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vember 24,2017

역대 세 번째 사후 노벨상 수상자

노벨상 오디세이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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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대전 때 연합군은 독일과 동맹을 맺고 있던 터키의 갈리폴리 반도에 상륙작전을 감행했다. 하지만 터키군의 선전으로 연합군은 수많은 사상자를 내며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영국군 약 20만5000명, 프랑스군 약 4만7000명 등 연합군의 사상자는 무려 25만2000명에 이르렀으며, 터키군 사상자도 25만여 명에 달했다.

그 수많은 사상자 중에는 영국의 젊은 물리학자 헨리 모즐리도 포함되어 있었다. 어니스트 러더퍼드의 제자였던 그는 특성X선을 연구해 ‘모즐리의 법칙’을 발견함으로써 원자구조론에 크게 기여했다. 또한 스승인 러더퍼드의 원자 모형을 과학적으로 입증하고 더 발전시켜, 현대 원소주기율표를 완성하는 업적을 남겼다.

하지만 그는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27세의 나이로 자원 입대해 갈리폴리 전투에서 터키군의 총에 맞아 전사하고 말았다. 만약 죽지 않았다면 그는 다음해인 1916년 노벨 물리학상의 유력한 수상자였다. 실제로 모즐리의 연구를 바탕으로 주기율표를 최종 완성한 스웨덴의 물리학자 칼 시그반은 1924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사망 3일 후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로 결정돼 사후 노벨상을 받은 랠프 스타인먼 교수. ⓒ 연합뉴스

사망 3일 후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로 결정돼 사후 노벨상을 받은 랠프 스타인먼 교수. ⓒ 연합뉴스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는 무려 다섯 차례나 노벨 평화상 후보에 오른 인물이다. 하지만 그는 결국 노벨상을 받지 못했다. 1948년에는 노벨상 수상이 유력했는데, 후보를 선정하기 불과 이틀 전에 암살당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사후에도 상을 줘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지만, 노벨위원회는 결국 그해 노벨 평화상 수상자를 선정하지 않는 것으로 결론 내렸다.

죽은 사람을 수상 후보자로 지명하지 않는다는 노벨상의 원칙이 반드시 지켜진 것은 아니다. 스웨덴의 시인 에리크 악셀 칼펠트가 바로 그 주인공. 다라나 지방의 사람과 자연을 시로 그려낸 그는 1918년 사실상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내정됐다. 그런데 수상자가 발표되기도 전에 거부했다.

오랫동안 노벨위원회 위원으로 근무했던 그는 자신의 수상자 선정 사실을 미리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1931년 4월 에리크가 사망하자 노벨위원회는 그해 11월 노벨 문학상을 그에게 추서했다. 사후 노벨 수상의 최초 사례였다.

그로부터 30년 후인 1961년에는 유엔의 2대 사무총장 다그 함마르셀드가 사후에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한국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렀던 1953년에 유엔 사무총장에 취임한 그는 약소국을 보호하는 노력이 유엔의 임무에 포함돼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 유엔의 대의와 원칙을 밀어붙이는 모델을 만든 주인공이다.

1974년부터 생존자만 수상할 수 있게끔 규정 개정

유엔평화유지군 창설을 주도한 그는 특히 냉전체제로 재편되는 격동기에 유엔이 독립된 권위를 갖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해 존경받는 국제 지도자로 부상했다. 그러나 그는 1961년 9월 아프리카 콩고의 내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현지로 가던 중 항공기 사고로 사망했다. 노벨위원회는 그를 그해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선정했다.

이후 호사가들 사이에서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사후에 노벨상을 수상한 단 2명이 모두 노벨상 주최국인 스웨덴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노벨위원회는 1974년부터 생존자만이 수상할 수 있게끔 규정을 바꾸었다. 다만 수상자로 결정되고 나서 2개월 후에 열리는 시상식 사이의 기간에 사망할 경우에는 예외로 하기로 했다.

그런데 지난 2011년 아주 묘한 일이 벌어졌다. 노벨위원회는 그해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로 미국 랠프 스타인먼 록펠러대학 교수를 비롯해 브루스 A 보이틀러, 율레스 A 호프만이 선정됐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수상자 발표 후 록펠러대학 측은 성명을 통해 랠프 스타인먼 교수가 3일 전에 이미 사망했다고 밝힌 것이다.

캐나다의 독일계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나 하버드대학원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스타인먼 교수는 1973년 쥐의 비장에서 떼어낸 물질에서 이전의 면역계에서 다루지 않았던 세포를 발견했다. 나뭇가지 모양으로 생겨 ‘수지상세포’라고 명명된 이 물질은 병을 일으키는 바이러스나 세균 등의 항원을 잡는 파수꾼임이 밝혀졌다.

의학계에서는 수지상세포의 발견으로 면역작용을 규명하게 됨으로써 암과 감염질환, 염증질환의 예방과 치료제 개발에 새장이 열렸다고 평가했다. 이후 수지상세포의 다양한 기능을 이용한 신약들이 개발되었는데, 전립선암 치료제로 사용되는 시푸류셀-T 성분의 약품이 대표적인 사례다.

자신이 개발한 치료법 덕분에 사후 노벨상 수상

공동 수상자로 선정된 보이틀러와 호프만은 외부에서 침입한 병원체를 인식하는 수용체를 발견하고, 이 수용체에 의해 시작되는 선천성 면역반응을 규명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이들이 수상자로 선정됨으로써 면역학 분야는 15년 만에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를 배출하는 경사를 맞았다.

그러나 스타인먼 교수가 이미 사망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노벨위원회는 긴급위원회를 개최해야 했다. 그의 수상자 자격 유지를 의논하기 위해서였다. 그 결과 스타인먼 교수에게 노벨상을 수여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그 이유에 대해 노벨위원회 측은 스타인먼의 사망 사실을 수상자 발표 후에 알았기 때문이라고 해명했다. 즉, 심사가 끝나고 수상자가 결정된 이후의 사망 사실 인지는 수상자 변동에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는 의미다. 이로써 1974년 규정 개정 이후 유지되어온 노벨상의 사후 수상 금지 원칙이 또 다시 깨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사실 스타인먼의 노벨상 수상은 그 자신이 발견한 수지상세포 덕분에 가능했다. 그가 췌장암에 걸린 것은 사망 4년 전이었다. 스타인먼 정도의 진행성 췌장암 환자들이 생존할 수 있는 기간은 고작 수개월이다.

그러나 그는 수지상세포 백신을 치료제로 사용해 그보다 훨씬 더 수명을 연장했다. 그에게 시도된 여러 가지 치료법 중 어느 것이 그의 생명을 연장시켰다고 단언하기는 힘들다. 그럼에도 그는 당시 사용되지 않았던 수지상세포 백신과 전통적 화학요법의 병행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자신을 실험 대상으로 직접 입증해 보이는 등 사후 노벨상 수상 논란을 잠재우기 충분할 만큼 과학자로서의 모범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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