구구단을 응용하는 방법까지 예시로 설명해 놓았다. 또 원주율을 구하는 방식과 측량법 등도 기록해 두었다.

그는 이 책에서 구장산술 및 수학계몽, 수학통종, 수법전서 등 당시의 수학책을 정리하고 연구해 잘못된 부분을 지적하고 분석했다. 또 당시 수학이 구장산술의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을 비판했으며 면적, 체적, 비율법, 약분법 등 근대적인 표현을 사용했다. (하편에서 계속)

이성규 객원편집위원
2noel@paran.com
저작권자 2014-09-03 ⓒ ScienceTimes

태그(Tag)

관련기사

목록으로
연재 보러가기 사이언스 타임즈에서만 볼 수 있는
특별한 주제의 이야기들을 확인해보세요!

인기 뉴스 TOP 10

속보 뉴스

ADD : 06130 서울특별시 강남구 테헤란로7길 22, 4~5층(역삼동, 과학기술회관 2관) 한국과학창의재단
TEL : (02)555 - 0701 / 시스템 문의 : (02) 6671 - 9304 / FAX : (02)555 - 2355
정기간행물 등록번호 : 서울아00340 / 등록일 : 2007년 3월 26일 / 발행인 : 정우성 / 편집인 : 차대길 / 청소년보호책임자 : 차대길
한국과학창의재단에서 운영하는 모든 사이트의 콘텐츠는 저작권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전재,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사이언스타임즈는 과학기술진흥기금 및 복권기금의 지원으로 우리나라의 과학기술 발전과 사회적 가치 증진에 기여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