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사 드레스가 변하는 장면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질문을 많이 받아요. 다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간단히 이야기 하자면 고체와 기체의 특성을 조합했다고 보면 돼요. 고체는 딱딱한 물체이기 때문에 빛을 쏘면 반짝거리는 현상이 나타나죠.
반면 연기, 즉 기체는 그렇지 않아요. 날라가는 특성이 더 강하죠. 엘사의 드레스가 변하는 모습을 나타낼 때는 고체의 반짝거림과 기체의 날라가는 모습을 합쳤습니다. 즉, 기체인데도 반짝거리는 모습을 만들어낸 거죠.”
올 초, 어른과 아이 할 것 없이 많은 사람들의 동심을 훔쳐간 애니메이션 '겨울왕국'의 그래픽 디자인을 담당한 유재현 디자이너는 작품 속에 등장하는 많은 효과가 결국 자연현상의 조합을 통해 가능했다고 이야기 했다.
관객들이 봤을 때 엘사의 드레스가 얼음드레스로 변하는 모습은 그저 ‘아름다운 장면’ 으로만 이야기 되지만 사실 이 안에는 수많은 노력과 기술, 그리고 아이디어가 숨어있다. 자연현상에 대한 정교한 관찰과 세심한 주의가 있었기에 모든 발상을 조합해 새로운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 있던 것이다.
시간과 버젯이 경쟁력
'겨울왕국'은 월트디즈니의 작품 중 실로 오랜만에 관객몰이에 성공한 작품이다. 스토리도 스토리지만 관객들은 장면의 정교함과 아름다움에 감탄했다.
“엘사 드레스를 제작하는 데만 1년 반이 걸렸어요. 이처럼 긴 시간이 소요된 건, 결국 작업을 ‘갈아엎는’ 일들이 수없이 반복됐다는 걸 의미해요. 만약 한국의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였다면 거의 다 된 작업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일을 용납하지 못했을 거예요. 시간과 버젯의 한계 때문이겠죠. 하지만 월트디즈니에서는 작업을 ‘엎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발생합니다. 수많은 시행착오가 용납되는 거죠.”
국내 콘텐츠 시장의 발전을 이야기 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기획과 제작단계의 여유다. 드라마와 콘티에 대한 계획이 거의 완벽하게 갖춰진 상태로 작업에 들어가는 해외 시장과 달리 국내 시장은 작업 환경을 예측하지 못한다는 점이 한계로 언급되곤 한다. 시간과 버젯의 여유가 부족하기 때문에 제작자들은 늘 촉박하게 결과물을 만들어내야 하고, 그렇기 때문에 한창인 작업을 처음으로 셋업(set-up) 시키는 것은 환경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강연에서 ‘퀄리티=버젯’ 이라고 이야기 했더니 어떤 청중께서 ‘그렇다면 같은 시간과 버젯이 있을 때 다른 프로덕션에서는 '겨울왕국' 만큼의 퀄리티를 만들 수 있다고 보느냐’ 라고 묻더군요. 생각해보니 그도 그렇더군요. 사실 한국과 월트디즈니의 기술경쟁력은 차이가 없습니다. 오히려 한국 작가들의 역량이 높은 경우가 많아요.
다만 시스템적으로 ‘언제든 이 프로젝트는 갈아엎을 수 있다’는 수긍의 여지가 있는지, 그게 중요한 것 같아요. 그러기 위해서는 조직이 수평적이어야 할 것 같아요. 아티스트의 전문성을 믿어주는 거죠. 그런 매니지먼트가 있다면 버젯과 시간이 조금 부족해도 좋은 결과물을 낼 수 있지 않을까요.”
인터랙션 아트에 관심 있어
유재현 디자이너는 이펙츠(Effects) 아티스트로서, 입자를 이용해 자연현상을 그래픽 상에 만들어내는 작업을 주로 한다. 실제로 촬영할 수 없는 것을 작품 속에 구현하는 역할이라고 보면 된다. 엘사의 드레스가 변할 때 기체임에도 반짝거리는 모습을 구현한 것처럼 말이다.
유재현 아티스트가 컴퓨터 그래픽을 처음 접한 것은 미국에서 고등학교 재학 중 진로에 대해 고민을 시작하면서 부터다. 중3때 부모님을 따라 미국으로 이민을 간 그는 3년 동안 고등학교 생활을 하며 자신의 진로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다.
“제가 공부를 잘하는 편이 아니었어요. 하지만 그림 그리는 건 좋아했죠. 그걸 아신 부모님께서 그래픽 디자이너를 준비하면 어떻겠냐고 하시더라고요. 그때부터 학원을 다니면서 포트폴리오를 만들었고 학교에 들어갔어요. 입학 후 광고 디자인을 공부 하면서 모션 디자인을 처음 접했죠. 정말 재미있었어요. 이후에 좀 더 많은 걸해보고 싶어서 혼자 컴퓨터 그래픽을 공부했어요. 그 때부터 혼자 만들어본 것들이 바다와 토네이도 같은 자연현상이었고요.”
현재 그가 월트디즈니에서 만들어내는 장면도 결국 자연현상과 관련이 깊다. 때문에 대학교 시절부터 틈틈이 연습한 작업들은 훗날 그가 프로 무대에서 활동하는데 많은 도움을 줬다.
“컴퓨터 그래픽을 하면서 제가 좋아했던 자연현상들이 이펙트라는 것을 알게 됐어요. 이후 소니 이미지웍스와 블리자드에서 일하며 '하늘에서 음식이 내린다면'과 '스타크래프트' 같은 작업을 했고, 이후에 다른 것을 배우고 싶어 디즈니로 옮겼죠.”
월트디즈니는 이미지에서 그들만의 곡선을 중요시 여긴다. 한 프레임 안에 곡선이 어디에 위치하는지, 어디에 그려야 하는지 등 모든 방향이 계산돼 있다. 이미지와 캐릭터, 배경화면부터 빛이 들어오는 방향까지 일정한 라인 안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유재현 아티스트는 현재 월트디즈니에서 이펙츠 아티스트로 활동하고 있지만 그는 스스로를 일컬어 ‘크리에이티브코더’ 라고 소개한다. 앞으로 사용자에게 새로운 경험을 주는 소프트웨어를 만들고 싶기 때문이다. 현재도 월트디즈니에 재직 하면서 개인적으로 컴퓨터 사이언스를 배우고 있다.
“개인프로젝트를 따로 진행하는 이유는 하고 싶은 게 많아서예요. 제가 만들고 싶은 장면이 현재의 툴(tool)로는 안 될 때가 많거든요. 직접 프로그램을 만들어야겠다 싶었어요. 때문에 컴퓨터 사이언스와 수학을 공부하고 있고요.”
그는 앞으로 집단지성을 이용한 새로운 미디어아트를 만들고 싶다고 이야기 했다. 빅데이터를 그가 원하는 방식으로 만들어내고 싶다는 것이었다. 현재 빅데이터는 사용자들의 관심사를 제공하고 그걸 통해 앞으로 삶의 방식이 어떻게 흘러갈 지 정보를 알려주는 데 중점적이지만, 그는 이것을 활용해 새로운 ‘아트’를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빅데이터를 제가 원하는 방식으로 만들고 싶어요. 그것을 통해 새로운 ‘아트 폼’을 만들고 싶죠. 그러기 위해서는 연결점이 중요한데 제가 이용하고 싶은 연결점은 집단지성이에요. 아마존에서 사용하는 추천시스템과 매우 유사한 셈이죠.
감탄한 사람의 입은 벌어진다
그는 강연을 통해 ‘열린입 현상’을 이야기 했다. 이는 심리학이 아닌 생물학적 요소로 접근한 개념으로 사람의 감성을 좌우하는 뇌를 자극하면 이성이 요구하는 합리성을 100% 충족시키지 못해도 결국 설득이 된다는 이야기다.
“사람이 감성적으로 영감을 얻으면 입이 ‘떡’ 벌어지잖아요. 설득의 방향이 중요한 것 같아요. 나의 외부에서 내부로, 즉 이성과 논리로 마음을 움직이려고 할 때보다 안에서 밖으로, 마음이 감동해서 모든 상황을 수긍하게 되면 합리성에 의거해 내린 의사결정을 바꿀 수 있죠. 지금 시대에는 바로 그것이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현상인 것 같아요.”
그는 영감적 발상의 중요성 또한 강조했다. 그렇다면 그는 영감을 얻기 위해 평소 어떤 주의를 기울이고 있을까.
“스티브 잡스가 그랬죠. 창의적인 발상을 얻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그런 것을 생각했냐’고 물으면 죄책감을 느낄 거라고요. 그들은 그저 어딘가에서 뭔가를 봤을 뿐이거든요. 자신이 원하는 것을 계속 생각하고 있느냐 아니냐의 차이인 것 같아요. 무의식중에서도 생각이 날만큼 자신이 당면한 문제에 집중하고 있다면 무엇을 보더라도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다고 봅니다. 새로운 생각을 받을 준비가 된 거죠.”
그는 앞으로 새로운 서치 알고리즘을 만들기 위해 아이디어를 구상 중이다. 현재는 한 개의 검색어를 입력하면 사회적으로 많이 받아들여지는 의미가 순차적으로 검색된다. 즉, ‘애플’을 치면 사과보다 애플사에 대한 언급이 먼저 올라온다. 하지만 그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검색 툴을 제작하고 싶다.
“사실 한 단어에 대한 사회적 의미가 검색된다는 건 정말 위험한 거예요. 사람들의 생각을 일반화 시키니까요. 제가 만들고 싶은 건 문제에 갇힌 사람들을 위한 새로운 발상의 서치 프로그램이에요. 우리가 일을 하다가 잘 안 풀리면 잠시 노트북을 접어두고 드라이브를 하거나 바람을 쐬고 혹은 차를 마시죠.
저는 그 방법 중 하나로 ‘서치 알고리즘’을 제공하고 싶어요. ‘애플’을 검색하면 반대의 의미가 검색될 수 있는 거죠. 어떤 식으로든 조금이나마 ‘애플’과 관련된 단어들을 보여주고 싶어요. 사람들이 한 방향으로만 생각하지 않고 다양한 각도에서 들여다볼 수 있도록요.”
이처럼 유재현 작가는 다양한 아이디어와 프로젝트로 자신만의 결과물을 만들기를 원하고 있었다.
“진정한 의미의 크리에이티브코더가 되고 싶어요. 결국 사람들과 소통을 하고 싶다는 거겠죠. 소통을 이용해 유저(user)에게 신기하고 새로운 경험을 제공하고 싶어요. 감정 변화의 경험을 제공하는 시스템이나 소프트웨어가 될 수도 있을 것이고 아트워크가 될 수도 있겠죠”
- 황정은 객원기자
- hjuun@naver.com
- 저작권자 2014-05-23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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