춥고 어두운 계절이 돌아오면 일부 동물들은 생존을 최대화하기 위한 전략으로 겨울잠을 잔다. 겨울 동안에는 몸을 움직이기 위해 필요한 에너지원인 먹이를 얻기 힘들고, 또한 먹이를 찾기 위해 너무나 많은 에너지를 소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대다수 동물들은 먹이를 얻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에너지를 사용해야 하는지와 먹이를 찾았을 경우 얼마나 많은 양의 에너지를 얻을 수 있는지를 저울질하는 데 본능적인 감각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겨울철에 먹이를 찾지 않고 몸의 에너지를 보관하는 것이 먹이를 찾는 것보다 에너지 손실이 더 적다고 판단되면 동물들은 ‘최적 수렵채집 전략’에 따라 먹이를 찾아다니지 않고 겨울잠을 자게 된다.
겨울잠을 자는 동물은 개구리, 거북, 뱀 등의 변온동물과 햄스터, 다람쥐를 비롯해 덩치 큰 곰까지 다양하다. 특별히 겨울잠이라는 생존책을 채택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진 물고기 중에서도 겨울잠을 자는 종이 있다. 겨울 동안 대부분의 시간을 움직이지 않고 안식처에서 보내는 남극 대구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그 기간 동안 남극 대구는 심장 박동수가 미약한 수준으로 떨어지며 기본 신진대사 역시 여름철에 비해 1/3 정도 감소한다. 흥미로운 점은 남극 대구의 경우 겨울잠을 유발하는 원인이 낮아지는 수온이 아니라 계절에 따라 큰 변화를 보이는 남극해의 조도인 것으로 추정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아프리카 남동쪽의 마다가스카르섬에 사는 살찐꼬리난장이 여우원숭이의 경우 겨울이 아니라 건기 때 휴면상태에 들어간다.
동물들의 겨울잠은 인간에게 있어 또 하나의 신비다. 미국 연구진이 알래스카에 서식하는 야생 흑곰의 동면 상태를 파악한 결과 체온이 0도 가까이 떨어지는 다람쥐 등의 작은 동물들과는 다르게 체온을 6℃ 정도로 유지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러나 대사작용과 산소 소비는 평소의 75% 정도까지 감소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1분당 호흡은 1~2회, 심장 박동수도 1분당 약 4회에 불과했다. 움직이기도 하며 정상적으로 음식물을 섭취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대사작용은 정상치와 비교해 상당히 낮은 상태이다.
다람쥐 겨울잠에서 치매 예방 단서 찾아내
이 같은 동물들의 겨울잠에 대한 연구는 인간의 건강 및 질병에 대한 통찰력을 얻을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유용하다. 우선 동물들의 겨울잠 비결은 인간의 장기이식에 응용할 수 있다. 적출된 인간의 장기는 냉장 보관하더라도 고작해야 며칠만 버틸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겨울잠을 자는 다람쥐의 경우 간과 장을 약 4℃ 이하에서 몇 주일 동안 완전히 건강한 상태로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겨울잠을 자고 난 동물이 휴면 상태의 장기에 신선한 혈액을 재공급하는 비결도 눈여겨 볼만 하다. 인간의 경우 심장마비 이후의 신속한 혈액 재공급은 심장조직을 손상시키는 주요 원인이 되지만, 겨울잠을 자는 동물들은 손상을 방어하는 자체 메커니즘이 존재한다. 이러한 천연의 방어 메커니즘을 알 수 있다면 심장마비를 치료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밖에도 동물들의 겨울잠은 비만, 당뇨 또는 알츠하이머병과 같은 신경퇴행성질환을 치료하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최근 영국 의학연구회의 조반나 말루치 박사는 다람쥐의 동면 메커니즘 속에서 치매를 예방할 수 있는 단서를 찾아냈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다람쥐는 겨울잠을 잘 때 뇌세포를 보호하기 위해 뇌세포 간의 연결 부위인 시냅스가 끊어지면서 뇌세포 사이의 메시지 교환을 전면 중단해 버린다.
그러다가 동면에서 깨어날 때는 체온 상승과 함께 ‘RBM3’라는 저온충격단백질이 증가하면서 끊어졌던 시냅스들이 다시 연결된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 인간의 경우 알츠하이머병 같은 신경퇴행성 질환 초기에 뇌세포의 연결망이 끊어지는데, 다시는 회복되지 않는다. 따라서 다람쥐가 겨울잠에서 깨어날 때의 시냅스 연결 메커니즘을 이용하면 치매를 예방할 수 있는 약물을 개발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조반나 말루치 박사팀은 초기 치매 모델 쥐들을 대상으로 RBM3 단백질을 인위적으로 주입한 결과 시냅스가 다시 형성된 사실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이 연구결과는 네이처 최신호에 게재됐다.
동면 유사 상태를 활용한 저체온요법
만약 인간이 동물처럼 겨울잠을 자게 된다면 발생할 수 있는 부작용 중 하나는 근육 퇴화이다. 하지만 겨울잠을 자는 동물들의 경우 몇 개월 동안 아무런 움직임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깨어난 후 근육 손상이 전혀 발생하지 않는다.
호주 퀸즐랜드대학 연구진은 지난해 줄무늬굴개구리에서 그 비밀을 찾아냈다. ‘서바이빈’과 ‘키나제1’이라는 유전자가 동면 중인 이 개구리의 근육 손상을 막아준다는 것. 서바이빈은 손상되거나 병든 세포를 제거해 근육이 생존하도록 도와주는 세포사멸억제단백질 중 하나이며, 키나제1은 세포분해와 DNA 손상을 막아 근육이 망가지는 것을 방지해주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 두 유전자에 대한 연구가 인간에게 적용될 경우 근육감퇴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들은 물론 미래에 무중력 상태에서 장거리 우주여행을 하는 우주비행사들의 근육 퇴화를 예방할 수 있는 치료법을 발견할 수 있다.
최근 심장 정지를 일으켜 산소 공급이 5분 이상 중단된 환자들의 뇌 손상을 막기 위해 행하는 저체온요법도 동면 유사 상태를 활용한 방법이다. 예를 들어 따뜻한 물속에는 3~4분만 빠져 있어도 회생이 불가능하지만, 차가운 얼음물에 빠졌을 경우 30~40분 후에도 뇌 손상 없이 살아날 수 있는 것은 저체온이 뇌를 보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심장 정지를 일으킨 환자들이 병원에 실려 오면 먼저 심폐소생술로 심장 박동을 되살린 후 냉각 담요나 얼음 팩 등으로 체온을 32.2~33.9℃로 낮추는 저체온요법으로 뇌 손상을 막는다. 이 같은 저체온요법은 급성심근경색을 일으킨 이건희 삼성 회장의 연명 치료시 화제가 된 바 있다.
최근 미국 메릴랜드대와 피츠버그대는 미 국방부의 후원을 받아 기존보다 훨씬 낮은 온도의 새로운 저체온요법을 실시하려는 계획을 추진 중이다. 얼음처럼 차가운 식염수를 몸에 주입해 혈액을 배출시켜 환자 체온을 10~15℃까지 끌어내리는 과감한 형태의 저체온요법이 바로 그것.
연구진은 이미 개나 돼지같이 겨울잠을 자지 않는 동물들을 대상으로 이 새로운 저체온요법을 적용해 뇌 손상 없이 생존시킨 적이 있다고 밝혔다. 여러 가지 우려 때문에 아직 인간에게 적용하진 못하고 있지만, 만약 이 계획이 성공한다면 소생 연구에 일대 혁신을 일으킬 수 있다.
- 이성규 객원편집위원
- 2noel@paran.com
- 저작권자 2015-01-19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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