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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구 격퇴에 화약만한 것이 없다” 최무선 (상) /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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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영천시 금호읍 원기리에는 가족 단위의 과학 체험을 할 수 있는 ‘최무선과학관’이 자리 잡고 있다. 2007년 교육과학기술부(현 미래창조과학부)의 지방테마과학관 사업으로 선정돼 2012년 4월에 개관한 이 과학관은 4만1천여㎡의 대지 면적에 지하 1층, 지상 2층의 건물이 들어서 있다.

과학관 1층에는 화약 발전사와 제조과정에 대한 설명과 함께 각종 총통 복제유물이 전시되어 있으며, 2층에서는 최무선의 활약상을 담은 영상이 상영되고 불꽃놀이 및 화포, 화차 등을 체험할 수 있다. 또한 과학관 외부에는 탱크와 항공기, 수륙장갑차, 나이키미사일, 함포 등 군 퇴역 장비들이 전시되어 있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화약을 만들어 후대의 화약 발전에 크게 기여한 최무선은 고려의 무인이자 과학자였다. 고려시대에 주요 인물로 활약했다면 수도인 개경에서 살았을 텐데 왜 영천시에 그의 과학관이 건립된 것일까.

최무선과학관의 1층에 전시되어 있는 현자총통 등의 복제 유물. ⓒ 최무선과학관
최무선과학관의 1층에 전시되어 있는 현자총통 등의 복제 유물. ⓒ 최무선과학관

최무선의 출생시기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1325년경 바로 이곳 경북 영천시의 오계동 마단에서 광흥창사를 지낸 최동순의 아들로 태어난 것으로 전해진다. 광흥창사란 당시 관리들의 녹봉을 맡아 관리하던 광흥창의 책임자로서 정5품의 관직이었다.

부친이 언제 개경으로 진출했으며, 최무선이 어떻게 관직에 올랐는지도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의 어린 시절 또한 알려진 게 별로 없다. 그런데 그가 사망한 1395년 4월 19일자의 ‘태조실록’을 보면 그의 성품과 벼슬에 대해 언급한 기록이 나온다.

“천성이 기술에 밝고 방략이 많으며 병법을 말하기 좋아하였다. 고려조에 벼슬이 문하부사에 이르렀다. 일찍이 말하기를 ‘왜구를 제어함에는 화약만한 것이 없으나, 국내에는 아는 사람이 없다’라고 하였다.”

중국 상인에게서 화약 제조법 알아내

그가 이처럼 화약에 대해 일찍이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아마 청년 시절의 직접적인 체험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14세기 중반 일본은 오랜 전란으로 피폐해지면서 규슈와 쓰시마 등의 주민들이 왜구로 변해 약탈에 나서는 일이 잦았다. 1350년 이러한 왜구들이 경상도와 전라도의 해안 지역에 나타나 막심한 피해를 주었는데, 이후 왜구의 침탈은 해가 갈수록 늘어나는 실정이었다.

최무선의 부친인 최동순이 책임자로 있던 광흥창은 예성강 하구를 통해 전국에서 운반되던 곡식을 담당했다. 그 시절 전국에서 거둔 세금은 돈이 아니라 곡식이었으며, 이 때문에 왜구는 예성강으로 통하는 곡식을 노렸다. 부친이 맡은 관직 자체가 왜구의 피해를 가장 직접적으로 느끼는 자리였으므로 최무선은 일찍부터 왜구의 피해 정황에 대해 잘 알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최무선은 왜구를 격퇴하기 위해서 화약만큼 좋은 것이 없다고 생각해 중국에서 오는 상인이 있으면 무조건 만나 화약 만드는 법을 물었다. 화약 제조법은 오로지 중국만이 가진 첨단 군사기술이자 국가기밀이어서 알아내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당시만 해도 중국에서 수입한 화약을 불꽃놀이에만 이용하곤 했던 터라 화약의 중요성에 대해 관심을 두는 이도 없었다.

그러던 차에 마침 이원이라는 중국 강남의 상인이 화약 제조법을 대강 안다고 하여 최무선은 그를 자기 집에 데려다 의복과 음식을 주고 수십 일 동안 극진히 대접하여 요령을 알아냈다. 고려 말 조선 초기의 문신인 정이오가 지은 ‘화약고기’에 의하면, 최무선은 중국어를 잘했다고 한다.

그때 최무선이 이원으로부터 배운 기술은 염초 제조법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화약의 재료 중 목탄과 황은 쉽사리 구할 수 있는 물품이었지만, 초산(질산칼륨)인 염초는 여러 화학공정을 거쳐야 만들 수 있으므로 당시의 기술로는 제조가 매우 어려웠기 때문이다.

각고의 노력으로 화약 제조 비법을 터득한 최무선은 도당(都堂)에 수차례 건의한 끝에 마침내 1377년 10월 화약 제조에 관한 정부 공식기관인 화통도감을 발족시켰다. 최무선의 주도로 화통도감에서는 대장군포, 이장군포, 삼장군포, 육화석포, 화포, 신포, 화통, 화전, 철령전, 피령전, 질려포, 철탄자, 천산오룡전, 유화, 주화, 촉천화 등 20여 가지의 각종 첨단 화약 무기를 개발해냈다. 더불어 이를 실을 수 있는 ‘누선’이라는 전함의 건조에도 힘썼다. 이후 고려 군대는 화통방사군이라는 화약무기 발사 전문부대를 편성해 막강한 위력을 지니게 됐다.

최초로 함포 공격을 감행한 해상 전투

최무선의 출생지인 경북 영천의 과학관 외에도 그를 기념하는 시설물을 설치한 지방자치단체가 또 있다. 전북 군산시 성산면 성덕리 금강호 시민공원의 중앙광장 옆에 17.9미터 높이로 만들어진 진포대첩기념비가 바로 그것. 이 기념비는 돛을 상징하는 큰 화강암 날개 모양의 두 조형물이 만나는 가장 높은 곳에 진포대첩에서 왜구를 격퇴한 화포가 설치되어 있다.

진포대첩은 화통도감이 설치된 지 3년이 흐른 후인 1380년 8월 진포(지금의 군산 내항 일대)에서 왜구를 격퇴한 전투이다. 당시 500척의 대선단을 이끌고 온 왜구들은 진포 앞바다에서 큰 밧줄로 배들을 서로 연결해 정박한 다음 1만명 이상의 병력으로 연안에 상륙해 주변의 고을들을 무자비하게 약탈했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상황은 ‘고려사 열전’ 나세 장군편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왜선 500척이 진포 어구에 들어와서 배를 매어 두고 일부 병력으로 수비하면서 상륙해 분산되어 각 주와 각 군으로 들어가 함부로 방화 약탈하였다. 시체가 산과 들을 덮었고 곡식을 그 배로 운반했는데 땅에 흩어진 쌀이 한 자 두께가 되었다. 나세 등이 진포로 가서 최무선이 만든 화포를 사용해 적선을 소각했다. 연기와 불길이 하늘을 덮었고 배를 지키던 적병은 거의 다 타죽었으며 바다에 뛰어들어 죽은 자도 많았다.”

‘고려사 열전’이란 고려사에 등장한 위인들의 전기를 따로 모아둔 부분이며, 나세 장군은 원래 원나라 사람이었다가 고려로 귀화해 홍건적 및 왜구와의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운 인물이다. 그런데 ‘고려사 열전’에 최무선의 전기는 따로 들어 있지 않다.

기록에 의하면 나세가 상원수로, 최무선이 부원수, 심덕부가 도원수로 임명되어 전함 100척으로서 왜구를 물리치고 포로로 잡혀 있던 우리나라 백성 234명을 구했다고 되어 있다. 진포대첩은 고려군이 자체 제작한 화기로 거둔 승리였고, 군선에 화포를 장착하여 최초로 함포공격을 감행한 해상전투로서 의미가 매우 크다. (하편에서 계속)

이성규 객원편집위원
2noel@paran.com
저작권자 2014-07-09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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