랩 온 어 칩(lab on a chip). 손톱만한 크기의 칩에서 각종 분석실험을 진행하는 것을 일컫는 용어다. 헌데 이 작은 크기의 칩에서도 과연 실제 실험실에서 비커 용액을 섞듯 시약을 섞을 수 있을지, 이에 대한 연구 결과가 관심을 끌고 있다.
박정열 서강대 기계공학과 교수팀이 초소형 마이크로 채널(100만분의 1 크기) 내에서 나노입자가 스스로 구조화되는 능력을 활용, 3차원 소용돌이(와동)를 발생시키는 고효율 마이크로 믹서를 개발한 것이다. 해당 연구결과는 그 성과를 인정받아 나노기술 분야의 권위지인 ‘랩 온 어 칩(Lab on a Chip)’ 4월 21일자에 표지 논문으로 게재되기도 했다.

샘플과 시약의 완벽한 혼합
랩 온어 칩은 수 나노 리터에서 수십 마이크로 리터의 작은 양으로 짧은 시간 안에 샘플에 대한 전처리, 반응, 분리 및 분석이 가능한 시스템이다. 마이크로 펌프와 믹서, 필터, 분리기 및 센서로 구성돼 있으며 샘플 및 반응 시약의 빠르고 효율적인 혼합은 반응을 촉진시켜 분석의 정확도를 개선하고 분석시간을 줄이는데 기여할 수 있다.
때문에 높은 성능의 마이크로 믹서를 개발하는 것은 과학계의 큰 관심사였다. 연구 방향은 주로 확산속도를 증가시키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난류를 이용하면 더욱 효율적인 혼합이 가능하지만 이는 상대적으로 어려운 연구였기에 좋은 성과를 내는 게 녹록치 않았다. 이런 가운데 박정열 교수팀은 매우 간단한 공정과 구성을 통해 마이크로 와동을 발생, 효율적인 마이크로 믹서를 개발했다.
“마이크로 믹서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먼저 랩 온 어 칩이라는 기술을 설명해야 합니다. 랩 온 어 칩은 질병의 진단과 각종 물질의 분석 또는 합성 등에 유용하게 활용되고 있어요. 헌데 이러한 일련의 작업을 위해서는 대상으로 하는 물질을 다른 시약과 혼합해야 하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납니다. 여기서 혼합 작업을 수행하는 것이 바고 마이크로 믹서입니다. 마이크로 믹서가 필요한 이유는 물리적인 현상 때문인데요, 마이크로 리터 정도의 작은 크기의 부피에서는 물의 점성력이 관성력에 비해 크기 때문에 두 물질이 잘 섞이지 않게 됩니다.
이를 잘 섞어주기 위해 예전부터 많은 연구자들이 효율적인 마이크로 믹서를 개발하려고 했지만 기존의 연구는 마이크로 믹서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 두 물질 간 확산거리를 좁히는 데 치중해 왔습니다. 그 이유는 앞서 설명했듯 물의 관성력에 비해 점성력이 커서 이를 직접 극복하는 게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저희팀은 기존의 연구와 달리 미소유체에 전기적인 불안정성을 극대화해 미소유체의 관성력을 획기적으로 증가시켰습니다. 즉, 한 마디로 말하자면 미소유체를 직접 소용돌이로 휘저어 섞어버리는 원리를 사용한 것입니다. 미소유체가 아닌 어느 정도 이상의 부피를 갖는 유체에서는, 예를 들어 커피에 프림을 녹이는 것처럼 직접 휘저어 버리는 것이 당연하고도 빠른 믹싱 방법이지만 미소유체에서는 매우 힘든 일이었죠.”
연구팀은 나노입자를 마이크로 채널 내에 원하는 위치와 형상으로 자기 조립화 할 수 있게 구현해 양이온만을 통과시키는 나노채널 네트워크를 제작했다. 해당 나노채널 네트워크는 전후에 직류전압을 가하면 채널 경계면에 3차원 마이크로 소용돌이(와동)를 일으켜 간단한 구성으로도 샘플과 시약 간 완벽한 혼합을 이룰 수 있다.
“저희팀은 높은 효율의 마이크로 믹서를 개발하기 위해 3차원 나노채널 네트워크를 형성, 나노 채널만의 특징적인 전기적 성질을 활용했습니다. 이러한 전기적 성질은 결국 유체 내 특정 이온의 분리, 이동의 제어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이를 통해 특정 이온만을 효율적으로 통과시킨다든지 혹은 이온의 방향을 제어함으로써 바이오센서, 마이크로 에너지 발생 장치를 만드는 데 활용할 수 있어요.”
물론 기존에도 마이크로 믹서에 대한 개발은 타 연구진에 의해 꾸준히 진행됐다. 하지만 기존의 연구들은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 이유에 대해 묻자 박정열 교수는 “어떻게 보면 미소유체의 특성을 너무 잘 알아서 그런 게 아닌가 싶다”며 운을 뗐다.
“미소유체 특성을 이미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저희팀이 생각한 것처럼 휘저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상상을 많이 하지 못했던 게 아닌가 싶어요. 사실 순수 미소유체만으로는 이처럼 소용돌이를 만들어 휘저을 수 없기도 하고요. 즉, 유체와 나노채널에서 발생하는 특이한 전기적 특성에 대한 이해를 하지 못하면 이처럼 관성력을 획기적으로 증가시킬 방안을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저희팀은 두 물리적 현상에 대해 충분히 이해했고 이를 잘 접목했기에 결국 좋은 결과를 낼 수 있던 게 아닌가 싶어요.”

1밀리초 이내에 99% 이상 혼합
박정열 교수팀이 개발한 믹서는 그 성능 역시 최고수준을 자랑한다. 8 마이크로 이하의 매우 좁은 영역에서 1 밀리 초(msec, 0.001초)이내에 두 물질을 99% 이상 완벽하게 혼합할 수 있다는 게 입증됐다.
그렇다면 이번 연구를 성공으로 이끈 핵심과정은 과연 무엇이라고 할 수 있을까. 박정열 교수는 이에 ‘발상의 전환’과 ‘섬세한 기술’을 언급했다.
“발상의 전환은 아까 말씀드렸듯 기존의 연구자들과 다른 아이디어로 접근한 부분입니다. 기존에는 미소유체의 특징상 와동을 일으키는 것이 어렵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를 구현할 수 있는 효율적인 기술에 대해서도 생각하는 게 쉽지 않았습니다. 때 마침 저희는 3차원 나노채널 네트워크를 형성할 수 있는 기술을 갖고 있었고 이를 통해 유체 내 관성력을 비약적으로 향상시켜 마이크로 소용돌이를 만듦으로써 효율적인 믹서를 제작할 수 있었습니다.”
약 2~3년에 걸쳐 진행한 연구다. 박정열 교수는 “모든 연구가 마찬가지겠지만 이번 연구 역시 함께한 연구자간의 협력과 아이디어 공유가 중요했다”며 연구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연구란 결국 지금까지 없던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연구만 해도 같은 학과에 계시는 김대중 교수님께서 이미 연구하고 계셨던 나노채널의 믹서연구가 선행돼 있었기에 지금의 결과가 나올 수 있던 거예요. 해당 연구에 저희 연구팀의 3차원 나노채널 네트워크가 만나 성능을 획기적으로 개선시킬 수 있던 거죠. 즉 두 연구팀의 협력을 통해 이러한 결과를 낳을 수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저희 역시 해당 나노채널 네트워크의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판단, 지난 2~3년에 걸쳐 적극적인 협력을 한 결과 지금의 성과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박정열 교수는 주로 나노 또는 마이크로 크기의 구조물을 미소유체로 제어해 이를 바이오센서, 에너지 발생장치 및 세포 배양 챔버를 만드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이외에도 미소유체를 활용해 필요한 물질과 원하는 세포만을 선택적으로 분리, 다른 연구에 활용하는 실험을 진행하고 있다.
“이러한 연구를 하게 된 계기는 제가 대학원 때 다른 연구분야를 진행하던 도중 마이크로 세계의 새로운 가능성에 눈을 뜨게 되면서 시작하게 됐습니다. 당시 미세 분야의 세계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어요. 오죽했으면 연구 분야를 전환했을 정도였죠.(웃음) 아마 그때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면 힘들게 연구 전환을 하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물론 연구 과정은 늘 힘들어요. 예상대로 연구가 잘 진행되지 않기도 하죠. 그럼에도 제가 생각하지 못한 부분에서 더 재밌는 현상을 알게 됐을 때 가장 행복감을 느낍니다. 이런 순간에는 정말 의욕이 넘쳐서 빨리 더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에요. 반대로 잘 안 되면 의욕이 많이 감퇴하지요, 저도 사람이니까요.(웃음) 이럴 때는 저도 다른 팀원들도 모두 난감함을 느끼곤 한답니다.”
흥미로운 현상을 보이는 주제를 꾸준히 연구해, 결국 사회적으로 잘 활용될 수 있는 틀을 만들고 싶다는 박정열 교수. 더불어 현재 대학 강단에 서고 있는 만큼 학생들이 연구에 대한 희열과 보람을 느낄 수 있도록 그 과정을 도와주고 싶다며 앞으로의 작은 소망을 전하기도 했다.
“제가 지도한 학생들도 좋은 연구자가 됐으면 좋겠어요. 저 역시 계속 발전해야겠죠. 이렇게 시간이 흐르다보면 나중에는 제가 지도한 학생들과 함께 연구할 날이 오지 않을까요. 그렇게 세상을 이롭게 하는 연구를 계속 진행하고 싶습니다. 물론 모든 과정은 매우 재미있게, 그리고 꾸준히 하고 싶어요.”
- 황정은 객원기자
- hjuun@naver.com
- 저작권자 2015-05-21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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