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포에서 대패를 당한 왜구는 그에 대한 보복으로 3년 후인 1383년 봄 120척의 군선을 이끌고 경남 합포(현재 창원시 마산합포구 일대)로 침입해왔다. 급보를 받은 고려 조정에서는 해도원수인 정지 장군을 경상도로 급파시켰다. 전선 47척을 이끈 정지 장군의 부대는 남해군의 관음포 앞바다에서 왜구와 마주쳤다.
왜구는 정예병 군사 140명씩을 배치한 큰 군선 20척을 앞세워 공격해왔는데, 정지 장군은 화포를 사용해 그중 17척을 대파시켰다. 관음포대첩 또는 남해대첩이라 불리는 이 전투는 적선에 화포를 정확하게 명중시킨 해전으로 기억되고 있는데, 당시 고려군의 화포를 운영한 책임자가 바로 최무선이었다. 관음포대첩 이후 왜구들은 고려 수군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되었다.
그런데 최무선이 앞장서서 만든 화통도감은 고려 창왕(재위 기간 1388~1389년) 때 없어져 군기시에 흡수되었다. 정지 장군이 관음포대첩에서 승리한 후 “내가 일찍이 왜적을 많이 격파하였으나 오늘같이 통쾌한 적은 없었다”고 말한 정도로 격찬한 화약 무기의 제조기관인 화통도감은 왜 없어진 것일까.
이에 대해서는 왜구를 성공적으로 소탕한 뒤 더 이상 필요가 없었을 거라는 추정과 또는 쇠약한 노인이 되어 더 이상 공직 생활을 할 수 없던 최무선을 대신해 화통도감을 이끌 후계자가 없어서일 거라는 설이 있다. 혹은 당시 이성계가 고려 우왕을 폐위시킨 것에 대해 최무선이 반대 입장을 표명함에 따라 권력에서 축출되었을 거라는 추정도 가능하다.
하지만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이성계는 최무선을 매우 아꼈던 것으로 보인다. 최무선이 사망한 날에 기록된 1395년 4월 19일자의 ‘태조실록’을 보면 그 같은 정황을 잘 알 수 있다.
“조선 개국 후에는 늙어서 쓰이지는 못했으나, 임금이 그 공을 생각하여 검교참찬을 제수하였다. 죽음에 미쳐 임금이 슬퍼하여 후하게 부의하였으며, 신사년에 의정부 우정승 및 영성부원군으로 추증하였다.”
여기서 임금이란 바로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를 말하는데, 새로운 왕조의 실록에서 최무선의 사망을 전하며 공을 치하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최무선이 직접 출전해 화포로써 왜구들을 격파한 진포대첩 당시 배를 잃은 왜구들은 육지에 올라와서 각 지방을 노략질하고 다녔다.
관향에 사당을 세우고 제사 지내게 해
그때 고려의 병마도원수였던 이성계가 왜구를 격파해 그때부터 왜구가 점점 덜해지고 항복하는 자가 서울 잇달아 나타나서 바닷가의 백성들이 생업을 회복하게 되었다는 것. 태조실록에서는 그 같은 사실을 서술하며, 이것은 태조 이성계의 덕이 하늘에 응한 까닭이며 최무선의 공도 작지 않았던 것이라고 적고 있다. 즉, 새로운 왕조의 정당성을 내세우는 데 꼭 필요했던 이 중의 한 명이 바로 최무선이었던 것이다.
세조실록에서는 최무선을 중국에서 목화씨를 들여온 문익점의 업적과 함께 칭송할 만큼 높이 평가해 놓았다. 즉, 최무선은 화포를 개발해 백성의 해(害)를 제거했으며, 문익점은 목화씨를 들여와 백성의 이(利)를 일으켰다는 것. 그 같은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조는 1456년 양성지의 건의에 따라 두 사람의 관향(貫鄕 ; 시조가 태어난 마을)에 사당을 세우고 봄가을마다 제사를 지내게 했다.
실제로 최무선의 화약 개발 기술은 그 자손들을 통해 이어져 조선 왕조의 군사력 강화에도 큰 공헌을 했다. 진포대첩이 벌어진 바로 그해 태어난 최무선의 아들 최해산은 15세가 되던 해에 어머니로부터 한 권의 책을 건네받았다. 최무선이 임종할 때 “아이가 장성하면 주라”며 부인에게 맡겨두었던 책이었다.
그 책은 바로 화약을 만드는 비밀스러운 방법이 기록된 책이었다. 최해산은 그 책을 보며 화약 만드는 법을 익혀서 태종 때인 1401년 군기시에 특채되어 화포 개발 실험에 주동적 역할을 했다. 그 후 최해산은 자신의 아들인 최공손과 손자인 최식에게도 그 비법을 전해줌으로써 최무선의 후손들은 모두 벼슬을 하며 조선시대의 화약무기 개발을 주도했다.
성종실록에 의하면 최식이 증조부 최무선의 저서인 ‘화포법’과 그림으로 그려진 ‘용화포섬적도’를 임금에게 바쳤다고 기록되어 있다. 생전에 최무선은 화약 제조법과 화포 제작기술을 ‘화약수련법’과 ‘화포법’이란 책으로 편찬해 남겼다고 하는데, 이 책들은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이순신 장군의 활약도 최무선 덕분
임진왜란 때 병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조선군이 승리를 거둔 진주대첩, 행주대첩, 한산도대첩의 ‘3대 대첩’ 역시 최무선의 후손들이 만든 강력한 화약 무기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김시민 장군이 지휘하는 3800명의 조선군과 2만명의 왜군이 맞선 진주대첩은 수천 개의 대나무 사다리를 만들어 성을 공격하던 왜군에 대해 성문을 굳게 닫고 마른 갈대에 화약을 싸서 던진 끝에 거둔 승리였다.
2300명의 군사로 왜군 3만여 명을 9차례에 걸쳐 격퇴한 행주대첩도 아낙네들의 행주치마보다는, ‘뛰어난 화차가 있었기에 승전보를 남길 수 있었다’고 권율 장군이 스스로 밝힌 바 있다. 한산도대첩을 비롯한 이순신 장군의 활약도 막강한 대형 화약 무기를 보유하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당시 조선 수군과 일본 수군의 전법에는 차이가 있었다. 해적 출신들이 주축인 일본 수군의 전투 방식은 배에 접근해 갈고리를 던져 타고 올라 백병전을 벌이는 등선육박전이었다. 이를 간파한 이순신 장군은 육박전이 불가능하게끔 일정 거리를 유지한 채 조선이 보유한 우수한 화포로 왜선을 격파하는 함포 사격 전법을 구사했다.
임진왜란 때 거북선 등의 전투함에 배치되어 왜선에 큰 타격을 입힌 천자총통의 경우 사정거리가 900보(약 1.6킬로미터)에서 1200보(약 2.16킬로미터)나 되었지만, 일본의 대포인 대통은 사정거리가 300미터 정도에 불과했던 것이다. 또 육상전에서 맹위를 떨친 일본 조총의 유효 사거리도 50미터 정도에 불과했으니, 일본 군선들은 조선 군선의 근처에 접근도 해보지 못한 채 격침당하기 일쑤였다.
이처럼 우리 군대를 첨단 화약무기로 무장시키는 데 이바지한 최무선은 당시 중국만이 보유했던 첨단 기술을 자주적으로 개발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최무선은 2003년 1월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최초로 헌정된 선현 및 현존 과학기술인 15명 중 1명에 포함되었다.
- 이성규 객원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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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작권자 2014-07-16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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