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러스 혹은 단백질 등 높은 성능의 여과 및 분리에 이용되는 재료인 '고분자 분리막'. 이러한 고분자 분리막은 높은 부가가치를 갖고 있는 만큼 산업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 중에서도 ‘3차원 다공구조’를 가진 ‘고분자 분리막’의 경우 전자재료와 촉매 등에도 적용 가능하기에 더욱 관심을 받고 있다.
물 대신 공기 중 습기를 이용하다
고분자 분리막은 산업적으로나 기술적으로나 매우 중요한 분야다. 하지만 제조과정이 복잡하고 부가적인 공정을 필요로 하기에 상용화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때문에 새로운 기술이 개발되는 게 관건인 분야였다.
이런 가운데 국내 연구진이 공기 중 습기 확산을 이용해 ‘3차원 다공구조 고분자 분리막’을 개발해 주목을 받고 있다. 김경택 UNIST 자연과학부 교수팀이 공기 중 습기를 이용해 고분자 분리막을 만드는 기술을 새롭게 개발한 것이다.
"저희팀의 이번 연구는 블록 공중합체라는 거대한 비누분자가 물속에서 스스로 3차원 구조를 이루는 현상을 이용해 진행한 연구입니다. 물 대신 공기 중 습기를 이용해 같은 현상이 생기도록 한 연구죠. 공기 중의 습기가 블록 공중합체 용액내부로 천천히 확산돼 구조가 생성되기 때문에 대면적의 3차원 다공성 구조를 별도의 부가공정 없이 만들 수 있어요."
김경택 교수팀의 해당 연구는 기존 공정의 복잡함과 어려움으로 상용화에 걸림돌이 됐던 이 분야에 새로운 길을 터준 결과를 가져왔다. 김 교수는 "저희 연구실에서는 지난 몇 년간 새로운 형태의 블록 공중합체를 연구했다. 기존의 선형에서 벗어나 3차원 구조를 지니는 블록 공중합체를 합성하고 이들이 수용액 내에서 보이는 물리적 및 화학적 특성을 연구한 것"이라며 설명을 이어갔다.
"연구 도중 저희가 합성한 가지형-선형 블록 공중합체가 수용액 내에서 스스로 매우 특이한 3차원 구조를 이루고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는 수학적으로는 최소표면 (minimal surface)이라고 정의되는 구조입니다. 고분자에서는 최초로 발견된 형태이기도 하죠. 이 연구결과는 작년 6월 '네이처 케미스트리(Nature Chemistry)' 에 발표되기도 했어요. 해당 현상을 이용하면 복잡한 부가공정이 없이 매우 아름답게 정의된, 수학적 대칭구조를 지니는 다공성 고분자재료를 얻을 수 있습니다. 재료의 응용범위를 넓히기 위해서는 대면적의 평면형태를 다공구조를 유지한 상태로 얻어야 할 필요가 있었고 때문에 저희 팀은 이 연구를 진행하게 됐어요."
연구팀은 새로운 ‘습기 확산 자기조립법’을 개발할 수 있었다. 이는 다른 공정 없이 고분자 용액을 습한 공기에 노출시켜 용액 내 습기를 확산시키는 방법이다. 성질이 다른 두 고분자를 하나의 분자로 합성한 ‘블록 공중합체’는 물과 섞이면 스스로 ‘3차원 다공 구조’를 형성하는데 김 교수는 물 대신 습기를 이용한 ‘습기 확산 자기조립법’을 통해 ‘3차원 다공구조 고분자 분리막’을 합성하는 방법을 개발했다.
"물론 연구 도중 어려움도 많았습니다. 기존과 달리 새로운 방법을 찾는 게 가장 큰 문제였어요. 저희가 개발한 블록공중합체에는 두 물질이 사용됩니다. 물에 녹지 않는 소수성 블록에는 흔히 스티로폼에 사용되는 폴리스티렌이, 물에 녹는 친수성 블록에는 미용재료로 많이 이용되는 폴리에틸렌글리콜이 사용됐죠. 폴리스티렌은 상온에서 유리와 같은 상태로 존재하기 때문에 저희 블록 공중합체를 물에 녹여야 할 때는 유기용매의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저희 블록 공중합체를 유기용매에 녹인 후 그 용액에 물을 넣어 구조의 형성을 유도하는데 이때 물과 유기용매가 잘 섞이도록 하기 위해 교반을 하는데 교반과정 중 생기는 물리적 힘 때문에 고분자 다공구조는 작은 공과 같은 콜로이드의 형태를 지니게 돼요. 우유 안에 지방들이 존재하는 형태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죠. 즉, 대면적의 평면구조를 같은 방법으로 형성하기 위해서는 교반이 없는 상태에서 블록 공중합체의 용액 내부로 물을 넣는 방법이 필요하게 되는데, 이 방법을 생각하는 게 가장 큰 어려움이었습니다."
새로운 발견 만큼 중요한 건 시선의 전환
그렇다면 김경택 교수팀은 '새로운 방법'을 과연 어떻게 찾아냈을까. 김 교수는 "모든 연구가 그렇듯 결국 마지막은 우연"이라며 웃어보였다.
"이런 저런 시도를 하던 도중 새로운 방법이 발견됐어요. 연구를 진행하던 당시는 8월 중순의 매우 습한 장마철이었습니다. 그 때 저희 공동연구자 중 한 명이 실험 용액을 벤치 위에 조금 흘렸는데 바로 치우지 않고 그대로 두었던 거죠. 아마도 실험 용액을 흘린 것에 대해 스스로 힘들어하지 않았나 싶어요. 때문에 치울 새도 없었던 거죠. 그런데 시간이 지난 후 청소를 하려고 돌아와 보니 용액이 마른 자리에 매우 탁한 막 형태의 흔적이 남아있는 거예요. 일반적으로 탁한 상태의 흔적은 내부에 빛을 산란시키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거든요. 혹시나 싶어 이 흔적을 조금 긁어낸 후 전자현미경으로 관찰했더니 탁한 흔적은 블록 공중합체가 이룬 3차원 구조라는 것을 알 수 있었어요."
김경택 교수에 따르면 장마철 공기 중 습기는 때에 따라 상대습도 100%에 이른다. 여기서 힌트를 얻어 비슷한 실험을 상대습도 100% 로 맞춘 밀폐용기 내에서 진행해 보니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이러한 발견 이후 다소간의 화학적 상식을 이용해 방법을 보완했고 다시 실험을 진행해 지금의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연구팀은 이를 일컬어 '습기확산 자기조립 방법(Solvent Diffusion-Evaporation Mediated Self-Assembly (SDEMS)' 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그 때는 뭐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기뻤습니다. 연구가 늘 그렇지만, 새로운 것을 발견할 때의 희열은 무엇에도 견줄 수 없어요. 얻어진 실험결과가 매우 아름다울 때 느끼는 기쁨이 있는데 그것은 연구자들만 알 수 있는 기분이죠. 밥을 먹지 않아도 배부르다, 는 말을 이럴 때 하는 것 같아요.(웃음)"
새로운 결과를 찾아냈을 때의 희열을 만끽하는 중독성을 떨쳐낼 수 없어, 지금까지 그는 연구생활을 이어오고 있다. 김경택 교수팀은 주로 블록 공중합체의 화학구조를 변화시켜 새로운 화학구조를 지니는 고분자를 합성하고, 이들의 물리적 화학적 거동을 관찰하는 연구를 진행한다. 소위 말하는 기초연구인 셈이다. 이에 대해 그는 "어떻게 보면 지루한 일이지만 또 어떻게 보면 매우 획기적인 일"이라고 이야기 했다.
"지금까지 시도되지 않은 연구를 진행 하다보면 기존의 관찰이나 해석으로 풀 수 없는 문제와 마주치는 경우가 생깁니다. 이번 연구도 처음에는 많은 실패를 거쳤어요. 마지막 순간 '이건 실패한 실험' 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결과나 한 번 보자 하는 마음으로 실험실에 갔기에 매듭을 지을 수 있던 셈이죠. 돌이켜 생각해보면 저희가 실험을 할 때 그 결과를 예측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이 때 예측했던 결과와 다른 결과를 얻으면 많은 경우 실험이 실패했다고 여기게 돼요. 하지만 때에 따라서는 그것이 실패가 아닌 경우도 있어요. 다만 지금껏 보지 못했던 결과였던 거죠. 이것들을 다시 해석할 때 새로운 발견에 이르게 되는 것 같아요."
김경택 교수는 평소 화학구조, 그 중에서도 특히 고분자의 화학구조와 물리적 화학적 특성사이의 관계에 관심이 많은 연구자다. 대학 시절, 어느 날 막연히 화학구조가 아름답다고 느껴졌고 그 때 연구의 방향과 목표가 생겼다. 김 교수는 "분자의 구조가 그 분자의 기능을 규정하는 대표적인 경우가 DNA의 이중나선 구조"라며 "저희 연구팀의 궁극적인 목표는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단백질, DNA, 탄수화물 같은 고분자들과 같이 기능할 수 있는 합성고분자를 찾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단순한 대체제가 아닌, 궁극적으로 생명체 내에서 생체고분자가 보이는 기능과 현상을 화학적으로 구현하는 것이 목표라는 의미다.
"이것이 달성될 수 있도록 더욱 연구에 매진할 것입니다. 앞으로 더욱 열심히 연구결과를 발표해서 저희가 발견한 분야가 고분자 화학 및 물리에서 새로운 분야로 자리매김 될 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 아울러 지금껏 생각해 보지 못한 화학적 연구결과의 사회적 문제 해결에의 이용, 대중들과의 소통에도 노력을 기울여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우리 과학의 발전은 결국 미래 세대들이 얼마나 관심을 갖고 참여하느냐, 사회적 지원을 얼마나 받을 수 있을까에 의해 결정된다고 생각합니다. 과학자들도 상아탑 안에서 과학자끼리의 소통에만 만족하지 말고 사회적 지원을 통해 얻어진 연구 성과들이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 기여할 수 있도록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황정은 객원기자
- hjuun@naver.com
- 저작권자 2015-03-25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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