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ne 22,2018

이름 속에 담긴 사연은?

이름 외치는 사람 '노멘클라토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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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로 6·13 지방선거가 막을 내렸다. 선거철에는 거리 곳곳에 자신의 이름과 얼굴을 알리려는 후보들의 선거운동이 진행된다. 후보자들은 유권자들에게 악수 공세를 펴며 자신의 기호와 이름을 외치는데, 어떤 경우에는 곁에 있는 보좌진이 이 일을 도맡기도 한다.

이를테면 후보자는 유권자의 손을 잡으며 고개를 숙이고, 보좌진은 “기호 0번 000입니다!”라는 식이다.

하지만 로마 시대였다면 상황은 정반대가 되었을 것이다. 후보자가 유권자의 손을 잡으면 보좌진은 ’이 분은 000십니다!”로 말이다.

이렇게 로마 시대에는 후보자에게 유권자의 이름을 알려주는 노예가 있었는데 노멘클라토르(nomenclator)라 불렀다.

노멘클라토르는 선거 때만 요긴한 것은 아니었다. 선거 후에도 주인을 보좌했다. 아침에는 주인에게 인사 올 사람들의 이름을 알려주었고, 주인이 밖으로 나가면 그 곁을 보좌하며 ‘저 노예는 누구?’라고 물으면 신속하게 답해주었다.

노멘클라토르는 그렇게 상당한 인명을 기억했을 텐데, 도대체 어떻게 그 많은 이름을 외웠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의 기억은 금방 사라지는(단기) 기억과 오래 남는(장기) 기억으로 나눈다. 출근길에 기억해야했던 환승역에 관한 기억, 퇴근길에 들러 사야할 물건들의 목록은 그 일이 끝나면 금세 휘발된다.

하지만 자신의 전화번호, 친구의 이름, 가족의 생일에 대한 기억은 아주 단단하다. 곧 사라질 것과 오래 기억에 남길 것을 정하는 곳은 뇌의 측두엽에 있는 해마(海馬)다. 모든 기억들은 해마의 ‘미래 기억 등재 위원회(?)’를 통과해야만 장기 기억으로 지정되어 저장된다.

뇌 속의 해마는 바다 속 해마의 이름을 빌려왔다.  ⓒ 박지욱 / ScienceTimes

뇌 속의 해마는 바다 속 해마의 이름을 빌려왔다. ⓒ 박지욱 / ScienceTimes

장기 기억으로 저장되려면 먼저 뇌에 인지(cognition)가 되어야 하고, 인지되려면 주목(attention)을 받아야 한다.

노멘클라토르는 사람들의 특징을 주목했고, 인지 과정을 거쳐 장기 기억 속에 저장했을 것이다. 아마도 노멘클라토르는 대상의 얼굴, 머리 색, 덩치, 인종, 출생지, 직업, 심지어는 성장 배경에서도 특별한 점을 뽑아내어 쉽게 기억하려 했을 것이다.

대상의 외형은 물론이고, 그의 배경적인 역사-지리-문화적인 정보를 추출하여 꼬리표를 달아 외웠을 것이다. 덕분에 노멘클라토르는 살아있는 인명사전이 되었다. 노예제가 사라진 훗날, 사람에 대한 주요 정보를 지닌 마당발을 노멘클라토르라 부른 것도 우연이 아니다.

그렇다면 노멘클라토르의 비법을 이용해 우리도 ‘이름의 달인’이 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달인까지는 아니라도 책이나 전문지에 등장하는 까다로운 과학 학술 용어나 명칭들을 쉽게 외울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우리도 달인의 비법을 응용해보면 어떨까?

 새 이름을 만날 때마다 배경 정보나 관련 이름들을 파악하여 꾸러미로 만든다면 이름은 쉽게 기억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그런 과정을 통해 우리는 이름은 물론이고 그 이름의 배경지식까지 덤으로 얻게 된다.

굳이 새로운 이름이 아니라도 좋다. 이미 우리가 잘 아는 이름도 노멘클라토르의 눈으로 다시 생각해보자. 나직이 불러보고, 그 뉘앙스도 느껴보고, 작명의 원리와 역사-지리학적 배경도 살펴보자.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이름은 자신의 얼굴을 드러내고, 활짝 웃으며 놀라운 사연을 들려줄 것이다.

새롭게 연재될 <이름들의 오디세이>는 바로 그 이야기다.

원래 오딧세이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지략가 오딧세우스가 바다를 떠돌며 겪은 기상천외한 모험담을 말한다. <이름들의 오디세이>는 이름으로 이루어진 더 넓은 우주를 좌충우돌 탐사하는 지적인 여정이 될 것이다. 이제 그 첫 이야기를 시작한다. 오늘은 가볍게 몸 풀듯 ‘이름’으로 시작한다.

쥘 베른의 『해저 2만리』에 등장하는 네모 선장.  ⓒ 위키백과

쥘 베른의 『해저 2만리』에 등장하는 네모 선장. ⓒ 위키백과

nomenclator 노멘클라토르 ; 인명록, 용어집

nomen (라틴어) 이름 + clator (라틴어)외치는 사람

nomenclature 명명법, 작명법

nominate 후보로 이름이 불리다(指名)

innominate 이름이 없는(無名)

in nomine dei amen; (라틴어) 신의 이름으로 아멘

Nemo 네모; 쥘 베른의 SF 『해저 2만리』에 나오는 잠수함 <노틸러스>의 선장. ‘아무도 아니라는’는 뜻의 라틴어다. 이 이름은 오딧세이에서 오딧세우스가 외눈박이 거인을 속일 때 썼던 이름인 Outis(그리스어)의 라틴어 버전이다. ‘네모가 나를 괴롭혔다’라는 말은 ‘아무도 나를 괴롭히지 않았다’라는 말이 된다.

odyssey 오딧세이; (그리스어) 오딧시우스(Odyseus) / (라틴어) 율리시즈(Ulysses)의 탐험기

중국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사물의 이름을 지어주는 데서 지혜가 싹튼다.” 

자, 이제 사물의 이름 속에 담긴 지혜를 풀어보는 긴 여정을 시작해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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