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콩’이나 ‘꽃가루’로 인한 알레르기(allergy)는 들어 봤어도, ‘배추’ 알레르기는 들어 본 적이 없다. 어디 배추뿐인가? 우리가 매일 먹는 밥이 알레르기가 있다는 소리는 지금껏 들어보지 못했다. 왜 땅콩은 알레르기를 일으키고, 배추는 일으키지 않는 것일까?
이런 궁금증에 대한 해답을 영국의 과학자들이 제시하여 의료계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이들이 제시한 해답을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땅콩이나 꽃가루처럼 알레르기를 유발시키는 물질들에는 ‘기생충과 관련된 독특한 성분’이 들어 있다는 것.
과학기술 전문 매체인 '사이언스(Science)'는 최근 땅콩이나 꽃가루 등에는 ‘기생충의 단백질과 비슷한 항원’이 들어 있어 알레르기를 일으킨다고 보도하면서, 이번 결과가 기생충과 알레르기 간의 관련성을 밝히는 것은 물론, 향후 알레르기를 유발시킬 수 있는 식품을 가려내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관련 기사 링크)
알레르기는 과도한 면역반응의 결과물
사람이나 동물에게 있어 면역이란 자신과 다른 존재, 즉 외부의 이물질로부터 자신의 몸을 보호하기 위한 방어 시스템을 의미한다. 기생충이나 세균, 바이러스 등의 병원체 같이 우리 몸에 해로운 물질이 몸에 들어오면 신체는 이들을 제거하기 위해 면역반응을 일으키게 된다.
반대로 식품과 같이 자신에게 해롭지 않은 물질에 대해서는 제거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는데, 문제는 이때 일부 사람들의 방어 시스템이 교란을 일으킨다는 점이다. 해롭지 않은 물질에 대해서도 면역 반응을 일으키는 경우가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알레르기는 이처럼 과민하게 면역반응이 일어나는 현상을 말한다. 면역반응이 부족한 것도 문제지만, 과도하게 발생하는 것 역시 문제가 될 수 있다. 인체의 정상조직에 손상을 입혀 질병이 발생하도록 만들거나, 나아가 사망까지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두드러기나 천식, 그리고 아토피성 피부염 등은 모두 이 같은 과도한 면역 반응의 결과물이다. 이들 질환은 유전적인 경향이 강해서 완치가 어렵다. 약을 먹어도 그때뿐이어서, 증상은 매번 되풀이 될 수밖에 없다.
기생충 단백질과 비슷한 구조의 알레르기 유발 단백질
아직까지 알레르기의 원인은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지만, 가장 유력한 가설 중 하나는 기생충이 원인이라는 ‘위생설’이다. 과거와 달리 위생 상태가 좋아진 요즘에는 기생충이나 세균 감염이 줄면서 면역 시스템이 병원균이 아닌 물질들을 공격하면서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이론이다.
위생설이 그동안 알레르기 발생 원인으로 유력하게 제기되기는 했지만, 이를 입증할만한 사실이 부족했는데 최근 이를 검증하는 연구 결과가 영국의 과학자들에 의해 발표되었다.
영국 런던대의 니콜라스 펀햄(Nicholas Furnham) 교수와 연구진은 컴퓨터 알고리즘을 이용하여 땅콩과 꽃가루 등의 물질에서 추출한 2712개의 단백질과 31종의 기생충에서 추출한 7만개의 단백질을 비교했다.
그 결과 2445개의 기생충 단백질이 알레르기를 유발하는 단백질 구조와 매우 비슷하게 생긴 것으로 밝혀졌다. 특히 2445개 중 절반이 넘는 단백질 중에는 알레르기를 유발하는 대표적인 10개의 분자 도메인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도 파악했다.
이 같은 사실을 실험실에서 발견한 연구진은 기생충 단백질에 대한 항체가 실제로 식물성 알레르기를 일으키는 항원을 인식하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아프리카 우간다로 날아갔다. ‘만손주혈흡충’이라는 기생충에 감염된 우간다 국민들로부터 혈액을 채취하여 면역반응을 확인해본 결과, 여섯 명 중 한 명꼴로 식물계에서 가장 흔한 알레르기유발 물질인 자작나무 꽃가루 단백질에 반응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펀햄 교수는 “우간다로 출발하기 전, 우리는 단백질의 유사성을 토대로 하여 기생충에 대한 항체가 식물성 알레르기의 항원을 인식할 것이라고 예측했었다”라고 밝히며 “현지 조사를 통해 그 예측이 적중했음을 알게 됐는데, 기생충에 대한 항체가 식물성 알레르기의 항원에 반응하는 사례가 밝혀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기생충학의 권위자인 네덜란드 레이던대의 마리아 야즈단박스(Maria Yazdanbakhsh) 박사도 대단히 훌륭한 연구결과라고 평가하면서 “예전부터 알레르기의 항원들이 기생충의 단백질과 유사하다는 사실은 이미 알려져 있었지만, 그 모든 사실들을 체계적으로 입증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전했다.
이런 평가에 대해 고무된 펀햄 교수는 “우리 연구진이 확보한 연구결과는 다양한 분야에서 응용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하며 “알레르기 항원을 찾아내는 것은 기본이고, 알레르기 환자를 위한 맞춤형 면역요법을 설계하는 데도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맞춤형 면역요법에 대한 펀햄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어떤 기생충 단백질이 알레르기 항원과 유사한지를 알게 되면 기생충 단백질을 사용하여 알레르기 주사(allergy shot)의 용량을 쉽게 조절하고 안전성을 향상시킬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이번 연구에 대해 다른 의견을 제시하는 전문가도 있다. 미 예일대의 루슬란 메드츠히토프(Ruslan Medzhitov) 박사가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최근 발표한 논문을 통해 기생충이 원인인 위생설에 대한 가설을 부정하면서 “알레르기는 인간을 환경독소로부터 보호하려는 목적에서 진화한 것이지 기생충을 타겟으로 한 것은 아니다”라고 주장해 주목을 끌고 있다
- 김준래 객원기자
- stimes@naver.com
- 저작권자 2015-11-16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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