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대용이 남긴 글 가운데 가장 파격적인 주장을 담은 대표적인 책이 바로 ‘의산문답(醫山問答)’이다. 이 책은 조선의 선비인 허자가 중국과 만주의 경계에 있는 의무려산(醫巫閭山)을 방문해 실옹(實翁)을 만나서 문답을 나누며 새로운 학문세계를 깨닫는다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서 허자(虛子)라는 이름은 30년 동안 독서로 세상의 모든 지식을 공부한 것이 공허한 내용이라는 풍자이자, 조선 성리학의 교조주의적 지식체계에 대한 비판의 뜻을 담고 있다. 또 이 책의 배경인 의무려산은 중화사상의 근원인 ‘화이관(華夷觀)’에서 중국과 오랑캐의 구분을 짓는 상징적인 공간이기도 하다.
그가 이 책을 쓴 가장 큰 목적은 중국 중심의 세계관을 비판하고 새로운 세계상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그 목적을 위해 소재로 삼은 과학적 지식은 바로 땅이 움직인다는 지동설과 우주가 무한하다는 무한우주론 등이었다. 화이관과 지동설이 대체 무슨 관련이 있다는 걸까.
전통적인 중화사상에 의하면 이 세상은 화(중국)와 이(오랑캐)로 구분되어 있다는 화이관으로 설명되었다. 조선의 성리학자들 역시 이 같은 중화주의적 명분론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런데 홍대용은 의산무답에서 9만리의 둘레를 지닌 지구가 하루 만에 벼락보다 빠르게 일주한다는 지전설을 주장했다. 우주의 뭇별들은 각각 하나의 세계를 가지고 있고 끝없는 세계가 우주에 흩어져 있는데 오직 지구만이 중심에 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무한우주론을 설파했다.
또한 그는 이 책에서 달이 지구 그림자로 들어가는 현상을 월식이라고 하는데, 가리는 그림자 모양이 둥근 것은 지구의 모양이 둥글기 때문이라는 지구구형설을 주장했다.
둥근 땅덩이의 지구가 빙글빙글 돈다는 지전설은 종래 중국 본위의 중화주의 세계관을 부정하는 이론이었다. 둥근 지구가 하루에 한 번씩 도니까 세계의 중심은 그 어디에도 없으며 돌 때마다 변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계가 중국을 중심에 두고 편성된 것처럼 여기던 성리학자들에게는 대단히 충격적인 주장이었다.
실학적 사고가 등장하는 데 큰 영향 미쳐
무한우주론의 입장에서 보면 중국 중심의 세계관은 더욱 초라해진다. 홍대용은 의산문답에서 “지구 세계를 우주에 비교하면 미세한 먼지만큼도 안 되며, 중국을 지구 세계와 비교하면 십수분의 일밖에 되지 않는다”고 비유했다.
또한 우주의 중심은 고정적이지 않고 상대적이라는 그의 상대주의적 세계관은 인간과 타물의 균등관을 잉태하게 했다. 인간과 타물들은 우주의 입장에서 보면 모두 균등하게 평가되지 인간을 더 우월시하지 않는다. 이러한 사상은 양반상민의 신분차별과 사농공상의 직업귀천 관념 문제를 지적했던 조선 실학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즉, 성리학적인 사고풍토가 팽배하던 당시 상황에서 실학적 사고가 등장하는 데 획기적인 영향을 미친 것이 홍대용의 의산문답에서 소개된 새로운 천체관이었던 셈이다.
그가 북경에서 서양 선교사들과 나눈 대화록인 ‘유포문답’, 중국 학자들과의 학문적 교우를 기록한 ‘건정동회우록’, 중국 여행의 전 과정을 기록한 ‘연행일기’ 등의 저서들은 박지원 및 박제가 등 조선 후기 실학자들에게 북학 사상을 불어넣었다.
특히 그가 어머니를 위해 한글로 쓴 ‘을병연행록’이라는 기행문은 박지원의 ‘열하일기’와 김창업의 ‘노가재연행일기’와 함께 조선시대 3대 중국견문록으로 꼽힐 정도로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졌다. 아름다운 궁체로 아주 길게 쓰여진 이 책은 ‘담헌서’라는 그의 문집에 들어 있는 한문 연행기록과는 체제가 전혀 다르며 내용도 조금 다르게 되어 있는 매우 특이한 저서다.
그는 여러 가지 천문기구를 제작하고, 고향 마을에 농수각이라는 관측소를 지어 그 천문기구들을 설치하기도 했다. 나주에 있던 기술자 나경적과 그의 제자 안처인에게 의뢰하여 혼천의, 혼상, 구고의 등의 천문기구를 제작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볼 때 홍대용 자신은 기구를 만드는 손재주가 없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중 혼천설을 바탕으로 제작된 혼천의는 별과 태양, 달 등 천체의 위치를 측정할 수 있는 천문 관측기구이다. 그런데 그가 만든 혼천의는 물을 사용해 움직이던 이전의 혼천의와는 달리 기계시계를 톱니바퀴로 연결해 움직이게 한 것이 특징이다.
이 혼천의는 고정된 고리 3개와 움직이는 고리 5개로 구성되어 있는데, 바깥의 고리 3개는 땅의 지평과 하늘의 좌우를 나타내며 가운데 움직이는 고리들은 시각에 따라 변화하는 해와 달, 별의 위치를 보여준다.
집 마당에 천문기기 갖춘 천문대 건립
그는 집 남쪽 마당의 호수 내 정자에 ‘농수각(籠水閣)’을 지은 후 이러한 천문기기들을 설치했다. 그가 이처럼 기기 제작에 관심을 쏟은 이유는 과학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관찰과 실험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는 북경에서 돌아온 후 통천의, 측관의, 구복의 등 다양한 천문기구를 추가로 전시했는데, 실제 관측보다는 전시를 통해 보고 즐기는 데 중점을 둔 것으로 여겨진다.
그는 과거에 급제하지는 못했으나 40대 중반인 1774년(영조 50년)에 음보(蔭補 : 조상의 덕으로 벼슬을 얻는 것)로 세손익위사(世孫翊衛司)의 시직(侍直)으로 임명되면서 벼슬에 나갔다. 이 벼슬은 세손의 교육을 담당하는 중요한 자리였는데, 당시 그는 다음 왕이 될 정조의 교육을 맡았다.
그 후 1775년에는 선공감 감역, 1776년 사헌부 감찰, 1777년 태인현감, 1780년 영천군수를 지냈다. 그러다 어머니의 병을 구실로 귀향해 있던 1783년 10월 23일 저녁 갑자기 풍으로 그는 세상을 떠났다.
그의 부고를 전달 받은 연암 박지원이 그의 죽음을 슬퍼하면서 장문의 묘비명을 쓴 것으로 전해진다. 그에 의하면 홍대용의 부인은 한산(韓山) 이홍중의 딸이고, 자녀는 1남 3녀를 남겼다고 되어 있다.
홍대용의 본관은 남양이며, 호는 홍지(弘之), 자는 덕보(德保), 당호는 담헌(湛軒)이었다. 따라서 그의 문집도 ‘담헌서’라는 이름으로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명분에만 집착하던 당시 학자들과는 달리 일찍부터 실생활에 필요한 과학에 많은 관심을 가졌던 그는 2003년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헌정되었다.
- 이성규 객원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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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작권자 2014-09-11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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