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ly 26,2017

전투에 앞장선 용장, 원균

인품이 청렴하고 부하에 신뢰 얻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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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와 전쟁 “저에겐 1차 연평해전이 너무나 자랑스럽습니다.”

1999년 6월 제1연평해전에 참전했던 친척 동생의 말이다. 제1연평해전은 북방한계선(NLL)을 넘어 우리 영해를 침범한 북한 경비정을 해군의 고속정이 선체를 충돌시키는 방법으로 밀어내는 과정에서 일어난 사태였다.

1999년 6월 15일 80t급 북한 경비정 2척이 꽃게잡이 어선 20척과 함께 NLL 남쪽 2㎞ 해역까지 내려왔으며, 이어서 420t급 2척이 어뢰정 3척의 호위를 받으며 남하했다. 이에 우리 해군은 고속정과 초계함 10여 척을 동원해 밀어내기식 공격을 감행했다.

북한 어뢰정과 경비정 명중

충돌공격을 받은 북한 경비정은 소총으로 선제 사격을 하다가 25㎜ 기관포를 발사했으며, 북한 어뢰정 3척도 공격에 가담했다. 해군은 즉각 초계함의 76㎜ 함포와 고속정의 40㎜ 기관포 등으로 응사해 북한 어뢰정과 경비정을 명중시켰다.

이 교전에서 북한의 어뢰정 1척이 침몰했고, 420t급 경비정 1척이 대파됐으며, 나머지 경비정 3척도 선체 등이 파손된 채 퇴각했다. 우리 해군은 선체가 가벼운 피해를 입고 장병 7명이 부상한 정도였다. 그런데 이 전투에서 사용된 선체를 충돌해 공격하는 방법은 임진왜란 때 원균 장군이 해전에서 사용하던 방법이었다.

1592년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왜군을 동원해 조선을 전격적으로 침공했다. 조선은 전쟁에 대한 준비가 거의 없는 실정이었다. 왜군이 부산에 상륙하면서 진격하자 곳곳의 조선장군과 지방 관리들은 도망치기 바빴다.

척후 통해 대응책 모색한 원균

이 당시 조선군이 죽지 않았음을 보여준 장군이 원균 장군이다. 그는 당시 경상우수사로 영남지역의 해역 반을 책임지는 제독이었다. 경상좌수사였던 박홍과 장병들이 왜군과 싸우지도 않고 다 도망치면서 경상좌수영은 궤멸했다.

이제 경상우수영의 원균만 남았다. 700여 척의 전함으로 침략한 일본과 맞싸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경상우수사 원균은 척후를 통해 대응책을 모색했다. 흩어진 군사들을 수습해 주요 지역에 대한 방어를 철저히 하는 한편 전라좌수사 이순신 장군에게 원병을 요청했다. 5월 7일 옥포해전에서 이순신과 합세해 적선 26척을 격침했다.


이후 합포해전·적진포해전·사천포해전·당포해전·당항포해전·율포해전·한산도대첩·안골포해전·부산포해전 등에 참전해 이순신과 함께 일본 수군을 무찔렀다.

해전에서 사용한 전술에서 이순신과 원균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이순신은 선박의 빠른 이동과 막강한 화력을 동원한 포격 위주의 공격을 선호했다.

그러나 원균은 독특한 방법을 사용했다. 그의 전투 스타일은 과감한 당파(撞破) 작전이었다. 왜군의 전함은 삼나무로, 조선군의 전함은 소나무로 돼 있어 우리 배가 더 견고하고 튼튼한 점을 이용한 것이다.

그는 과감하게 적선에 부딪쳐 왜군의 배를 격침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이 전술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근거리 전투 방법을 사용해야 한다. 조총으로 무장돼 근거리 전투에 우월함을 보였던 왜군들과의 전투에서는 위험 부담이 매우 큰 전투 방식이었다.

그러나 원균과 그의 장수들은 죽기를 각오하고 적선으로 뛰어들어 예상하지 못한 전공을 세우곤 했다. 임진왜란 초기에 왜군을 1개월간 전라도 해역에 진출하지 못하게 한 것은 수적 열세를 용맹으로 막아낸 원균 장군의 공이 컸다고도 할 수 있다. 이렇게 원균이 이순신과 협력해 승전을 거듭할 무렵 육지에서는 신립 장군이 탄금대에서 패배하면서 한양이 왜군에게 함락됐다.

원균 장군, 기문포 해전에서 승리

1593년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면서 그와의 불화 탓에 원균은 해군을 떠나 육군인 충청절도사로 자리를 옮겨 상당산성을 개축했고 이후에는 전라좌병사로 옮겼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면서 이순신의 파직으로 수군통제사가 됐다. 원균 장군은 기문포해전에서 승리해 조선군의 사기를 드높였다.

그러나 안골포와 가덕도에 있는 왜군 본진을 공격하는 작전을 두고 도원수 권율에게 육·해군의 협공작전을 건의했다가 묵살당하고 오히려 곤장형까지 받았다. 결국, 칠천량해전에서 참패하고 전라우도 수군절도사 이억기 등과 함께 전사하게 된다.


원균은 경상도병마절도사 원준량의 장남으로 평택시 도일동에서 태어났는데, 원주 원씨 집안은 대대로 뛰어난 무인이 배출된 명문집안이다.

원균 장군의 형제들과 가까운 친척들이 임진왜란 때 국가를 위해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했던 애국적인 집안이기도 하다. 원균은 무과에 급제한 뒤 조산만호(造山萬戶)로 있을 때에는 여진족을 토벌한 공로로 젊은 나이에 부령부사로 특진했다.

성격이 호탕하고 용맹해 전투에 앞장서는 용장이며, 청렴하고 부하들을 아껴 신뢰를 얻었고, 상당산성을 수축할 때는 공사장에 토굴을 파고 기거하며 공사를 독려했다는 실록의 기록도 있다. 해군 제독으로는 다소 부족했을지 몰라도 육군 장군으로는 참으로 용맹한 장군이었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1603년, 선조임금은 이순신·권율과 함께 선무공신 1등에 올려 그의 애국심과 공로를 기렸다.

  • 글: 반기성 연세대 지구환경연구소 전문연구원다른 기사 보기
  • 저작권자 2011.04.28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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