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K대 내과 레지던트라고 주장한 네티즌이 한국에 거주했던 한 영국 선교사가 스페인의 의학 학술지인 자마(JAMA)에 실린 연구보고서 영어원본을 다시 타이핑해 네이버(창혁여진아빠 불로그)에 올린 자료에 따르면, 1918년 9월부터 1919년 1월까지 무려 740만 명이 독감에 감염돼 14만 명이 사망했다는 것.
740만 명 걸려, 14만 명 사망
그러나 이 연구가 당시에 발생한 독감과 스페인 독감과의 관련성을 밝혀내지는 못했다고 전했다. 하지만 선교사로 활동하면서 독감 환자를 몸소 치료했던 프랭크 스코필드(Frank W. Schofield) 박사는 스페인 의학 학술지에 이 보고서를 내면서 한국의 독감과 스페인 독감의 유사성에 무게를 둔 것은 사실이다.
영어원본을 올린 네티즌은 이 연구보고서는 국내 질병에 관해 외국 의학 학술지에 처음으로 실린 것으로 소장가치가 높다는 주장도 했다.
보건복지부 산하 질병관리본부 예방접종관리팀의 한 관계자는 "우리나라에는 조선시대부터 지금까지 역대 질병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자료가 현재 없고 당시 백신이 없었던 시절 독감은 치사율이 높은 질병이었다"고 말했다.
"독감은 치사율이 높은 질병, 단정 못해"
국립보건연구소의 한 관계자도 "당시 스페인 독감이 전 세계적으로 퍼진 것은 사실이지만 아시아 특히 일본과 한국은 다소 안전했던 지역으로 알고 있다"면서 "당시 의학수준이 높았던 일본을 비롯해 다른 아시아 국가들도 이에 대한 정확한 자료는 없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그러나 당시 독감이 스페인 독감이든 아니든 간에 사회적인 문제가 될 정도로 심각했던 것은 사실이다.
"유럽의 독감과 아주 비슷해"
한편 자마 학술지에 '특별한 고찰이 필요한 한국의 유행성 독감(Pandemic Influenza in Korea with Special Reference to its Etiology)'이라는 제목으로 실린 A4용지 9매 분량의 이 연구 리포트는 "1918년 9월 한국에 첫 모습을 드러낸 유해성이 대단한 이 독감은 시베리아를 경유해 유럽에서 전파된 전염병이라는 데에 대해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라는 말로 첫 문장을 시작했다.
"이 병은 북에서 남으로 남부 시베리아 철도를 통해 급격히 전파되기 시작했다. 우리가 이 전염병을 접하게 된 것은 9월 말로 10월 중순 감염자와 희생자 수가 최고에 달했다. 조선인들의 비위생적인 생활이 가장 큰 원인으로 보인다"
"우리가 판단하기에 아마 한국 전체인구의 4분의 1 내지 반수가 이 병에 감염됐으며 학교를 비롯해 많은 관공서가 문을 닫았다. 왜냐하면 선생들이 독감에 걸려 수업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일본 당국에 병의 규모나 희생자 수를 알려줄 것을 요구했으나 그들은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이 보고서는 이 독감의 증상에 대해 이렇게 전했다. "독감에 걸린 사람은 열이 급작스럽게 오른다. 열이 104-105도(화씨)가 된다. 24시간이 지나 열이 정상적으로 내린 사람은 생존하지만 기관지염이나 폐렴을 동반하게 되면 많이 죽는다. 치사율이 대단하다"
결국 관련성 못 밝혀, 시기적으로 전염속도는 비슷해
스코필드 박사는 한국 독감과 스페인 독감에 주로 나타나는 파이퍼 바실러스(Pfeiffer Bachilus)와의 관련성을 설명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으나 결국 원인 규명을 하지 못했다. 그는 또 보체고정(Complement Fixation), 혈청진단법(Agglutination Test), 피부 시험(Skin Test)을 비롯해 검역방법(Animal Inoculation) 등 여러 가지 시험을 실시하기도 했다.
이 보고서는 '제한적인 연구'로 정확한 결론을 도출할 수 없었다고 결론을 내리면서 그 중요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들었다.
“한국의 독감 원인을 규명할 수 없으며, 한국의 독감과 파이퍼 바실러스와의 관계를 규명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연구와 증거수집이 필요하다. 또한 환자의 혈액(filtered blood)과 분비물(secretion)에 대해 더 많은 실험들이 선행돼야 한다.”
스코필드 박사는 누구?
스코필드 박사(한국명, 石好必)는 1888년 영국에서 태어나 19살 되던 해에 캐나다로 건너 가서 토론토 대학에서 수의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1919년 한국에 선교사로 와서 세브란스 의과대학 교수가 됐다. 그는 소아마비로 불편한 몸이었지만 3.1운동이 발발하자 일본의 탄압상을 사진으로 찍어 세계 언론에 보내는 등 한국 독립운동에도 앞장섰다.
한국 땅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긴 그는 82세 되던 해 한국에서 세상을 떠났다. 독립 후 그는 한국의 부정부패 척결을 자주 외치면서 이에 대항해 용감하게 싸우는 국민이 되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 김형근 편집위원
- 저작권자 2006-01-03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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