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을 살 때 아무 조건도 고려하지 않고 마구잡이로 매입하는 사람이 있을까? 주체할 수 없이 많은 돈을 가지고 있거나 정신이 온전치 않은 사람 말고는 가격이나 구조, 또는 위치 등을 꼼꼼하게 검토해보고 사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그렇다면 동물이나 벌레 같은 미물(微物)들은 어떨까? 사람처럼 이성적으로 생각하지 못하는 존재니까 아무데나 집을 짓고 살 것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의외로 이들도 집을 고르는데 있어서만큼은 까다롭게 구는 것으로 나타났다.
과학기술 전문 매체인 피스오알지(phys.org)는 미물중의 미물이라 할 수 있는 기생충도 그들의 집이라 할 수 있는 숙주를 아무 생물체나 삼지는 않는다고 보도하면서, 이렇게 숙주를 선별하는 데에는 기생충들이 내뿜는 독특한 화학성분이 작용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관련 기사 링크)
화학물질을 분비하여 자신의 영역임을 표시
수많은 생존방법들 중에서도 숙주에 침투하여 영양분을 얻는 기생(寄生)은 오랜 세월동안 변하지 않고 내려오는 탁월한 생존기술이다. 피해를 보게 되는 숙주의 입장에서 보면 결코 달갑지 않은 일이지만, 단순한 구조의 생물체일수록 기생은 자신의 후손을 보존하는데 있어 필수적인 생존 전략으로 자리를 잡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미 캘리포니아대의 ‘애들러 딜만(Adler Dillman)’ 교수가 이끄는 연구진은 기생을 하는 생물체 중에서도 특히 선충류(nematode)에 대한 연구에 집중하고 있다. 이들 선충은 주로 농작물에 해를 끼치는 250여종의 동물 및 곤충에 기생하는 존재들이다.
그런데 선충들의 행동을 연구하던 중에 연구진은 선충들이 이미 다른 기생충에 감염됐던 숙주들은 가급적 피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살아있는 생물체라면 종류에 상관없이 숙주로 삼는 줄 알았던 선충들이 뜻밖에도 그 대상을 고른다는 점에 흥미를 느낀 딜만 교수와 연구진은 이들이 어떻게 숙주를 구별하는지에 대해 연구를 시작했다.
그 결과 선충들은 숙주를 감염시키고 난 뒤, 프레놀(prenol)이라는 화학 물질을 방출하여 다른 기생충들에게 자신의 영역임을 경고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마치 사자나 호랑이들이 소변이나 대변을 통해 자신의 영역임을 알리는 것과 비슷한 행동을 선충들도 한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이를 테면 해당 숙주는 이미 자신이 차지했으니 더 이상 들어오지 말라고 경고를 하는 차원에서 프레놀을 분비하는 것이다. 물론 이런 행동이 숙주를 감염시킨 기생충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숙주에 침입할 준비를 하는 기생충에도 도움이 된다. 이미 많은 기생충이 살고 있는 숙주에 들어가 봐야 더 얻을 영양분도 별로 없기 때문이다.
이 같은 사실에 대해 딜만 교수는 “프레놀 분비는 기생충과 기생충 간의 윈윈(win-win) 게임을 가능하게 해준다”라고 소개하며 “이미 숙주를 감염시킨 기생충에게는 잠재적인 경쟁자를 피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고, 새로운 숙주를 찾는 기생충에게는 이미 기생충이 자리를 잡은 숙주를 피할 수 있게끔 도와주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연구진은 해당 연구가 앞으로 해충의 생물학적 방제에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기생충들이 숙주를 감염시키는 방식을 사람이 더 잘 이해하게 된다면, 이를 활용하여 친환경적이면서도 내성 걱정이 없는 생물학적 해충 조절 방법을 개발할 수 있을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먼저 감염력을 획득한 기생충이 숙주 선택할 가능성 높아
딜만 교수와 연구진이 화학물질 분비를 통한 기생충들 간의 영역 확보에 대해 연구를 했다면, 독일 막스 플랑크 연구소의 연구진은 하나의 숙주에 두 종류의 기생충이 침투했을 때 주도권 싸움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에 대한 연구결과를 발표하여 주목을 끌고 있다.
니나 하퍼(Nina Hafer) 박사와 동료 연구원들은 요각류(copepod)를 감염시킨 두 종의 기생충에 대한 연구를 진행했는데, 요각류란 물벼룩과 같은 작은 수생 동물로서 먹이 사슬의 기반을 담당하는 생물 중 하나를 가리킨다.
연구진은 두 기생충인 촌충류(cestode)인 Schistocephalus solidus와 선충류(nematode)인 Camallanus lacustris를 가지고 연구를 진행했다. 이들 기생충은 서로 다른 종(種)을 마지막 숙주로 삼는 특징을 갖고 있었다.
S. solidus는 요각류를 중간 숙주로 삼아 물고기를 2차 중간 숙주, 그리고 이 물고기를 잡아먹는 조류를 마지막 숙주로 삼는 기생충이었고, C. lacustris는 요각류를 중간 숙주로 삼아 물고기를 마지막 숙주로 삼는 기생충이었다.
이처럼 중간 숙주를 통해 마지막 숙주를 감염시키는 기생충들은 대부분 중간 숙주들의 활동능력을 떨어뜨릴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그 이유는 자신들의 감염력이 마지막 숙주를 완전히 감염시킬 수 있을 때까지 중간 숙주에서 충분한 시간을 보내야 하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하퍼 박사는 “두 기생충은 감염력이 생기기 전까지 요각류의 활동성을 떨어뜨려 포식자의 눈에 띄게 될 확률을 줄이도록 만든다”라고 소개하며 “반대로 감염력이 생길만큼 성장하게 되면 그때는 활동성을 증가시켜 마지막 숙주에게 쉽게 잡아먹힐 수 있도록 중간 숙주를 조종한다”라고 덧붙였다.
문제는 두 기생충이 하나의 요각류에 침투했을 때 서로 다른 감염력을 갖고 있을 때다. 하나는 감염력이 있는 성충이고, 다른 하나는 감염력이 없는 유충 상태일 때 어떻게 될 것이냐 하는 점이다.
연구진의 설명에 따르면 이 경우 서로 협력하기 보다는 먼저 감염력을 획득한 쪽이 아닌 쪽을 방해하여 요각류가 다음 숙주에 잡아먹힐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사실 서로 협력하는 방향으로 진화할 수 있음에도 그렇게 진화하지 않은 것은 아마도 서로 협력을 하는 것이 도움이 되지 않았을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라는 것이 하퍼 박사의 생각이다.
몇 일 더 기다리다가 요각류가 죽을 수도 있고, 마지막 숙주를 감염시킬 기회를 잃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에 서로 협력하기 보다는 서로 방해하는 전략을 채택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 김준래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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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작권자 2017-08-09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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