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는 역사의 함축이고, 그 함축의 현실화이고, 미래다. 문화를 이처럼 관념적으로 규정할 수밖에 없는 것은 문화라는 현상이 가진 다면성 때문이다. 따라서 ‘한 사회의 개인이나 인간 집단이 자연을 변화시켜온 물질적·정신적 과정의 산물’이라는 사전적 의미와 상관없이, 문화는 포괄적이고 총체적인 의미를 갖는다. 그래서 문화를 ‘역사이고, 현실이고, 미래’라고 규정한 것이다.
이런 문화가 갖는 본질적 특성을 ‘원시가 아닌 모든 것’을 뜻하는 과학과 인위적으로 결합시킨 용어가 바로 ‘과학문화’이다. 따라서 과학문화를 ‘원시 이후의 문명의 총체’라고 규정할 수 있다. 여기에 현실적 가치를 더해 해석하자면, 과학의 존립과 발전을 견인하는 모든 환경적·생태적 조건을 아우르는 것이 바로 과학문화이다. 다시 말해 과학문화란 과학을 가능하게 하는 토양이고, 그 토양의 질과 규모가 그 시대, 그 집단의 과학을 규정한다고 말할 수 있다. 과학문화란 그런 것이다.
흔히들 과학을 일상적인 삶과 유리시켜 생각하곤 한다. 이 시대의 어느 누구도 과학의 영역에서 벗어날 수 없음에도 ‘내가 과학과 무슨 상관이야’라거나 ‘과학은 과학자들이 하는 것이지’라며 상상할 수 없는 독단에 빠지기도 한다. 왜 과학으로 밥 먹고, 과학으로 숨 쉬고, 과학으로 희노애락을 감각하는 사람들이 과학을 자신과는 무관하다고 여길까.
답은 간단하다. 문화에 대한 성찰이 부족한 탓이다. 물론 문화적 성찰의 부족을 개개인의 문제로 치부할 수는 없다. 여기에는 교육제도, 사회적 인식과 풍토, 시대적 소양과 과학적 상상력 등 다양한 요인이 개입된 복잡계의 기제가 작동한다. 예컨대, 우리는 지금도 문과와 이과를 나눠 교육을 한다. 일본의 군국주의식 교육제도를 비판 없이 수용한 결과다. 여기에 성적 지상주의가 개입하고, 창의력 발굴을 포기한 주입식과 암기 중심의 교육이 더해져 이과생은 문과에 문외한이 되고, 문과생은 이과에 문맹이 되고 만다. 바로 이 지점에서 ‘과학’과 ‘문화’의 불화가 시작된다. 이런 상태에서는, 과학인들은 문화가 배제된 과학을 상상하고, 자신이 과학과 무관하다고 믿는 사람들은 과학을 배제한 문화를 상상할 수밖에 없다. 모두가 반쪽의 딜레마에 빠져서, 반쪽의 과학, 반쪽의 문화만을 향유하면서 스스로 그것을 최선이라고 믿는다.
이런 성향이 강한 집단일수록 인식의 폐쇄성이 강해 고루하고 낙후하다. 그들은 미래지향적이라기보다 과거에 집착한다. 배타성도 강해 불합리한 계층인식이 뿌리 깊고, 변화를 두려워한다. 우리에게서도 이런 성향의 편린이 뚜렷하다. 전근대적 반상의식이 그렇고, 남성우월주의가 그렇고, 단일민족이라는 허황된 믿음이 그렇다. 양반들이 과거시험을 거쳐 관로에 나가는 것은 ‘일하지 않고 향유하려는’ 선민의식의 자기 확인이었고, 국가가 소수 지배층의 탐욕을 공인해 부와 권력을 세습하도록 하는 장치로 작동했다. 이런 불합리성의 이면에는 사농공상이라는 비과학적인 계층인식이 존재한다.
늦었지만 다행스러운 것은 이런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교육제도를 개편하자는 사회적 논의가 시작되었다는 점이고, 융복합에 대한 필요성이 큰 흐름을 형성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논의가 생소하게 여겨질 수도 있으나, 우리는 벌써 오래 전에 이의 필요성을 간파하고, 이를 토대로 사회개혁을 이루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고증학과 북학, 중농 및 중상주의를 거쳐 실학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흐름이 그것이다. 시대에 따라 지향점은 달랐지만, 그들이 주창한 변화의 요체는 세상을 반쪽만 이해하고 경영할 것이 아니라 온전하게 보고 받아들이자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보면, 우리가 지향하는 과학의 궁극은 문화와의 온전한 융합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고, 온전한 과학문화의 완성이 곧 실학 정신의 구현임을 아는 것이 어렵지만은 않은 일이다.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인 울리 슈틸리케가 아시안컵 대회에서 일신된 면모를 보이자 많은 축구팬들이 ‘실학축구’라며 환호했다. 그는 확실히 이전의 몇몇 감독들과는 다른 리더십을 보여줬다. 그는 명성이나 명분이 아니라 실질에 몰두했다. 무명 선수를 발굴해 스타덤에 올려놨는가 하면 난망하던 성적까지 얻었다. 바로 여기에 과학과 문화가 어떻게 화학적으로, 또는 유기적으로 융합해야 하는지에 대한 답이 들어있다.
당연하지만, 국가대표 축구선수가 가장 먼저 갖춰야 하는 조건은 공을 다루는 기술과 경기를 풀어가는 전략·전술적 사고력, 그리고 체력이다. 그러나 이런 조건을 갖췄다고 항상 좋은 성적이 보장되는 건 아니다. 같은 조건이라도 마음가짐 등 심리적 요인이나 팀웍, 경기장 상황 등 부수적 조건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온다. 바꿔서 말하자면, 과학은 과학성만으로 완성되는 게 아니라 문화성이 유기적으로 결부될 때라야 가능하다. 문화도 마찬가지다. 낱낱의 문화가 문명으로 승화하려면 반드시 과학적 토대가 전제되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우리 과학문화의 완성은 아직 비등점에서 멀다고 보는 것이 옳다. 오랜 세월, 대를 이어 우리의 인식을 지배해 온 낡은 관념을 바꾸는 일이 쉽지 않은 까닭이다. 그러나 희망적이다. 도약을 위한 토대가 견실하게 다져지고 있기 때문이다. 청소년들이 비로소 과학을 다면적으로 이해하기 시작했고, 느리지만 정책도 그런 방향으로 바뀌고 있다. 실학의 연대를 거치면서 극복의 토대가 마련된 ‘이천문약(理賤文弱)’을 넘어, 따로 놀던 ‘과학’과 ‘문화’가 명실상부하게 ‘과학문화’로 융합해 종국에는 ‘문명’으로 결실하는 이상이 현실이 되는 그 때가 ‘과학 르네상스’의 절정일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 절정을 우리 것으로 만들기 위한 첫째 조건은 우리 모두가 과학의 영역 속에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며, 그런 과학이 실질적으로 인간의 삶을 위해 작동하려면 우리의 인식이 바뀌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기대하는 ‘과학 르네상스’는 이런 융합 이후에 가능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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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작권자 2015-02-26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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